배낭을 멘 청년. 길도 잘 안 닦여있어 걷기 불편했다. 땀 나면 갈아입어야 할 옷가지, 냄새나면 씻어야 할 세면도구, 갈증이 심할 때 마셔야 할 물 등 그의 배낭은 보기만 해도 한 짐 가득 들어있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경상도 청년은 한 짐 가득 들어있는 배낭과 함께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1979년 사찰지도도 없던 시절, 청년은 기차노선과 시간이 적혀 있는 기차 안내표 옆 자그마하게 적힌 몇 글자 안 되는 사찰 정보에 의지해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안성 서울소아청소년과의원 이종린(67, 보현) 원장이 20대에 전국을 돌아다니
최소한의 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양치도 한 컵 이상 물을 쓰는 법이 없다. 식사는 채식위주. 적당 양만 먹고 남기지 않는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손수건도 함께 접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는다. 화장지를 아끼기 위함이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해 텀블러를 챙기고 의미 없이 사용되고 있는 전기가 없는지 확인 후 문을 나선다. 자동차가 없기에 대중교통으로 출근하고,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을 이용한다. 뷔페라도 가는 날이면 접시는 1개. 그 이상은 낭비일 뿐이다.남궁선(73, 석천) 마음편한요양병원 원장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에너지 소비
“여서도 학교 다닐 수 있다. 집에 가지말고 여 있거라.”고암 스님의 한 마디에 ‘까까머리’ 열 네살 소년은 그저 “예, 스님”하고 대답했다. 23년간 제주 법정사항일운동 고증에 앞장서온 윤봉택(66) 서귀포불교문화원장의 불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1970년 여름방학 우연히 머물게 된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그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정하자, 고암 스님은 며칠 뒤 그의 머리를 깎고 ‘정효’라 불렀다. “부처님 가르침 멀리 있지 않다. 계율 잘 지키고 법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라. 옳지 않거든, 다시 옳게 하거라.”고암 스님(1899~1988
시련은 파도처럼 삶에 몰아쳤다. 2010년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말기 암이었다. 구효성 염불봉사단 팀장은 생업을 포기한 채 아내의 간병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지극정성에도 아내는 6개월의 투병 끝에 결국 곁을 떠났다.아내를 보내고 오는 길, 비라도 세차게 내리면 좋으련만 하늘은 야속하게도 화창하기만 했다. 온 몸이 텅 비어버린 느낌. 저리고 아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무기력했고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매일 동료들과,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밤만
평균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 가만히 있어도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하늘에 떠 있는 해는 지면에 아지랑이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고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지 않다. 아픈 사람들은 남루한 차림을 한 채 계속 몰려온다. 아무리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다지만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눈길 닿는 곳곳에는 쓰레기가 쌓여있고 본래는 맑았을 물이 구정물로 변해 악취를 풍기고 있다. 도마뱀과 바퀴벌레, 이름 모를 벌레들이 돌아다니는 이곳에서 건강 챙김이 어려울 것은 자명하다.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챙길 수
문 밖에 실려 나온 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손때 묻은 화병부터 세월의 흔적이 깊게 배인 자재들이 하나둘 밖으로 옮겨졌다. 45년 동안 정성을 다해 일궈온 자신의 꽃꽂이 학원이 정리되는 날이었다. 지역모임을 위해 꽃꽂이 학원을 법당으로 보시하겠다고 발원했지만, 하나둘 품을 떠나는 추억들에 갈피를 못 잡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집에 틀어박혀 꼬박 15일을 보냈다. 일렁이는 번뇌 속에서 마음을 다잡으며 하심하고 또 하심했다. 점차 내면과 마주할 수 있었고, 허전하던 마음속에는 기쁨이 시나브로 차올랐다.옥정원(금강월, 84) 불자는
“감히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해?”욱한 마음이 올라왔다. 이향순 미국 조지아주립대학 비교문학과 교수의 미간이 잔뜩 찌푸러졌다.사건의 발단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이수한 이 교수는 당시 조지아주립대학에서 비교문학과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루는 동료 교수가 그에게 급작스런 부탁 하나를 하게 된다.“이 교수, 개인 사정이 생겨서 이번 학기에 ‘동아시아문화’ 수업을 못 하게 됐어. 이번 학기만 수업 좀 부탁할게.”학과에서 유일한 동아시아인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동아시
최종환 영등포장애인복지관장은 30여년간 불교사회복지 한 길만을 걸었다. 사회복지라는 개념조차 정립 되지 못한 시절, 이웃종교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회복지 현장에 혈혈단신 뛰어들었다. 불교계가 사회복지에 진출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았고,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설립을 주도하며 타 복지법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오늘날 불교복지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배경에 그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최 관장과 불교의 인연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스님이었던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군 제대 후 복학한 20대 청년. 유능한 학자가 되기 위해, 훌륭한 교수가 되기 위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시곗바늘이 정오를 가리키면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점심식사와 잠시 낮잠도 취했다. 쳇바퀴처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돼 비몽사몽하던 그에게 인생이 허무하게 다가왔다. 아무 이유없이 찾아온 무상감이니 금방 사라질거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경허·청담·성철·탄허·혜암 스님 등 선지식 스님들의 법문집을 두루 읽었지만 답은 없었다. ‘출가해야겠다. 수행에 매진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만
반지하 방에서 혼자 사는 조 모 할머니는 밤이 무섭다. 조그마한 바람에도 녹이 슨 창문은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금방이라도 낡은 창이 떨어져 내릴 것 같아 잠을 설치기 일쑤다. 비라도 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창문 틈사이로 비가 흘러 순식간에 바닥이 흥건해진다.수년째 침대에만 누워 있는 아들을 간호하는 70대 안 모 할머니에게 주방은 잠시 숨 돌릴 수 있는 보금자리이자 휴식공간이다. 그러나 어느 날, 싱크대 배수관을 타고 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벽은 곰팡이로 가득 찼고, 물에 퉁퉁 불은 장판은 들고 일어났다. 지켜
70인치 큼직한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 현장이었다. ‘대한민국 연등회’가 인류무형문화유산 후보로 올라있었다. 2020년 12월16일. 한국은 이미 늦은 밤이었다. 하지만 현장을 지켜보고자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과 문화재청장, 관계부처 실무자들이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모였다. 화면엔 의사봉을 쥔 자줏빛 재킷의 올리비아 문화부 장관이 나오고 있었다.박상희 연등회보존위원회 전문위원은 올리비아 장관의 작은 움직임에도 괜스레 심장이 뛰었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저는 스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이연수씨에게 건넨 한 마디. 당혹스러웠다.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당시 조계사 인근에서 운영하고 있던 꽃집엔 손님이 많았다. 스님들도 많이 찾아왔다. 때론 아이를 돌볼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빴다. 조계사 교육국장 소임을 맡아 자주 가게를 찾던 명본 스님이 가끔 아이를 돌봐주었다. 아들은 자연스레 스님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세상구경을 떠났다. 스님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 후로도 종종 그런 말을 건넸다.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던 날
2016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듬해 두 번째 어머니라 부르던 장모님마저 돌아가셨다. 항상 애써주신 두 어머니의 늙음과 병듦,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며 한 가지 원을 세웠다. ‘의사로서, 불자로서 사람들의 노년을 아름답게 장식하겠다.’ 공동체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모임’(아노모)을 설립하게 된 계기다.분당 티케이정형외과 김태균 원장은 충북 진천의 한 시골서 5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땡볕 아래 밭에서 힘겹게 일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근처 절에서 탁발하는 스님들이 올 때마다 곳간 깊숙이 넣어둔 쌀 주머
거센 바람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지상 75m.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의 텐트 한켠에는 자그마한 미륵반가사유상이 모셔져 있다. 춥고 외로운 농성현장에서 그를 지탱해준 건 부처님이었다. 농성 107일째, 동료 간호사가 건강상의 문제로 먼저 내려가 홀로 남은 천막에서 그는 어김없이 500배 기도와 명상에 매진했다. 불쑥불쑥 밀려드는 번뇌 속에서 스스로를 비워낸 지 227일이 되던 날 해고노동자 박문진씨는 복직과 노조활동 자유가 명시된 합의서를 들고 당당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2020년 2월12일은 해고 14년 만에 가장 평화적이고 불교적
2014년 5월 어느날, 한상진(41)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은 경찰과 함께 한 건물을 급습했다. 건물은 가시덩쿨로 뒤덮혀 있었다. 헐어가는 지붕엔 틈새마다 잡초가 무성했다. 철제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갈색 테이프로 칭칭 감은 비닐 덩어리가 보였다. 한눈에도 금동불상임을 알 수 있었다.안으로 더 들어가니 건물벽에 핀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건물 안에 널브러진 종이 박스가 족히 수백 개는 넘어보였다. 신문지로 둘둘 말려있는 건 탱화였다. 고개를 들자 천장에 녹슨 구조물이 훤히 보였다
삶 속으로 부처님이 들어온 건 한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불교가 자연스레 스며들었다고 하지만 리수실 포교사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한국전쟁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터전을 일궈야 했다. 치열했던 그의 삶 속에 종교가 들어갈 틈은 없었다. 회사 업무로 바쁜 와중에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이렇게 10년을 보냈다. 몸도 마음도 한계에 다다랐을 때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던 그가 눈을 떴을 땐 자신도 모르게 “절에 가야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다닥다닥 좁은 골목길 사이로 낮은 다세대 주택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 아랫반송마을. 이 마을 주택들과 어우러져 규모는 비록 작지만 꾸준한 수행지도로 내실을 다져온 도량이 있다. 대한불교법화종 용수사(회주 진파, 주지 행원 스님)다. 주위를 오가는 이들이 절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소박한 이 도량에 최근 봄꽃처럼 훈훈한 소식이 퍼졌다. 용수사 신도 지임분 보살(대각심, 80)이 30여년 동안 이어온 한글 ‘법화경’ 사경 110권을 최근 회향했다는 소식이었다. 도통 자랑할 줄 모르던 회주 진파 스님의 뿌듯한 목소리만으
2016년 6월3일은 부처님께 처음으로 삼배를 올리며 불자가 되기를 서원한 날이다. 그전까지 주위에 불자 친구들이 많아 같이 어울려 다니며 유명 사찰을 관광한 적은 있어도 부처님께 제대로 된 절 한 번 올려본 적 없었다. 첫 삼배 올린 날을 지금까지 인생의 가장 큰 기념일로 여기며 생생히 기억한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알야 바로기제 새바라 다바…”일산에 위치한 덕양선원에 불자들이 모여 외는 대비주 소리가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알리고자 전국을 순회하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평등버스가 대전-부산-순천-홍성을 거쳐 천안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무지개 옷을 입은 소성욱(활동가명 소주, 30) 위원과 동료활동가들이 내리자 사방에서 모여든 개신교 신자들이 이들을 에워쌌다. “동성애는 죄악이다” “동성애는 질병이다” 등 모욕적인 발언이 쏟아졌다. 고의적인 방해도 이어졌다. 갈등의 현장에서 매번 겪어왔던 상황이라 제법 익숙해졌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지만 실은 피고름도 가시지 않은 상처 옆으로 또 다른 상처 하나가 자리 잡을 뿐이었다.‘동성애가 죄’라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일이 또렷하다. 2009년 늦여름, 여행을 좋아하던 양현모 작가는 오랜만에 경주를 찾았다. 시내에서 차로 30분만 가면 동해안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길 듣고, 문무대왕릉이 있는 감포 바다로 향하는 길이었다. 당시엔 고속도로가 없었고 국도만 있었다. 운전 하다 창밖을 보니 거대한 석탑 두 기가 보였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이었다. 호기심에 차를 세웠고 탑이 있는 언덕으로 뚜벅뚜벅 올라갔다. 이제 막 해질 무렵, 쌀쌀하고 어둑한 시간이었다. 감은사지엔 석탑을 환히 비추는 조명이 있었다. 그 강렬한 빛에 눈이 부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