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고와 굶주림,/ 그리고 추위와 더위를 능히 참고 견뎌야 한다./ 이런 것들이 사방에서 엄습해 오더라도/ 집 없는 구도자는/ 부디 용기를 잃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숫타니파타 병을 고치는 것은 의사가 할 일이다. 신의 은총을 받아서 병을 고친다고 날뛰는 사람들이 요즈음 부쩍 늘어나고 있다. 필리핀에 가면 심령수술이라 해서 맨손으로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순전히 속임수라는 말도 있지만 여하튼 그런 것하고 종교적인 궁극의 목표하고는 그 길이 전혀 다르다. 부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의 마지막 여행길에서 사촌동생 아난다에게 몇 번이나 등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 성자의 모습인가. “아난다, 등이 아프구나, 누울 자리를 펴라. 나는 이제 늙고 병든 수레
“삶은 삶에 맡기고 죽음은 죽음에 맡겨라(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 (벽암록) 선 수행자의 사물에 대한 판단은 깊고 짧다. 일단 판단이 끝나면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돌격한다. 이 판단과 행동력은 능률적이며 매사에 쉽게 몰입할 수가 있다.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무슨 일에나 쉽게 몰입할 수가 있다. 일을 할 때는 철저히 하고 또 놀 때는 철저히 노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이상 철저히 살고 또 죽어야 할 때는 자취마저 없이 죽어버린다. 죽은 듯한 삶, 사는 듯 마는 듯한 죽음의 불철저는 선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금물이다. 선 수행자는 무(無)로서 비워진 상태다. 그러므로 선 수행자는 자유인이다. 그 어떤 것에도 붙잡히지 않는 해탈인이다. 이 세상에는 갖가지의 욕망이 들끓고 있다. 그래서 ‘
“일어나라. 앉아라. 잠이 웬 말인가. 고뇌의 화살에 맞아 신음하고 있는 자가 지금 웬 잠이 이리 깊은가. 일어나라. 앉아라. 평온을 얻기 위해서 오직 진리의 길만을 곧바로 가라. 너의 게으름을 알아차린 저 죽음의 왕이 다시는 너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다시는 너를 묶지 못하게 하라.” (숫타니파타) 어떤 화가가 천사를 그리기 위하여 모델을 물색하다가 한 소년을 찾아냈다. 소년의 눈은 영감에 차 있었고 얼굴은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화가는 이 소년을 모델로 멋진 천사의 모습을 그렸다. 그후 40년이 지나서 이 화가는 다시 천사의 모습과 대치되는 악마를 그리기로 했다. 길에 나가 악마의 모델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봤지만 좀처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가는 궁리 끝에 감옥으로 달려갔다.
“음식을 먹을 때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이 음식이 여기 올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공로가 있었는가. 둘째, 내가 과연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가. 셋째, 식탐(食貪)은 생기지 않았는가. 넷째, 이 음식은 내 몸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약이다. 다섯째, 기필코 성불하기 위하여 이 음식을 먹는다.” (선원청규 오관게) 6년간 고행을 했던 부처님은 수자타에게 우유를 받아먹은 후 그의 집으로 가서 얼마동안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자타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으며 6년간의 고행으로 쇠잔해진 몸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우유를 먹고 기운을 차려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갔으며 마지막 입멸(入滅)할 때도 역시 춘다라는 보석세공이 대접한 버섯요리를 잡수시고 이것이
“한 생각이라도 단 한 생각이라도 의심을 품지 말라(念念勿生疑).”(관음경) ‘누군가가 해주겠지…’ 이런 식으로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가져서는 진리는커녕 도토리 개밥도 안 된다. 하려면 한번 미쳐 보는 것이다. 앞뒤 좌우를 다 보다가는 정말 진리의 문도 열 수 없고 또 삶의 바다에도 뛰어들어갈 수 없다. 젖 달라고 결사적으로 우는 어린 아기에게 어머니는 젖을 준다는 이 사실을 특히 불교인들은 명심해야 한다. 요즈음의 우리나라 불교인들만큼 미적지근하고 또 눈치를 살피는 종교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눈치를 살피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의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게 될까’ 하고 의심하는 이것도 일종은 ‘의(疑·vicikitsa)’라는 하나의 큰 번뇌인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강하면 강한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다 잘들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만든 질서라는 것은 이 자연질서를 이탈한 질서이다. 생명의 영원한 질서가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기 위한 간악한 질서이다. 조직된 폭력배들(정치꾼들)이 환상적 공동체(국가)라는 이름 아래 그들 본위로 만든 족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만든 이 거짓 질서를 버리고 생명의 영원한 회전법칙인 이 자연질서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 기존질서를 버리고 자연질서로 되돌아가려면 기존질서가 부서지니까 처음에는 큰 혼란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서는 언어를 통해서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언어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언어로 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능엄경) 선(禪)에서는 흔히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언어가 필요없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원래 이 불립문자라는 말 앞에는 ‘불리문자(不離文字)’라는 말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불리문자라는 말은 ‘(물론 언어는 필요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진리는 언어를 떠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의 차원에서는 마치 그릇을 버리면 물건을 담을 수 없듯이 언어를 떠나면 진리의 포착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언어를 재도지기(載道之器)라고 했다. 이 말은 ‘언어란 진리를 담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이 그릇 속에 아주 좋은
“전장(戰場)에 나가 백만의 적과 싸워 이기는 그것보다/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승리거니./ 신들도 악마조차도/ 그리고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제 그를 정복할 수는 없다.”(‘법구경’)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긴 이들은 죽음의 차원마저 초월해 버린다. 역사는 결코 이런 이들을 시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평할 수 없다. 가장 위대한 정복자는 누구인가. 징기스칸, 알렉산더, 나폴레옹 등은 확실히 위대한 정복자였다. 그러나 그런 부류의 정복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대한 정복자는 아니다. 그들은 결코 위대한 정복자가 아니라 지배욕에 불타던 미치광이들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미치광이들을 위대한 영웅으로 치켜세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