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서는 23대 법흥왕 22년(535)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는 왕호를 칭하면서 국왕의 초월자적 위상을 과시하였다. 그보다 11년 전의 법흥왕 11년(524)에 탁부라는 소속부를 관칭하고, 동시에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이라고 호칭하였던 것에 비하면 국왕의 위상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모즉지라는 법흥왕의 본래 이름이 ‘삼국사기’에서는 원종(原宗), ‘양서(梁書)’나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의 중국 역사서에서는 모진(募秦)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모즉지와 모진은 같은 말에 대한 한자 표
신라에서는 23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라는 희생을 치른 이후에 비로소 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다. 이 해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가 국가부흥을 이루면서 웅천주에 양나라의 무제(武帝)를 위해 사찰을 세우고 대통사(大通寺)로 이름한 때였다. ‘대통’이라는 사찰 이름은 양의 무제가 동태사(同泰寺)에 사신(捨身)하였다가 환궁하여 새로운 연호로 선포한 것이었다. 이로써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8년(521) 양의 승려 원표(元表)의 사신 파견, 그리고 백제와 양에서 일어난 불교 흥륭의 사건들과도 무관
신라의 불교공인은 3국 중 가장 늦은 23대 법흥왕 14년(527)에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백제가 침류왕 원년(384)에 불교를 공인한 사실과 비교하면 150여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점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었다. 신라 하대에 김용행(金用行)이 찬술한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에 의하면, 고구려 승려 아도(我道)가 13대 미추이사금 2년(263) 신라에 와서 불교를 전하려다 죽음을 피하여 일선군의 모례의 집에 숨었다는 설화를 전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로
동아시아문화권의 공통적인 요소로서는 한자와 유교, 율령제, 불교 등이 거론되어 왔다. 이러한 요소들은 중국에서 성립되어 한국·일본·베트남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에서는 3국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수용되어 국가체제 정비와 지배이념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가장 선진적인 고구려에서는 일찍이 소수림왕 2년(372) 불교를 수용하고, 동시에 태학을 설립하였으며, 그 다음해(373)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동시에 수용하였다. 불교가 국가의 정신적 통일을 뒷받침한 것이라면, 태학은 한문과 유교경
4~6세기 신라는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특히 22대 지증마립간대(500~514)부터 23대 법흥왕대(514~540)의 6세기 전반은 연맹왕국으로부터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전환되는 하나의 획을 긋는 시기였다. 그러한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서 그 동안 주목된 것은 지증마립간 4년(503) ‘사로’에서 ‘신라’로의 국명 변경과 ‘마립간’ 대신 ‘왕’의 칭호 사용, 6년(505) 주군제(州郡制)의 실시, 그리고 법흥왕 7년(520) 율령의 반포, 14년(527) 불교의 공인 등의 사건이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 즈음 신라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17대 나물마립간(365〜402)부터 22대 지증마립간(500〜514)의 시기로서, 부족국가의 전통을 계승한 ‘사로국’으로부터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인 ‘신라’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그 중간의 과도기에 해당된다. 나물마립간 때부터 김 씨가 왕위세습권을 독점하게 되고, 19대 눌지마립간 때에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지증마립간 4년(503) 마침내 신라라는 국명과 중국식의 왕호를 독점적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러 왕권은 크게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 즈음 신라는 사회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17대 나물마립간부터 22대 지증마립간의 시기로서, 신라사를 5시기로 구분할 때 제2기에 해당된다. 역사학에서는 이 시기의 왕호를 기준으로 ‘마립간(麻立干)’시대로 부르거나, 왕권이 매우 미약하고 지방에 대한 지배가 느슨한 상태라는 점에서 ‘연맹왕국(聯盟王國)’시대라 일컫기도 하였다. 또 고고학 분야에서는 이 기간에 조성된 왕경 중심 지배층의 독특한 무덤양식을 근거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시대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최근 발견된 신라의 3개
1000년 왕국 신라 역사에 관해서는 종래 2종의 시대구분법이 전해져 왔다. 첫째는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시대구분론으로서 상대(上代, 1대 박혁거세거서간~28대 진덕여왕) 중대(中代, 29대 태종무열왕~36대 혜공왕) 하대(下代,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의 3분법이다. 둘째는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시대구분론으로 상고(上古, 1대 박혁거세거서간~22대 지증마립간) 중고(中古,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하고(下古, 29대 태종무열왕~56대 경순왕)의 3분법이다. 이상의 2종 시대구분에서 공통적인 것은 28대 진덕여왕대(
7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고구려-백제-왜로 연결되는 남북 연합세력과 수·당-신라로 연결되는 동서 동맹세력과의 각축전이 전개되었는데, 이 양대 진영을 대표해서 직접 대결한 것이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이었다. 고구려가 수·당과 혈투를 계속하는 동안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급히 서둘렀다. 30대 무왕(武王, 600~641)과 31대 의자왕(義慈王, 641~660) 때의 연이은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는 수와 당에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치열한 3국 사이의 전쟁은 마침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로 귀결되었다. 먼저
제의 26대 성왕(聖王, 523〜554)은 대내적으로는 임시 피난수도였던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로 천도하면서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불교를 통한 사상적 통일을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 남조왕조인 양(梁), 그리고 왜와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성왕은 이렇게 길러지고 조직화된 국력을 가지고서 필생의 염원인 한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과의 공동작전으로, 고구려의 귀족 사이의 내분에 의해 방위력이 약화된 것을 틈타
백제는 근초고왕대(346~375)에 대내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대외적으로 정복전쟁을 추진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26년(371)에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쳐들어가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고구려의 남쪽으로의 진출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모용씨(慕容氏)의 전연(前燕)과 백제의 침입으로 한때 위기를 맞았던 고구려가 불교 공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의 개혁정책을 통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이어 활발한 대외팽창의 정책을 추진하게 되자 백제는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광개토왕(391~413)의 정복적인 팽
백제는 A.D. 2세기 즈음 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부여족 계통의 유이민 집단의 하나로서 한강 유역에서 대두한 백제국(伯濟國)이 발전한 나라였다. 백제는 처음에 목지국(目支國)이 맹주가 되어 성립된 마한 50여 소국의 하나로 출발하였으나, 마한 지역을 점차로 병합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갔다. 백제는 먼저 온조집단(溫祚集團)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에 정착한 같은 계통의 유이민 집단들인 비류집단(沸流集團)과 해루집단(解婁集團)을 통합하여 연맹체를 형성하고, 이어 선주민인 마한의 여러 소국세력들을 정복해 가는 방향을 취하였다.3세기 중엽인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대외관계는 정복과 항쟁의 역사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쟁의 역사적 정점을 이루는 것이 고구려의 수(隋)·당(唐)과의 항쟁이었고, 그를 이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한 삼국통일의 전쟁이었다. 이같이 삼국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쟁의 연속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인 외교관계나 문화적인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중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걸림이 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수에 의한 중국통일을 불과 10여년 앞둔 25대 평원왕 18년(576) 즈음 대승상 왕고덕
고구려는 광개토왕대(391〜413)를 거쳐 장수왕대(413 491)에 이르러 만주와 한반도의 북쪽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옹유하고 통치체제·문물제도가 완비된 대제국을 형성하여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6세기 중반기에 이르면 국내외의 정세는 크게 변하였다.국내의 문제로서는 545년 안원왕(安原王)의 사후 왕위계승 문제로 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중앙의 지배세력이 분열되기 시작하였으며, 대외적인 문제로서는 투르크민족의 일파인 돌궐(突厥)이 유연(柔然)을 쳐부수고 중국북방 초원지대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여 고구려의 서북지방을 위협하게
고구려·백제·신라 3국은 고대국가로의 발전과정과 불교 공인에 선후의 차이가 있었다. 3국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37년, 백제는 B.C. 18년, 신라는 B.C. 57년에 각기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국가의 발전과정은 상당한 시차를 두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순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3국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영주(英主)들을 비교하여 보면 선후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먼저 왕위 계승권을 확립하여 고대국가 발전의 기반을 확립하였던 왕은 고구려의 6대 태조왕(
한국 재래의 무격신앙(巫覡信仰)은 불교와 같은 일정한 경전이나 체계적인 교리가 없으며, 주술적인 내용이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직화된 교단도 없으며, 그 제의(祭儀)가 사회적 공동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삼국시대가 되면서 공동체의 성격이 변하였고, 또한 교의체계를 갖춘 세계종교인 불교가 들어오게 되면서 무격신앙이 차지했던 지위를 불교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교의체계가 없는 무격신앙세계종교 불교에 지위 넘겨불교는 무신론의 종교지만토착신을 호법신으로 포용스님, 현세이익 축원하는 건무격의 기능
한국 재래의 사회습속이나 토착신앙은 새로 전래된 불교와 갈등을 빚어 순교자를 배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교와 타협하여 그것을 수용하는 토대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의 사회습속이나 토착신앙은 불교의 한국적 전개의 방향을 규정하였으며, 그렇게 전개된 불교는 이후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과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이 된 재래의 습속이나 신앙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며, 나아가 불교와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기원전 6·5세기 무렵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는 중국을 거쳐 4세기 중반에는 한반도에 전해졌고, 일본에는 6세기 전반에 비로소 백제로부터 전해졌다. 그런데 일본은 백제로부터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에 관하여 긴메이(欽明) 13년(壬申年, 552, 聖王 30년)설과, 긴메이 무오년(戊午年, 538, 聖王 16년)설의 두 가지가 전해져 왔는데, 최근의 일본 학계에서는 후자의 설을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일본이 불교 받아들인 시기552년, 538년 두 가지 존재쇼토쿠 태자 스승 혜자 스님일본의 불교 발
고구려는 372년, 백제는 384년, 신라는 527년 각각 불교를 공인한 이후에 삼국 모두 중국·서역승들의 전도와 유학 승려들의 활약으로 불교는 융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인하여 교단의 실상과 불교의 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는 어렵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여 극히 단편적인 사실만이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에 전해지는 자료를 통하여 해외에서 활약한 승려들의 행적을 다수 확인할 수 있는데, 국내 자료의 부족을 일부나마 보충할 수 있다. 해외에서 활약한 승려들의 행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의하면 “본래 대가야국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대 520년간 이어졌다”고 하며 또한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인용하여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하였다”고 하여 ‘가락국기’의 본가야(금관가야)의 건국신화와는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고대 한국의 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