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회장 현성 스님)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자원봉사 한마당을 펼쳤다. 청교련은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청소년 70여명과 함께 10월 31일 광명 혜명양로원을 찾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목욕돕기, 네일아트, 발마사지, 주변 청소 등 쾌적한 생활 환경 만들기에 앞장섰다. 또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염주와 연꽃을 만드는 등 불심을 키우는 시간도 마련했다. 참가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끼를 발휘해 마련한 레크레이션시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어울리는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박주미 기자 jumi@beopbo.com
불교레크레이션협회(회장 운광 스님)가 어린이 법회 지도자를 위한 강습회를 개최한다. 불교레크레이션협회는 11월 14일 오전 9시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제 34회 겨울불교학교를 위한 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한다. 찬불가와 율동, 장식풍선과 마술 등 어린이 법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놀이법을 강습한다. 강습회 참가비는 3만원이며 전화로 접수받는다. 02)738-7860 박주미 기자 jumi@beopbo.com
수행 시작 후 비로소 오랜 방황 끝마쳐 나는 원래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불교에 대해 조금씩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결혼을 한 후부터 서서히 발심을 하기 시작했으나 그것도 아내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방편중의 하나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고,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듯이 나도 아내의 불심과 정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꽤나 미안했었고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인가 의문을 제기하면서 나 자신을 조금씩 뒤 돌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러한 미안한 마음을 없애보려고 금강경과 천수경 사경도 해보았고, 모 선원에서 삼천 배에 도전도 해보았다. 글쎄 얻은 것이라고는 불경에 나오는 한자를 지식으로 습득한 것과 절을 함으로써 나도 삼천
해인사는 고암 스님이 가장 오랫동안 주석했던 사찰이다. 화를 낼 줄 모르는 스님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 세 가지 큰 병에 걸려있다. 그 세 가지 큰 병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탐내고. 성질내고, 어리석음에 빠지는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삼독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성불의 길이라 일러주셨다. 그러나 삼독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늘 다짐하면서도 순간순간 ‘아차!’ 하는 사이에 삼독심에 빠지고 마는 것이 바로 우리 어리석은 중생이다. 특히 어처구니없는 일, 못된 일을 당했을 때 화를 내지 않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우리가 늘 인욕바라밀을 강조하는 것도 억울한 일, 분한 일, 고통스런 일을 참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는 인욕바라밀이
사경은 진신사리 모시듯 정성으로 수행 후 가정 평화-건강 되찾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남편과의 불화가 잦아졌을 때 직지사에서 운영하는 사경반에 들어 매주 화요일마다 사경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른 보살님들 하는 게 마냥 보기 좋아 한 것이었는데 하면 할수록 내 자신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손에 펜 잡을 일이 드물었던지라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도 집안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당당해지기도 했다. 싫은 소리를 몇 번씩 해야 책을 보던 아이들이 나의 모습을 보고는 저절로 책을 보는 습관을 갖게 됐고 텔레비전 보는 시간도 줄고 아이들과의 대화시간이 늘어났다. 사경 수행을 위해 붓글씨까지 배우는 것을
Q :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보면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라고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 아닌가요? A :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말이 갖는 인식의 한계에서 말미암는 숱한 오해 중 하나가 돌출된 결과일 뿐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자면 욕심을 버리는 것은 발원의 시작이며, 발원을 하는 것은 욕심의 궁극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욕심과 발원은 삶을 가꿔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필수요소인 셈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을 뒤집어 놓고 보면, 무엇인가를 끝없이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의 연
사찰은 일찍 여읜 어머니의 넓은 품 부처님 발자취를 뒤따르듯 부처님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쓰고 그 환희와 고마움에 절을 올리는 일이 일상이 된지 벌써 5년이 다 돼간다. 이 생 끝날 때까지 이렇게 수행하면 부처님 같아질까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수행의 순간만은 내와 부처가 하나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 어머니나 할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다 불자가 된 것에 비한다면 나는 아주 특별한 계기로 부처님을 알게 됐다. 20대 처녀시절에 한 친구가 결혼식을 하는데 예식장이 아닌 사찰에서 한다는 것이다. 신기한 마음에 따라가 보았는데 그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성스러움과 경건함 그리고 소박함이 배어 있었다. 소란스러움 속에서 15분 만에 끝나는 그런 예식이 아니었다. 그때
득남 기원하다 부처님 참 뜻 알고 수행 이웃과의 조화로운 삶 속에 ‘참나’ 있어 내가 불교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나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구 갓바위에 가서 늘 기도를 올렸고 그 공덕 때문이었는지 딸 둘에 이어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는 아이 키우는 재미에 부처님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대구 팔봉산 갓바위에 가보니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있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보고 지나쳤을 것인데 그 날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2500년이라는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 갔는데도 사람들이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의 태어남을 저토록 찬탄하는 이유는 뭘까? 불교라는 것이 그저 현세구복적인 종교는
자비행 절로 생활화…늘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님 당신이 당신 모습 그리라 해 놓고서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다시 한번 당신의 그 미소를 보여주세요.’ 사불수행을 시작한지 몇 개월이 지나도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미소를 그리리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행이 잘 되지 않을 때 불보살님들께 떼를 써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 마음이 관세음보살이 아니라는 사실만 알게 됐다. 그럴때면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삼배를 올리고 다라니를 염송한다. 그리고는 관세음보살의 형상을 가지런히 앞에 놓는다. 관세음보살의 상호는 참으로 평화롭고 자비로운 미소로 나와 내 주변 그리고 저 멀리까지 빛을 보낸다. 그 관상이 사라지지 않고 안정될 때까지 집중하면서 모든 긴장을 긴 호흡과 함께 풀어 내놓는다. 관세음
Q. “자꾸 염불하라고 하는데, 지금 제가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중에 한가하면 수행하지요. 그리고 죽을 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왕생 한다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말과 같이 가능할까요? 사람의 됨됨이는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염불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람이, 막상 죽을 때 나무아미타불이 될 턱이 없습니다. 죽음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누리고 살던 모든 것을 두고 갈 수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그런 상황이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보다 무서운 때가 어디 또 있었겠습니까? 그 어떤 경험이나 지식으로도 감당하지 못하기에, 오직 공포에 찌들어 죽어갈 뿐입니다. 당연히 몸뚱이나 가족이나 명예
사불수행은 내 마음 비추는 거울 늘 웃는 부처님 그리려 마음수행 “보살님, 부처님이 절에만 계신답디까? 보살님 집에 부처님이 넷이나 있고 보살님 안에도 부처님이 또 한 분 있는데 날마다 이렇게 절에만 오면 집에 있는 산 부처들은 어찌 합니까?” 절에 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짓는 게 일상이었던 내게 이 한마디가 나를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20년 넘게 동고동락한 시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갑자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집안의 적막함과 누추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나는 부처님을 마음의 도피처로 여기고 날마다 절에 가서 공양간 설거지를 돕고 법당 청소며 화장실 청소, 도량 청소를 하면
태국 남부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원이 없다. 다만 70 여년 전에 한 비구에 의해서 창설된 숲속의 수행도량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이 ‘해탈의 정원’이라는 의미의 수안 목(Suan Mokkh)이다. 필자는 1995년 12월 19일에 남부의 수랏 타니(Surat Thani)의 차이야(Chaiya)에 있는 수안 목을 방문하여 조사한 적이 있었다. 아찬 붓다다사가 입적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찬 붓다다사가 수안 목에서 펼치려고 했던 삶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찬 붓다다사 스님은 고독하고 엄격한 수행을 하면서 경·율을 연구한 후 불교개혁을 시도했다. 아찬 붓다다사(1906-1993)는 26세의 약관의 나이인 1932년에 자신의 고향에 수안 목을 창설하였다. 이곳은 아찬 붓다다사가 주장
“육체의 달콤한 쾌락 버리고 나면 “온전한 깨달음을 만날 수 있을까” 네란자라 강에서 바라본 전정각산. 오른쪽으로 세나 마을의 고행림이 펼쳐져 있다. 붓다는 이곳에서 6년간 죽음을 무릅쓰고 고행을 했다. 알라라와 웃다카 스승의 가르침을 충분히 소화했음에도 원하는 해답을 얻지 못한 붓다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게 가르침을 줄 스승은 없는 것인가.”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밖에 없음을 깨달은 붓다는 마가다 왕국의 우루벨라로 갈 것을 결심하고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신흥 강국이었던 마가다 국 곳곳에는 제각각 독특한 수행법을 가지고 수행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고행은 가장 인기있고, 인정받는 수행법이었다. 당시 고행을 수행의 방편으로
공주 계룡산 자락에 자리한 학림사(鶴林寺)는 한 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도량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주변 경관이 빼어나다. 학이 나래펴고 날아든 형국 계룡이 날개를 펴고 승천하는 듯한 뒷산과 좌측의 장군봉과 임금봉의 위엄이 조화를 이루고, 전면의 갑하산은 학이 나래를 펴고 학림사를 향하여 날아오는 형국이다. 동남간에는 연화봉이 솟아서 제석천왕이 연꽃을 바치는 모습이며 남쪽에는 문필봉이 우백호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학림사 좌측으로 흐르는 청룡계곡에는 세속의 미진도 떨어버린듯한 청량옥수가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흐르고 있다. 학림사는 지난 40여년간 수행에 매진해 온 학산 대원 스님이 지난 1986년 8월 개산했다. 대원 스님은 용성 스님의 선맥을 이은 고암 스님의 전법제자로서 현재 속세
청차는 발효과정을 가져 원하는 향과 맛이 나면, 살청하여 더 이상 발효를 막아 품질을 고정시키고 유념과 건조로 마무리하는 즉 홍차처럼 만들다가 녹차 제다공정으로 완성시키는 차다. 중국 복건성에서 처음 만들어 지게 되어 18~19세기에는 유럽에 까지 명성을 떨쳤다. 19세기 청차의 산지는 복건성 북부에서 남부까지 전 지역이었고, 광동성 동부 및 대만에서도 생산되었다. 청차의 주산지는 복건성 남부지역인 민남(南)을 중심으로 발전되었고, 20세기 초 청나라가 멸망 후 1950년에 이르러 중국 내전으로 인해 청차의 생산은 쇠퇴하였다. 80년대에 이르러 청차의 보건작용과 더불어 매혹적인 향과 맛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어 급속히 옛 명성을 찾고 있다. 현재 세계적인 차 소비 흐름은 홍차는 아
‘똑같은 차를 우려도 맛은 각양각색이다’라는 이야기 들어보셨죠? 차는 어떤 차를, 어떤 물에, 어떤 온도에, 어떤 다기에 우려내는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냅니다. 일반 차, 고급차, 중국·일본차 등 각기 우려내는 방법이 다르지만 일반적인 녹차를 중심으로 차 맛있게 우려내는 방법을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이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A 찻물 준비하기 『동다송』에 ‘차는 물의 정신이요, 물은 차의 몸이니, 진수가 아니면 그 정신이 드러나지 않으며, 정갈한 차가 아니면 그 몸을 엿볼 수 없다(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 非眞水莫顯其神 非精茶莫窺其體)’ 라는 말이 있듯 차를 마심에 있어 물은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차를 우릴 때 가장 좋은 찻물은 산에서 천천히 흘러 내려오는 샘물이다.
삶의 통찰 번뜩이는 입문서 단문-명쾌한 그림도 일품 한 편의 시가 주는 감동이 때로 한 권의 소설보다 진할 때가 있다. 이는 수행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두툼하고 어려운 수행서보다도 얇지만 오히려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책이 종종 있다. 불일출판사의 『관』이 바로 그러한 경우다.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자유’란 부재가 붙은 이 책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스틸포인트연구소에서 명상지도자로 활동하는 수자타 씨 저술로 86년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돼 소개됐다. 이후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지금까지 24쇄 째 발행하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이 책은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초판 당시까지만 해도 낯설었던 수식관과 위파사나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수행입문서다. 그렇다고 무작정 방법만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애끓는 절규와 통곡소리가 그치치 않는 장례식장. 그러나 내 앞엔 조문객 하나 없이 돌아가신 노인이 있다. 이 분도 분명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친지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고 부인과 자식들이 있었을 텐데 무슨 사연으로 이렇게 홀로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지…. 멀고 외로운 길 가는데 내 염불과 부처님 말씀이 벗이 되어 주기를 다음엔 더 좋은 곳에서 태어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나는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죽은 이의 몸을 씻기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옷인 수의를 단정히 입혀 극락왕생하길 기원한다. 한 달에도 예닐곱 차례씩 시체를 직접 만지는 이 일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종교란 내 일신의 평안만을 위해 있는 것이라 여겼다.
종로거리를 가득 메운 운구행렬 광경 효봉 스님은 6·25 피난길에 인연을 맺은 경남 통영의 도솔암에 머물고 계셨다. 이 무렵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동산 스님, 청담 스님을 주축으로 불교정화운동이 오월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효봉 스님도 흔쾌히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고 그 일로 서울에 자주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에도 선봉 이때 선학원에는 불교정화운동을 지지하는 전국의 청정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선학원이야말로 청정 비구 스님들의 유일한 의지처요,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며 구심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별의별 비구 스님들이 서울에만 올라오면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고 방 한칸에 여러 스님들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친상 이후 장례지도사 길 선택 “엄마 이제 집에 가자.” 7살 꼬마 아이는 절에 가는 길이 멀고 험하기만 했다. 아이의 손목을 낚아챈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끌고 그 고갯길을 넘었다. 어머니는 절에서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절을 했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지금은 나의 일상이 된 염불과 절.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른 채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도선사에 발을 디딘 게 불교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내가 죽은 이들을 염해주는 독특한 직업을 갖게된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겠지만 고단한 어머니 삶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구원의 빛이었다. 이렇게 평생을 불심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덕에 나는 자연스레 불자가 되었고 보림청년회 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