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골이 깊다고들 말합니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고 상인들이 하소연합니다. 경기침체의 원인은 다각도에서 살필 수 있겠지만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딱 부러지게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는데 이 책 의 저자가 단번에 깔끔하게 정리해주었습니다. “원래 불황이란 물건이 팔리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물건이 팔리지 않게 되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 않게 되었을까? 그것은 살 필요가 없고, 사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살 필요가 없고, 사고 싶은 것이 없을까? 그것은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25-126쪽) 절대적인 빈곤과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숨을 거두는 순간에 “지금 들어가야겠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고 말했고, 헨리 데이빗 소로는 임종 시에 그의 이모가 “죽기 전에 하느님과 화해해라”고 말하자 “내가 언제 하느님과 싸웠는데?”라며 반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탐욕과 위선에 대해 “끔찍하다, 끔찍해”라고 중얼거리며 숨을 거둔 조셉 콘래드의 주인공 커르츠의 말은 고(故) 장영희 교수가 영미 문학작품 속에서 가장 유명한 유언일 것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83쪽 요약인용) 저자인 고인은 문인들과 작품 속 주인공들의 마지막 말을 소개하고는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이 있는’ 삶, 사랑이 있는 삶을 나는 매일 쓸데없는 말,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 진실
몇 해 전 ‘낙태’와 관련한 한 세미나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이 낙태의 실태와 그 폐해에 대한 다양한 사례 및 연구결과를 보고하더니 “타종교계는 낙태 불가 입장이다. 그러니 불교계도 입장을 정리해서 발표하길 바란다”라고 주문했습니다. 불교계의 입장이라... 세상 어느 종교가 생명을 경시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 낙태를 잘하는 일이라고 권장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하지만 설령 부처님이 낙태에 대해 옳지 않다고 규정했다고 해서 정작 이 문제에 봉착한 임산부에게 “경전에서 이렇게 말했으니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확인시켜 주신 분입니다. 즉, 자기 문제를 자기 입장에서 자기 머리와 가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알지 못한다.”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뮬러의 이 일갈(一喝)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부딪치거나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종교를 갖고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막스 뮬러의 주장은 사실 쓸데없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건 종교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몇 해 전 지하철에서 일어난 일을 떠올려보면 막스 뮬러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내 옆자리에 앉은 어떤 여성이 말을 걸어왔을 때입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 여성은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신앙을 갖고 계세요?”“네.” 무슨 이야기를 나누
바라문 한 사람이 스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바라문이란 당시 브라만 신과 관련한 일(제사)을 하는 사람, 또는 그 종교와 관련한 수행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스님들은 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가 당시 스님들에게 그리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바라문은 출가를 거절당하자 큰 충격을 받은 듯 크게 상심하였습니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부처님은 안색이 누렇게 뜨고 핏줄이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야위어가는 이유가 출가를 거절당한 때문임을 아시고 비구들을 불러 모아 묻습니다. “그대들 가운데 저 바라문이 선행을 한 것을 본 사람 없는가?”그러자 지혜가 으뜸인 사리풋타(사리불) 장로가 어느 때인가 바라문에게서 음식을 한 국자 받은 기억을 떠올렸고, 그 일을 말씀드리자
새끼 돼지 윌버는 무녀리입니다.무녀리는 한 어미의 태에서 나온 새끼들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온 까닭에 대체로 비실비실한 녀석을 말합니다. 키워봤자 품만 들고 먹이만 축낼 뿐인지라 도살당하기 직전에 윌버는 천만다행으로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윌버의 삶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크리스마스에 베이컨과 햄으로 만들기 위해 그때까지 잘 먹여 살을 찌우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비극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그저 속수무책으로 오돌오돌 떨 뿐인 윌버에게는 든든한 친구 암거미 샬롯이 있었습니다. 샬롯은 친구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수를 짜냅니다. 그건 바로 거미줄을 이용해서 멋진 문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그리하여 밤새 거미줄을 짜고 그 가운데에 ‘대단한 돼지’라는 글자를 그려놓았는데 이것을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접수한 크메르 루즈의 뒤에는 폴 포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산혁명을 완수한 캄보디아 내에서 폴 포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채 2백 명도 되지 않았고, 그 2백 명의 사람들도 그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지독하게도 익명과 비밀을 좋아하였고, 사람들이 그런 자신을 몰라보는 것을 즐긴, 참으로 기묘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필립 쇼트는 폴 포트를 중국에서 딱 한번 가까이 본 적이 있는데 그의 매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초연한 모습에 무척 끌렸으며, 해탈한 승려처럼 보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토록 두꺼운 을 펼친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건 바로, 불살생과 자비와 지혜를 모토로 하는 불교를 받아들인 국가에서 어쩌면 그토록 잔인하기 짝이
지진, 천둥, 화재, 아버지. 이 네 가지는 일본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들어간 것이 묘합니다. 그만큼 일본의 아버지는 가족들과 정을 나누는 구성원이기 보다는 권위로써 군림하고 명령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구시대의 상징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아버지는 늙어서도 그 권위를 벗지 못하지만 가족들과 살갑게 어울리지 못해도 문제될 게 없으니 평생 소리 없이 그 간극을 메워가며 내조를 해온 아내가 있는 덕분입니다. 그렇지만 아내가 홀연히 세상을 먼저 떠나면 그야말로 큰일이 벌어집니다. 자식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고, 제 손으로 밥상을 차려본 적이 없는 늙어버린 아버지는 이제 자식들에게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할 지경에 놓였습니다. 전형적인 일본 아버지인 주인공은 딸 넷
19세기 말의 스페인.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이 마지막 공모의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사람들을 억압하였고, 혼란의 틈새를 이용해서 기득권층은 어떻게든 제 몫을 더 챙기려고 온갖 술수를 짜내고 세력을 부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틈에서 대다수 민중들은 대물림해 온 가난과 핍박에 신물이 났지만 어쩌지 못한 채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지하고 불결하고 불행한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민들은 자신의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려면 복종하고 기도하고 참회하고 끝없이 갖다 바쳐야만 했습니다. “교육을 받아라, 저축을 하라, 경건한 삶을 살아라, 기도하라”라는 슬로건을 국가는 내세웠지만 이 역시 대다수 민중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육과 종교는 사람들을 더욱 종속
부처님에 관해서는 숱한 찬양의 표현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경전들 속에서 내가 만난 부처님은 거창하기 짝이 없는 찬양과 칭송 너머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자신에게 가장 솔직하신 분이셨습니다. 거의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간절하게 법문을 펼친 분. 언제나 떠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는 분. 왕과 만날 때나 걸인과 만날 때나 그 마음이 한결 같아서 담담한 자비의 빛이 넘쳐나던 분. 사람들이 공양물을 정성스레 올리면 그 마음을 따뜻하게 격려하신 뒤에 공양물을 다시 공동체(승가)에게 귀속시킨 분. 가난한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면서도 재물의 다소(多少) 너머 그들의 마음과 근기를 먼저 살피신 분. 생사를 극복하는 진리에 관한 한은 추호의 비약도 과장도 용납하
지식인의 반열에 들어선다는 것은 결코 그 삶이 녹록치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식인은 황제 앞에서 당당히 쓴 소리를 뱉을 수도 있지만, 국면전환을 꾀하는 권력자의 희생물이 되거나 성난 민중의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시대가 어지러우면 너나할 것 없이 지식인의 소재(所在)를 묻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이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도 아니요, 시대문제를 대번에 해결해줄 답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묻습니다. “대체 지식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어쩌면 시대의 부름에 귀를 막고 외면할 수도 있겠지만 ‘글자를 아는 순간 우환이 시작된다’는 자조 섞인 넋두리가 말해주듯 역사 앞에 불려나가거나 자진해서 앞장을 서게 되니 ‘제가 담근 쓴 술을 제가 다 마셔버려야 하는’ 지식인의 운명이 기가 막힐 뿐
사회는 관계의 그물입니다. 그런데 관계라는 것은 언제나 상하좌우의 구별이 지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높은 지위에 있으면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존경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배웁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품는 본능과도 같은 사랑의 마음을 강조합니다. 아랫사람이 수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윗사람의 내리사랑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알아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치사랑’은 무엇일까요? 아마 ‘존경’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존경하고, 학생은 선생을 존경하고, 국민은 사회 지도층 인사를 존경하고, 신자들은 자기네 종교의 수행자나 성직자를 존경하는 것이 바로 치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의 나이는 대략 2600살이고, 그 몸집은 인도 땅에서 시작하여 중근동, 그리고 동북아시아에 이르고 최근 유럽과 미 대륙에 까지 이릅니다. 이런 사정이니 지역마다, 시대마다 내세우는 부처의 정의는 각양각색입니다. 결국 2600여 년 전 인도 땅에서 실재하셨던 바로 그 붓다와 사람들의 가슴속에 깃든 붓다는 전혀 딴판이 되어버렸습니다. 1700여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 불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에게 고타마 붓다는 낯설기 짝이 없고 심지어는 그리 꼭 알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고타마 붓다라는 실존인물보다 그 존재를 형용하고 있는 ‘진리’라는 막연한 베일에 호기심이 더 컸으며, 덩달아 베일을 휘감으면 자기도 부처가 되는 양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
며칠 전 어느 일간지 문화부 기자가 문득 내게 요즘 불교계에는 어떤 책이 화제인가를 물었습니다. 기자들은 사석에서도 취재하듯 말을 던지는 경우가 많아 언제나 긴장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불서 두어 권이 떠올라서 대답을 했지만 좀 당황했습니다. 책과 관련한 활동을 하다 보니 종종 지금까지 몇 권 읽었는가, 집에 책이 몇 권 있는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책과 관련한 가장 멋진 질문은 “지금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가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묻는 사람은 정말 상대방의 삶이 궁금한 사람이고, 이런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책이란 녀석은 수량으로
문상하러 갈 일이 갑자기 생겼습니다. 사실, 문상은 언제나 ‘갑자기’ 가게 됩니다. 한번은 날씨도 매우 사나운데다 내 개인적인 사정 또한 고약해서 조문하러 가는 마음이 영 가볍지 않기에 “하필 이런 때에 돌아가셨담..”이라고, 그야말로 천벌을 받을 투정을 내뱉었습니다. 이런 내게 엄마는 혀를 차시며 나무라셨습니다. “가신 분이야 오죽 하셨을까... 산 사람 사정 봐주면서 떠나는 줄 아니?”우리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이유는 잘 모릅니다. 여러 종교에서는 인간이 태어나게 된 배경을 비장한 교리로 설명하고 있지만 ‘왜 태어났나’하는 물음에 딱히 달아줄 대답이 사실 없습니다. 일단 태어났으니 무조건 살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죽어서는 안 될 이유’를 대라면 그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탐스런 눈송이가 유리창 가득 쏟아집니다. 눈이 오시는 날 아침이면 나는 경을 펼칩니다. 경전을 읽고 글 쓰는 것이 직업이니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새하얀 눈송이가 소복하게 내려 쌓이는 날 아침이면, 경을 펼쳐들고 차분하게 읽어갑니다. 이런 때면 세상을 환히 밝히는 보름달이 떠오른 밤에 부왕을 죽인 죄업을 씻고자 부처님에게 나아간 아자타삿투 왕처럼 내 마음도 무척 간절해집니다. 오늘 아침에는 『입보리행론』을 펼쳤습니다.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 전 남인도 어느 왕국에 왕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느 날 꿈속에서 ‘왕의 자리는 지옥과 같다’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출가를 꿈꾸다가 마침내 왕위를 계승하기 전날 밤에 남몰래 궁을 빠져 나와 나란다 대학으로 들어갑니다. 왕
한번 상상해봅시다.어느 날 우리나라에 엉뚱한 사람들이 “여기 본래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거든”이라면서 무단으로 들어앉았습니다. 밀쳐내려 했지만 강대국들이 떡하니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기에 억울하기는 해도 폭탄 맞고 싶지 않아서 그냥 견디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야금야금 땅따먹기 놀이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설마…”하며 그저 쳐다보기만 했는데,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주요한 지점을 다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오히려 난민 취급하면서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박탈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온갖 가공할 무기를 동원해서 살육을 일삼고 있습니다. 상상도 이 정도면 수준 이하요, 얼토당토않은 내용이라며 비난받기 딱 좋습니다.
“초겨울의 짧은 해는 서산에 비켜섰다. 큰방 앞에서 객이 왔음을 알리자 지객 스님이 친절히 객실로 안내한다. 객실은 따뜻하고 감자밥은 꿀맛이다. 무척이나 시장했던 탓이리라. 진부 버스정류소에서부터 줄곧 걸었으니 피곤이 온몸에 눅진눅진하다.” 『선방일기』는 산사에서 첫날밤을 맞게 되는 선객의 노곤함을 간결하기 그지없는 문체로 시작합니다. 이맘때면 항상 이 책을 펼칩니다. 그건 아마 거두절미하고 들입다 시작하는 산사 첫날 풍경의 저돌적인 매력 때문일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온갖 잡무를 마무리하고 일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 술잔을 나누느라 연신 분주하고 술렁이고 흥청댈 텐데 그 인연을 다 털어버리고 헐헐한 기분으로 바랑 하나 메고 산사로 찾아든 선객의 심정을 짐작해봅니다. 하지만 동안거 석 달을 지내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12월이 되기 무섭게 안방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금종, 은종이랑 온갖 장식물을 매달고 겨우 내내 트리 밑에서 카드를 그리거나 캐럴을 부르고 동화책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물론 성탄절 전야에는 머리맡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자는 것을 잊지 않았지요. 적어도 내 어린 시절은 크리스마스의 환상으로 가득 하였습니다. 나보다 2년 먼저 서울로 유학 갔던 언니가 방학한 다음 날 집에 내려와서 이 한 마디를 던지기 전까지는 말입니다.“산타가 진짜 있다고 믿었냐? 엄마 아빠가 산타였어. 이런 바보!” 혹시 뒤에 엄마라도 서계실까 살펴본 뒤에 천기누설이라도 하는 양 낮은 목소리로 들려준 그 말을 듣던 당시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설마 했었는데 그럴 줄이야. 엄마 아빠가 내 머리맡에
세상 사람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뉩니다.채찍질의 기미만 보여도 기수의 뜻을 감지하여 달리는 탁월한 말과 같은 사람. 채찍이 닿기 직전에 잘 달리는 좋은 말과 같은 사람. 채찍이 닿아야 달리기 시작하는 빈약한 말과 같은 사람. 채찍의 고통이 뼈에 사무친 다음에야 달리기 시작하는 나쁜 말과 같은 사람. 자기가 첫 번째 말에 해당한다고 자신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 번째와 네 번째 말에 해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 자신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코가 석자나 빠져도 그게 위기인 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위인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분야에서 최고, 달인이 되고 싶은 생각을 마음 한켠에 가지고 있으니 이걸 기특하다고 해야 할 지 주제넘다고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