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동국대는 1906년 명진학교, 1910년 불교사범학교, 1914년 불교고등학교, 1915년 불교중앙학림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922년 강제로 폐교되었다. 1922년 출범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이하 불전)를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40년 다시 혜화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일제의 전시동원령에 따라 4년 만에 다시 강제 폐교를 당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27일 혜화전문학교를 재개교하여 이듬해 1946년 9월20일에는 동국대학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동국대 전신…1
일제의 강제 병탄 후 불교를 관리하기 위하여 총독부에서 조선사찰령을 반포하고, 세속사회의 행정 체계에 따라 전국 사찰을 ‘본-말사’ 체제로 재편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 본사 30곳이 정해졌으며, 1915년 중앙에 ‘삼십본산연합사무소’를 두었다. 이 ‘연합사무소’는 총독부 인가를 받아 설립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총독부가 주도하였을 것이고, 총독부의 지원이 없으면 운영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연합사무소’는 탄생의 성격에 맞게 강대련 등 친일 승려가 주도하고 윤택영·박영효·권중현·한창수·이완용 등 부일협력의 대가로 작위를 받은
1929년 10월11일, 이제는 허물어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조선총독부 안의 큰 홀에서 당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1858~1936)가 입회한 가운데 조선불교대회(이하에서는 ‘불교대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육군·해군대신, 외무·사법·체신차관, 궁내대신 등 일본군과 내각의 주요 인사를 비롯하여 정토진종(淨土眞宗) 대곡사파·본원사파·불광사파 관장(총무원장에 해당) 등 일본 불교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총독이 참석하는 자리이니만큼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조선의 재계와 불교계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것
서울 개운사는 찬란한 전각 등 ‘유형’의 자산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1845년 우기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대원암(大圓庵)에 1926년 석전 한영(1870~1948) 스님이 불교전문강원(이하 ‘강원’)을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면서부터 이루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큰 소임을 맡아온 ‘무형’의 자산이다.1926년 한영 스님 강원 설립청담·서정주·조지훈 등 공부현대에는 대장경 전산화 산실조계종 탄생의 주역 중 한 분이었던 청담 스님이 이 ‘강원’에서 공부했고, 신석정·서정주·이광수·조지훈·김달진 등 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와 국방에 관한 모든 권한을 빼앗긴, 이름 뿐의 ‘제국(帝國)’ 대한제국 마지막 순종황제의 황후 윤씨(시호: 獻儀慈仁純貞孝皇后. 아래에서는 ‘황후’)는 을사늑약과 한일 병탄에서 매국 행위에 앞장 선 ‘공로’(?)로 일본 정부에서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파 윤택영의 딸이다. 한일 병탄 당시 ‘황후’가 옥새(玉璽)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으려 버티며 조약 서명을 막으려 애썼으나 숙부 윤덕영에게 빼앗기고 울음을 터뜨렸던 일화는 유명하다.용성 스님과 각별한 인연불행 이겨내고 불교 귀의매일 좌선·독경하며 생활
“첫째, 불타의 구제자(救濟者)의 중심자로 큰 임무와 굳건한 행실을 가지자. 둘째, 시대에 적응한 교화방법을 만들자. 셋째, 불교 조선의 건립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통일적으로 준비하자. 넷째, 불타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불지(佛旨)를 몸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불교 교육제도의 확립을 기하자.”청담·운허 스님 등이 주도주지직 안 맡은 46명 참여불교발전 위한 다양한 논의위 네 가지 다짐은 청담·운허 스님 등이 주도하여 1928년 3월14~17일 각황사(현 조계사)에서 개최한 ‘조선불교학인대회’에서 채택한 강령이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수
“일본의 식민제국주의는 국제정세 상 가장 범죄적이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졌습니다. 이제 문명과 인류를 타락시키는 이 같은 범죄를 씻어내고 처벌할 때가 되었습니다.”1914년 14세에 은해사로 출가범어사 만세운동·만당 등 주도해방 후 문교부장관 등 역임1927년 2월1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1회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조선을 대표해 참석한 범산(梵山) 김법린의 사자후였다.이 대회에는 범산 이외에 한글학자 이극로, 일제강점기 좌파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 해방 이후 북한의 최고인민회
서울 보성고등학교는 보부상 출신으로 탁지부대신에까지 올랐던 이용익이 1906년 9월 현재 조계사 경내에 세운 사립학교이다. 일제에 항거했던 이용익은 을사늑약 이후 러시아 여러 곳을 떠돌다 1907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때 고종에게 보낸 마지막 글에서 ‘널리 학교를 세우고(廣建學敎), 인재를 교육하며(人材敎育), 국권을 회복해 달라(國權回復)’는 당부를 남길 정도로 ‘민족의 미래가 교육에 달려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의 설립자도 이용익이다.)이용익이 1906년 건립한 사학1924년 불교계가
마치 동학농민혁명군 사령관 전봉준 장군을 서울로 압송하던 철창처럼 생긴 틀 안에 갇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이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구일까.전국 고적 조사 사업의 일환끊임없이 제기되는 졸속 논란이제라도 부처님 참뜻 새겨야지금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중앙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특별 관리를 받고 있으며, 매년 국내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참배(또는 관람)하는 경주 토함산 석굴암(본래 이름은 石佛寺) 본존불이 바로 이 사진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 불교계의 큰 악마·관청과 도제를 속이고 사익만을 도모하는 악마’, 전 용주사 주지 강대련의 이름에 함께 붙는 수식어이다.30년간 본산 주지 지내며 친일국방헌금·친일 법요식 등 자청일제에 “뼛속까지 친일” 읍소젊은 승려들에 ‘명고축출’당해실제로 ‘3·1혁명 운동’ 3년 뒤인 1922년 3월에는 각황사에서 젊은 승려 100여명이 일제에 부역하던 수구파 승려 대표 강대련의 친일 행각을 격렬하게 성토하며, 그에게 북을 치며 종로 거리를 걷게 하는 명고축출(鳴鼓逐出)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건 주모자들은 실형을 선고받기까지 했지
이완용(1858∼1926)은 악명이 아주 높아서, 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가까워오는 오늘까지도 우리 국민 대부분이 그 이름 앞에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 놈’이라는 뜻의 ‘매국노(賣國奴)’와 함께 그를 기억하고 있다.독립협회 임원 지낸 명필가시류 따라 재빠른 변신 거듭불교계 항일활동 저해 시도그릇된 비범함이 ‘매국노’로위 사진은 이완용이 일제가 하사(?)해준 훈장을 여럿 달고 찍은 것이다. 그 이름 앞의 ‘매국노·친일파’라는 수식어를 빼고 보면, 꽤 잘 생긴 얼굴이다. 하긴 그의 생애 자체가 이런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
충청도 괴산 출신의 이능화(1869∼1943)에게는 간정(侃亭)·상현(尙玄)·무능거사(無能居士) 등 호(號)가 여럿 있다. 그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드물게 중국어(漢語)·일어·영어·프랑스어(法語) 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였으며, 관심 분야가 넓고 깊어 불교·기독교·도교·민속학·외교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귀중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려서, ‘위대한 학자’라는 명예로운 칭호 뒤에 조선사편수위원회 참여 경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민족친일행위자’의 딱지가 따라다닌다. 이처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
청호(晴湖, 1875~1934; 입적 연도가 1936년으로 나온 자료도 있으나 ‘봉은사지’에 표기한 대로 따른다.) 스님은 서울 강남 봉은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열두 살에 강원도 양양 명주사로 출가하기 전 속가의 성은 나(羅)씨이고, 출가 뒤 법명은 학밀(學密)이며, 청호는 법호이다.1912년부터 23년간 주지 소임뱃사람 설득해 함께 구조 활동구조된 사람들이 공덕비 세워스님은 스물세 살에 구족계를 받고, 스물네 살(1898년)부터 학승으로 명성이 널리 퍼져서 전국에서 학인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 뒤 10년 동안 오
어릴 때 이름이 헤와위타르네(Hewavi tarne)였던 앙가리카 다르마팔라(Anagārika Dharmapāla, 1864~ 1933)는 조국 스리랑카에서 꺼져가고 있던 불교의 불을 다시 밝혔을 뿐 아니라, 붓다가야를 비롯하여 인도에 있는 부처님 성지들을 복원하고 대각회(Maha Bodhi Society)를 설립해 인도에서 불교 부활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다.8살 때 “청정히 살겠다” 서원인도 붓다가야 등 성지 복원1913년 8월 서울 각황전 방문1933년 입적 앞두고 삭발염의그가 “불교인이 되겠다” 서원하고 계를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기층(基層) 백성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불교와 유교 등 조선의 전통 종교계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특히 전통종교인 불교계를 통제할 목적으로 1911년 6월3일자로 ‘사찰령’을 공포하고, 이어서 7월8일자로 ‘사찰령시행규칙’을 발표하였다.사찰령 입안·실행해 불교 통제해방 때까지 불교계 옥죈 족쇄논문발표 등 학자 면모도 보여이 사찰령과 시행규칙은 해방에 이르기까지 조선 불교를 꼼짝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되었고, 사찰령에서 시작된 ‘30본산 제도’와 ‘주지 임명 등에 대한 관(官)의 허가’ 등 악성(惡性) 조
위 사진은 1929년 감옥(또는 경찰서)에서 촬영된 만해 용운(萬海龍雲) 스님(이하 존칭 생략)의 정면과 옆면 모습이다. 머리와 수염을 제대로 깎지도 못하고 얼굴은 초췌하지만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열반에 이르기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던’ 혁명가의 기운이 강하게 풍긴다.불교계 일신하려던 개혁가폐단 과감히 고칠 것 제시승속 함께하는 참선 강조 불자가 아니라도 웬만한 상식을 가진 우리 국민이라면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만해의 이름은 알 것이다. 그러나 ‘불교 개혁가와 학승 만해’의 이미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 관한 연구
우리 국민 대다수가 중·고등학생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추억을 갖고 있다. 그래서 천 몇백 년 전 신라인들이 남긴 찬란한 불교문화 유적에 가졌던 감격을 잊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다시 찾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학생시절의 형식적인 수학여행에 질려서 아예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경주를 꼽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어쨌든 경주는 근대화 물결 속에 빠른 속도로 바뀐 우리나라에서 옛 모습을 그래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고, 그 덕분에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경주 사랑에 빠져드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천년 고도(古都) 경주가 이
일제강점 초기에 용주사 주지 강대련·위봉사 주지 곽법경과 더불어 ‘친일승려 대표’의 오명(汚名)을 가진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의 생애는 그가 살았던 시대만큼이나 굴곡이 심했다.처음엔 조선불교 유망주 기대원종 창설하며 친일행보 본격한국불교 일본 예속화에 앞장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19살에 출가하여 건봉사에서 보운 스님의 법통을 이었던 그는 ‘동사열전’에서 “조선의 마지막 대강백”이라 평가받으며 ‘침체한 조선 불교를 중흥할’ 유망주로 기대되던 승려였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의 모습을 간직한 위 사진에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위 사진은 1909년 구례 화엄사 등 여러 사찰들이 함께 설립한 신명학교의 학생들이 1910년에 화엄사를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 남학생은 거의 모두 한복 차림에 서양식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특이하지만, 앞줄 양쪽 끝에 보이는 세 여학생의 모습에서는 굳센 의지와 당당함이 느껴진다.을사늑약 후 잇따라 학교 세워근대교육 통한 인재 양성 의도독립운동가·작가 등 다수 배출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 사찰들의 학교 설립이 이어졌다. 신명학교에 앞서, 1906년에는 서울 원흥사 명진학교·해인사 명립학교·범어사 명정학교·건봉사 봉명학교·용
1903년 5월4일(음 4월8일), 금강산 유점사 능인보전(能仁寶殿) 앞에서 열린 봉축 법요식 장면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촬영자가 알려지지 않은 사진이다. 맨 앞줄 가운데에 주장자를 짚고 있는 스님은 사중의 최고 어른인 조실이나 회주스님으로 다른 비구·비구니들과 동자승들이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아마 ‘부처님 탄생의 의미’나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을 주제로 봉축 법문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뒤쪽에 이 스님과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 분도 법회에 동참한 다른 스님들보다 법랍이나 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