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밤 11시 54분께 입적한 일학당 진연 스님의 영결식 및 다비식이 4월 11일 오전 10시 천안 성불사(주지 원경 스님)에서 엄수된다. 진연 스님은 올해로 세랍 63세, 법랍 40세로 1977년 범어사에서 마곡사 일현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천안 성불사를 비롯한 부여 고란사 등 제6교구본사 마곡사 관할의 주요 사찰 주지를 역임하면서 충청 지역 포교에 진력해 왔다. 041)565-4567
성공한 분의 삶에는 늘 전진만 있어고집스런 어리석음 있어야 전진 가능모든 사물의 존재는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자의도 아닌 타의에 의하여 던져지는 것은 아닐까. 사람의 태어남도 어머니의 태중 10개월의 고생이 있어 어느 순간에 허허 공간에 던져 진 것이니, 어머니의 처지에서야 날짜도 예측도 하고 병원이든 침실이든 어느 공간을 먼저 정해 놓았을 수 있지만, 태어나는 장본인으로서야 예정이나 기약이 있을 수 없지 않는가.그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장소와 정해진 시간의 톱니바퀴에 얽혀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태중의 10개월이라는 과거는 알 수 없을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않을 것이다. 곧 앞으로의 전진이지 과거의 회고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누구나 앞만 보고 가라 한다. 이런 시간의
가사 옷에 경배하는건 범인의 몫가사 옷 안의 내용은 스님들의 몫모든 사물 존재는 마주봄의 양면적 대립 구조에서 이루어지 것 같다. 마치 손바닥과 손등이 있어 손이라는 하나의 기능적 작용을 이루는 것과 같다. 하지만, 손바닥을 뒤짚든 되엎든 이 때 손바닥이라는 말의 표현에 가려진 손등의 기능 또한 매우 중요하다. 뒤집든 되엎든 손바닥 못지않게 손등의 역할도 중요하다. 움켜쥘 때는 손등의 탄력이 힘을 실어 주고, 손바닥에 사물을 올려놓을 때는 손등의 표면 장력이 받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손의 기능을 손바닥의 장력만을 의식하지 손등의 탄력은 의식하지 않는다.이렇듯 사람살이의 일상도 삶의 형식은 삶의 내용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형식이란 내용의 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내용만을
인간의 삶은 얻으려는 욕심에서 출발 사욕 막되, 하고자하는 의욕은 살려야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욕심에서 출발되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 황망한 인간세상의 바다로 떨어지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어미의 젖을 찾는 것부터가 무엇인가를 얻어야 산다는 잠재적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이 얻는다는 마음, 이를 일러 욕심이라 할 터인데, 사람살이의 어울림의 질서에는 이 욕심을 항시 경계의 대상으로 지목하여 이를 억제하려는 것이 교육의 큰 틀인 것처럼 설정하고 있으니, 이 또한 사람살이의 모순이다.동양 교육의 성인으로 불려야할 맹자의 교육적 기본틀이 바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음이라” 하는데, 이 인욕의 욕심을 없애면 사람이 살아갈 욕망이 있을 것인지 되묻게 된다. 물론 이 인욕이란 부정
시간에 얽힌 희비는 처지의 다름서 기인삶의 굴곡 수행하면 수평으로 전환 가능삶이란 말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 살아간다는 의식이 있건 없건 삶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것이 시간인 것 같다. 시간은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에 시간을 정하든 안 정하든 일정한 시간은 가고 있으며, 이 시간의 거리는 어느 누구에게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양대 요소의 결합으로 결정되어 질 터인데, 장소는 사람마다 천차먼별이어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조종될 수도 있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하루를 12시간이라 하든 24시간이라 하든 하루라는 길이는 공간적 처소의 어디에서나 다를 수가 없다. 임금님의 하루는 길고 서민의 하루는 짧은 것도 아니다.하
“불광불급(不狂不及·미치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일에 미쳤었다. 눈앞에 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황우석 박사가 1월 12일 오전 기자회견장에서. 자신과 연구원들의 학문적 열정을 믿어달라고 했건만 일부 언론들은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자리일지도 모를 기자 회견장에 “언론플레이를 위해 제자들까지 끌어 들였다”며 성토했다. 황 박사는 지금 숨도 쉬지 말아야 한다.
보석은 진정 보석이었는데원석으로서 보석 틀림없기를…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지만, 있는 그대로를 한 번쯤 되돌아 살펴 보면 신비하기 그지 없다. 이런 신비함 속에 어울려 사는 우리 인간도 이 신비함에 휩싸여 스스로를 존엄하게 여기고, 아울러 모든 존재의 사물에도 외경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존엄과 외경심으로 자연의 신비에 귀의함이 종교적 신앙의 모태가 되는 것은 아닐까.그러나 사람들은 이 자연의 신비스러움을 외경의 대상으로 놓아 두려 하지 않고 그 원초적 구조를 알아 보려는 호기심에서 나름대로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어쩌면 인류사회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의 산물은 모두 자연 사물을 분석하고 종합하는 과정의 이야기들을 수록한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그 기록들이 우리의 자연에 오히려 역효
농담도 수용 못하는 ‘답답한’ 고도 지식 사회격식 넘어선 치열한 공안이 숨통 트여주는 듯사물 존재에는 항시 양면성이 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어 낮이 더 밝고, 밤이 있으면 낮이 있어 더 어둡다. 사람살이에도 긍정적인 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악도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악이 있어 선의 가치를 더 돕는다면 이를 어쩔 수 없이 필요악이라 할 수도 있다.우리의 삶은 결정지어진 미래가 보장되지 않기에 항시 긴장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긴장을 잠시나마 풀어보려고 일하는 사이마다 휴식의 짬을 갖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술은 사람의 본성을 해치는 약(伐性之藥벌성지약)이라 하여 되도록 경계하고 있지만 술만큼 사랑을 받는 음식도 없을 것이다. 이는 삶의 틈틈에 긴장을 완회시키는 효과와 상승작용을 하기 때문
‘물 흐르 듯 순리 따르도록 이끄는게 법‘악법도 법 ’이라는 독설 불교에는 없어사람살이에는 서로 어울림의 동아리가 형성되고 형성된 동아리에는 자연스럽게 질서가 생긴다. 질서란 사람살이의 자연스러운 서열화이다. 서열이란 순서이니 앞뒤의 순서가 정연하다는 말이다. 이 자연스러운 서열을 조문으로 명문화 하면 법이 된다. 쉽게 생각하여 물이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레 방향을 잡아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法)이라는 글자가 물(?=水)과 가다(去)로 합성된 회의문자인 것이다. 물이 흘러가듯 순리적으로 사회를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순리적으로 흐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회구성원의 하나하나가 양보해야 한다. 서로 먼저 가겠다고 다투면 그 물은 막혀서 흐르지 못한다.예(禮)를 정의할 때 사양(辭讓)이라 한다.
“장삼에 국민 한 명 한 명 품어 안는 화합 보이길”“틀에 얽매인 선거로 행정수반 선출함은 아쉬워사람살이에는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갈래의 길이 항시 열려 있어, 이 두 갈래의 길이 적정한 발걸음의 폭을 유지해야 균형을 잡을 수가 있다. 이럴 때 정신적 길을 열어 주는 몫을 할 수 있는 것이 종교이고, 육체적 삶의 길을 열어 주는 몫을 하는 것이 정치일 것 같다. 우리의 역사에서 이 두 갈래의 길이 균형 잡혀 비교적 한때의 사회적 안정을 누렸던 시기는 고려시대였다. 이런 시각에서 필자에게 주목되는 것은 성종이 즉위하자 시대적 급무를 28 조의 시무책(時務策)으로 올린 최승로(崔承老)의 상소문이다.그는 시무책의 한 갈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3교는 각각의 원업이 있으니 이를 혼합하여 하나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타고 난 신체의 한계는 누구나 비슷터 닦듯 잘 다스려야 지혜도 넓어져모든 사물에는 질과 양이 있어 그 사물을 규정하려면 이 질과 양을 겸해서 따져 보아야 그 사물을 이해할 수가 있다. 쇠는 무겁고 솜은 가볍다 함이 일반적 인식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솜이 무겁고 쇠가 가벼울 수도 있다. 쇠 1 근과 솜 10근 가운데 어느 것이 무거우냐 하면 쇠가 무겁다 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물건의 정확한 무게 단위를 정하려면 비중을 알아야 한다. 일정한 부피를 정해 놓고 그 무게를 견주어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정한 양을 정해 놓고 무게의 질을 따지는 것이다.아울러 사물은 그 주변의 여건에 따라 이 질과 양이 변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연이란 말도 연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꾀가 많은 망아지가 소금을
삶의 공간은 변함 없는데 사람이 이를 구분시간·날짜로 가능하며 ‘오느니…가느니’시간은 흐른다 한다. 시간이 어디 있는 것인가. 시간이 있는 곳을 나는 모르겠다. 좁고 어리석은 소견으로 시간의 존재를 인식하기에는 인식할 만한 대상이 없다. 무엇이 시간인가. 도대체 시간은 둥근가 네모진가. 그 형체를 무어라 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서도 시간이 갔다든가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든가 하며 보이지도 않는 형체에 어떤 변화의 흔적을 느끼고 있으니, 생각해 보면 어이 없는 일이다.흔히 인생은 무상하다든가 허무하다든가 하여 아쉬워하는 표정이 많은데, 이는 모두 보이지도 않는 시간의 수레에 올라 앉아 주변 사물의 흐름을 보고 시간의 흐름이라 착가하는 것은 아닐까. 수레에 앉아 주변 사물을 보면 끊임 없이 뒤로 흘러 변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