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대국가 가운데 문헌 자료가 가장 적게 남아있는 국가가 가야이다. 따라서 불교전래에 대해서도 자료가 극히 미비하여 그 전반적인 실상은 알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문헌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駕落國記)’와 ‘파사석탑조(婆娑石塔條)’의 내용 가운데서 가야의 건국신화의 형태로 불교전래 사실이 전하고 있으며, 고고학 자료로는 고령지역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연꽃무늬를 통해 불교전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가야 관련 불교전래 기록‘삼국유사’ 극히 일부 전해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시집오며 불교도 들어와파사석탑 등 몇
신라의 불교 공인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하여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그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사이에 1년의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법흥왕 15년(528) 이차돈이 흥륜사 창건 공사의 책임을 지고 순교하였으며, 이어 그 이듬해에 살생(殺生)을 금하는 영을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삼국사기’ 편찬 때에 신라본기 법흥왕조의 기년(즉위칭원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1년의 착오가 발생된 것에 연유한 것이다.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최치원 찬술의 ‘봉암사지증대사비’ 및 김부식 찬
고구려·백제·신라 3국 가운데 불교 수용이 가장 늦은 나라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전진(前秦)에서 순도가 와서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으며, 백제는 그보다 2년 뒤인 침류왕 원년(384) 동진(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가 와서 불교를 전하였다. 이 두 나라에서는 중국의 왕조들과 그전부터 교류하면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고, 특히 우호 관계에 있는 전진과 동진으로부터 각기 국가적인 사절을 매개로 하여 불교가 전래되어 왔기 때문에 이렇다 할 알력을 빚어냄이 없이 왕실에 의해 순탄하게 받아들여졌다
백제의 불교 전래와 수용 과정에 관한 자료는 고구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너무 희소하다. ‘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에서는 백제에서 불교를 최초로 받아들인 때를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9월로 전해주고 있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뒤 12년만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침류왕 원년 9월에 호승(胡僧, 인도나 서역 출신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들어옴에 왕은 그를 맞이하여 궁내에 있게 하고 예경하니, 불법이 이로부터 비롯하였다. 2년(385)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10인을 득도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
불교는 기원전 6〜5세기 즈음 인도에서 성립되어 기원후 1세기 전후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리고 다시 4세기 후반부터 한반도에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고대국가로 한창 발전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가장 선진적인 국가는 고구려였으며, 백제와 신라가 그 뒤를 이었다. 불교의 전래도 고구려가 가장 일렀으며, 백제와 신라가 그 뒤를 이었다.불교전래의 공적인 기록은소수림왕 2년 전진서 수용기록이 풍부한 신라에 비해고구려·백제는 상대적 빈곤중국의 사료인 ‘양고승전’에공 기록보다
최근 한국불교사에 대한 교양적인 저서들이 다양하게 간행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개설서로서 평가될 수 있는 것은 김용태(金龍泰)의 ‘한국불교사(韓國佛敎史’(일본어판, 2017) 뿐이다. 이 책에서는 특히 한국불교사를 7시기로 시대구분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삼국시대-불교의 수용과 확산 통일신라시대-불교의 대중화와 교학의 융성 고려시대-불교의 융성과 선·교종의 공존 조선시대전기-유불교체의 시대성과 억불의 전개 조선시대후기-불교의 존립과 전통의 계승 근대-식민지불교의 굴절과 근대성의 모색 현대-식민지유산의 청산과 정통성의 탐색 등으
1945년 해방된 이후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불교사 연구 활동은 전반적으로 침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활약하던 연구자들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이들 일본인 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들 수 있는 것은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와 에다 토시오(江田俊雄) 등 2인이었다. 이들은 당대 한국인 학자들에 견주어 수준 높은 업적을 내고 있었으나, 역사인식의 면에서는 여전히 식민지사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인도·중국·일본 중심의‘삼국불교전통사관’ 틀1970년대부터 탈피 시작일본의 전후
1930년대 한국불교의 종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김영수(金映遂, 1884~1967)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영수에 앞서 권상로·이능화·김해은 등에 의해서도 불교종파에 대한 관심이 기울여져 왔으나, 단편적인 소개의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한국불교사에서의 오교구산(五敎九山)과 오교양종(五敎兩宗)에 대한 이해체계의 정립은 김영수에 의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불교전문학교 김영수 교수‘종파사’ 논문 잇따라 발표한국인 학자 학술논문으로전문 학술지 실린 최초 사례김영수 교수의 시대구분론교종과 선종 관계 이해 축역사적 사실 정확히 하려는학자
이상 박한영·이능화·권상로 등 3인의 한국불교사 시대구분론에서 보여주는 역사의식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당대의 불교에서 그때까지의 침체를 벗어나 부흥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불교계몽운동가·불교개혁가로서의 공통된 견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조선총독부 자료조사 토대로서구 학문 안목 갖춘 학자들한국불교사 연구성과 선보여누리카야 쓴 ‘조선선교사’는방대한 자료섭렵 돋보이지만불교 전통·계승에는 무관심에다 토시오도 한국불교 매진이전 학자들 시대구분론 종합한국불교사 부정적 인식 한계그러나 대한제국과 조선총
1910년대 출간된 최초의 한국불교통사는 권상로(1879~1965)의 ‘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1917)와 이능화(1868~1945)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1918) 등 두 책이다. 이 두 책은 근대불교학의 성과로 분류되지만, 시대구분은 모두 전통적인 왕조 중심의 구분법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계몽운동과 불교사의 연구에 매진하였던 이들의 문제의식은 삼국·고려·조선 등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교학과 실천불교로 구분한이능화 학설, 진일보 이론불교쇠퇴의 유교 책임론은개화지식인 특성이자 한계
한국불교사의 전개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에 우선 고려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시대구분이다. 불교사의 연구에서 시대구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은 곧 그 연구자의 불교사인식의 태도와 방법을 나타내주게 된다. 그러므로 연구자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서 시대구분이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같은 연구자라도 시대구분의 기준에 따라 다양한 구분이 가능하다. 불교사 시대구분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첫째 전통적인 왕조 중심의 구분, 둘째 불교교리의 발전 단계나 종파의 변천과정을 기준으로 한 구분, 셋째
한국의 역사는 오랫동안 중앙집권적인 왕조체제를 경험해 왔기 때문에 불교의 수용과 발전과정에서 국가권력, 특히 국왕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불교입장에서도 때로는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한 적이 없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불교사의 이해에 국왕과 불교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국왕과 불교 양측면의 관점에서의 검토가 요구된다. 그러나 불교의 사회적인 역할은 왕권의 강화와 국가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배체제의 운영과 불교교단의
필자는 일본 불교사학의 삼국불교전통사관 같은 편협한 국수주의적 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본인 학자들의 식민지사관, 그리고 그 근거가 된 삼국불교전통사관에 입각한 역사인식이 한국불교사의 이해와 평가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내자는 것이다. 또한 일본 불교인의 불교사 인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불교를 고립시켜 민족주의적 시각과 호교적 입장에서 한국불교 우수성의 논거로서 회통불교론과 호국불교론만을 되뇌이는 편협하고 공허한 논의에서도 벗어나자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최남선의 한국불교사 연구의 의의와 가치는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 가운데서 회통불교론에 대한 이해는 여러 불교학파 사이의 사상적 대립과 통합, 교학불교와 실천불교 사이의 갈등과 조화, 같은 실천불교로서 선과 염불의 갈등과 조화 등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원효(元曉)의 불교를 회통불교의 연원으로 인식할 때, 원효불교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효 당시의 불교계 상황과 사상적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또한 다음 시대 원효불교의 계승과정을 추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불교학계는 한국불교사에서 신라의 원효·고려의 의천(義天)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담론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불교사에 대한 두드러진 업적을 내놓았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의 ‘고착성’과 ‘종속성’, 누카리아 카이텐(忽滑谷快天)의 ‘지나불교의 연장’, 오야 토쿠죠(大屋德城)의 ‘대륙불교의 연장’과 ‘독창성의 결여’ 등의 성격 규정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에 대해 한국인 학자들의 반론이 물론 제기되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1929년 권상로가 ‘조선불교사의 이합관(離合觀)’(‘佛敎’ 62)에서 한국불교사를 분리(分離)와 통일(統一)
한국불교와 일본불교는 9세기 초부터 확실히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한국불교는 실천불교인 선종이 새로 전래되어 주류적인 종파의 하나로 발전하였던 데 비하여 일본불교는 밀교적인 성격의 진언종과 천태종이 새로 전래되어 주류적인 종파가 되었다. 그리고 12세기 말경에 이르면 두 나라의 불교계는 각각 새로운 불교혁신운동이 전개되면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나타냈다. 한국에서는 1170년 무인정권이 수립되고, 일본에서도 뒤이어 1185년 가마쿠라(鎌倉)막부가 성립되었는데, 무인들이 집권하였다는 비슷한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는 시대에 따른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역사적 성격을 주제별로 비교하여 보았는데, 다음에는 시대에 따른 변화과정을 추적하여 각 단계별로 두 나라 불교내용의 차이점을 지적하겠다. 일본불교사는 아스카(飛鳥)시대·나라(奈良)시대·헤이안(平安)시대·가마쿠라(鎌倉)시대 등으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본의 불교가 시작되는 아스카시대는 수도가 아스카에 있던 약 1세기 동안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592년 스이코(推古)천황 즉위부터 710년 헤이죠교(平城京)로의 천도까지를 가리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스카 불교는
인도의 대승불교를 발전시켜 성립된 중국의 독자적인 일승불교는 한역대장경의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 전지역에 유포되어 동아시아 불교의 원류가 되었다. 그 결과 중국 주변 여러 나라의 불교는 대체적으로 중국불교의 발전과정에서 거치는 단계를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 공통적인 성격을 나타내게 되었다. 동아시아 불교권의 공통적인 특성으로는 한역대장경과 대승불교, 그리고 국가불교 등이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각 나라와 지역에 따라 세부적인 불교내용과 성격에서는 다른 점이 없지 않다.동아시아 공통적인 현상으로한역경전·대승·국가불교 특성한국불교는 회통불
동아시아 불교권의 특징으로서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현실중시의 경향과 국가불교로서의 색채가 농후한 점이다. 원래 인도불교에서는 현실세계(世間)와 이상세계(出世間)를 구분하는 이원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어서 현실은 고통의 세계로서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상세계보다는 현실세계를 중시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내세(來世)의 문제까지도 현실세계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불교에 대한 기대도 이상보다는 현실에서의 역할을 중시하여 개인적으로는 양재초복(禳災招福)이나 무병장수(無病長壽)
한역대장경을 근거로 성립된 동아시아 불교권의 또 다른 공통적인 특징은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스리랑카·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타이 등 남아시아 불교권이 소승불교(小乘佛敎 또는 上座佛敎)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크게 다르다. 인도불교의 발전과정에서 본다면 원시(原始 또는 根本)불교에서 소승[部派]불교로 발전하고, 다시 대승불교가 흥기하였는데,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대는 인도에서 이미 대승불교가 융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인도불교의 발전과정과는 상관없이 대승과 소승이 뒤섞여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