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기준 하면 ‘죽어간다’는 표현이 맞는 말삶-죽음 집착 놓으면 시간은 그저 가고 있을 뿐시간의 변화는 눈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가고 있다거나 흐르고 있다고 한다. 사람살이는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고 달라져 가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득불 시간의 단위를 정해 놓고 그 단위에 따라 변화의 값을 재고 있다. 한 사람의 삶에 이 시간 단위를 크게 갈라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生老病死) 한다. 이를 한 단위로 축약하여는 ‘평생’이라 하니, 평생이란 수평적인 삶의 외줄이다. 흐르는 시간에 기대어 가는대로 가는 것이다. 태어남의 삶(生)에다 출발점을 놓고 죽음을 종점으로 가정한 흘러감이다. 이를 우리는 살아간다는 말로 시간의 연속을 대신하고 있다.삶과 죽음의 외줄 시간에 기준
인연화합 있어야 실체 발현상극도 상생하는 것이 자연송나라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만약 거문고 안에 거문고 소리가 있다면, 갑 속에 있을 때는 왜 소리가 없으며, 만약 소리가 손가락 끝에 있다면, 어찌하여 그대의 손 끝에선 들리지 않나.(若言琴上有琴聲 放在匣中何不鳴 若言聲在指頭上 何不於君指上聽) 하였다. 이 시야말로 모든 만유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이면서도 쓰임의 작용은 서로의 인연에서 이루어진다는 실증을 여실하게 말한 것이다. 거문고는 소리의 인자는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울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손가락이라는 부딪침의 연고로 그 능력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어 만인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우리는 일상적 인습이나 관습으로 거문고에서 소리가 난다 하는데 그렇
우물 파기도 돌려 생각하면 허공 메우기선가의 언어 부정은 편협에 대한 경계삼라만상의 존재란 있는 그대로의 것이기에 더함이나 덜함이 없다. 마치 고무 풍선의 이 쪽이 줄면 저 쪽이 느는 것과 같다. 그러고 보면 비었다라는 의미의 허공은 없는 것이다. 비어 있음으로 보이는 공간은 기실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어 줄어들지 않고 비어 있는 공간으로 보이는 것이지, 참으로 비어 있다면 빈 곳만큼 쭈그러져 있어 빈 공간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허공이란 무엇인가로 충만된 공간을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허공이 크면 클수록 더더욱 채워진 충만은 큰 셈이다.대지를 뒤덮고 있는 빈 공간을 우리는 허공이라 하고 이 허공을 비어 있음의 극한으로 말하나, 기실은 이 허공은 공기로 꽉 차 있는 채워짐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울림이 중도기준만 묵수하면 ‘고집’으로 변질모든 사물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가 진실인 것이다. 불가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성의 청정한 마음이나 불성이나 법신을 진여라 함도 결국 이 존재의 상도를 이름이다. “진은 진실의 뜻이고 여는 상도와 같은 여상(如常)의 뜻”이라 함이 바로 이 있는 존재의 실상 그대로임이 아닌가. 곧 사물 본성의 존재 그대로라는 의미이다.검은 것은 검은 것이 진실이고 흰 것은 흰 것이 진실이다. 검은 것은 희어질 수 없는 것이요 흰 것은 검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아울러 검거나 희거나한 상대가 있어 서로의 흑백은 존재하는 것이다. 요즘 계층간의 갈등으로 평행선을 긋고 있는 논리적 싸움을 흔히 ‘흑백논리’의 마주섬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극히
사물 이름엔 존재의 이유 담겨 있어이름이 바로서야 바른 행위도 가능우주 공간에 무한으로 존재하는 물체에는 각기 그 이름이 있다. 만약 이름이 없다면 그 물체의 실상을 나타낼 수가 없다. 그러기에 “하늘은 이름 없는 물건을 생산하는 일이 없고, 사람은 제 먹이를 타고 나지 않은 이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고 보면 사물 존재는 그 자체가 이름인 셈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름과 사물은 매우 중요한 상관성을 유지한다. 사물이 있는 그 자체가 존재이기는 하지만, 이름이 뒤따르지 않으면 존재의 의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람살이의 질서를 중히 여기는 유가에서 ‘이름을 바르게 해야한다(正名)’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바로 이름이 바로 서지 않고서는 행위가 바르게 이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선
너 있어야 나 있음이 모순의 존재순리역리를 순리로 되돌려야 지혜로운 삶삶의 존재란 놓여진 실상 그 자체이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가 바로 지금의 삶의 실상이고, 이 실상의 존재는 항시 마주봄의 대칭에서 이루어진다. 존재의 1인칭인 나는 반드시 2인칭인 너가 있어 존재한다. 그러면서 이 관계는 각각 서로 마주 보아야지 앞뒤의 순서대로 서면 질서정연한 듯하지만 실은 각기 상관성을 잃은 개체들이지 공동의 존재는 못 된다. 이 공동의 존재인 마주 봄은 각각의 개체로서는 서로 부딪히는 거슬림의 역리이다. 순리가 되려면 앞과 뒤로 나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살이의 존재는 순리로 출발된 것이 아니라 애당초 역리로 출발된 것이다. 이러한 역리적 논리를 ‘모순(矛盾)’이라 하지만, 기실은 역리가 아닌 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