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어떻게 쓰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뀝니다.” 이 주장이 담긴 대승불교의 유식론은 놀랄만큼 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물리학 중에서도 양자물리학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상호 연결이 되어 있기에 불교에서는 “번뇌 즉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번뇌가 어떻게 보리일까요? 고통이 있을 때 그 고통은 행복으로 바뀝니다. 가장 큰 고통이, 불안이 가장 큰 행복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연적 순환 과정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고통의 상처가 깊을수록 감정의 농도도
우리는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중생이 부처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때부터 중생이 부처님을 공부해 나가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줄여서 발보리심이라고 하고 더 줄여서 발심이라고 합니다. 발심은 곧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최상의 깨달음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음력 3월이 되면 전국의 도량에서 보살계를 설합니다. 금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의 보살계 수계법회가 연기되거나 취소되었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는 봄기운이 만연합니다. 따뜻한 희망의 봄기운이 오대산 곳곳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어렵고 힘든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지내야 하겠습니까. 이 사바세계는 항상 고락이 함께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쉼 없이 느끼지만, 어떤 것이 잘 성취되다가도 어떤 때는 장애가 따르기도 합니다. 호사다마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도리어 화로 변할 때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은 시샘의 마가 늘 찾아오기 마련입니
음력 3월 초하루입니다. 이렇게 온라인으로 같이 법회를 보고 기도를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오늘은 기도를 오래 했으니 간단하게 ‘기도하는 이유’를 주제로 법문을 하겠습니다.우리가 부처님 전에 기도를 올리는 것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사마타(奢摩他, Samatha)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많은 마음을, 밖으로 쏠려가는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서 자신을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우리 삶에 좋은 효과로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는 ‘영험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삶에 어떤 효과를 주는가 생각해보아야 합니
음력 보름이면 늘 봉행하는 법회입니다만, 코로나19 때문에 각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동참하고 계신 불자님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법회에 참석하지 못해도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마음은 하나라고 봅니다. 어서 빨리 이 모진 질병이 사라지기를 부처님께 기원하면서 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질병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겪어온 재앙입니다. 인류 역사는 세 가지 고통과 함께 흘러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질병입니다. 중세에도 흑사병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때는 병의 원인을 모르고 ‘인간이 죄를 많이 지으면 죽는다’고 생각해
요즘 한국의 상황이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저도 법문과 강의를 하는 정기법회를 모두 다 중단했습니다. 염화실, 문수선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찰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코로나19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침묵하고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공부하고 기도하며 빨리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소참법문(小參法門)’이라는 주제로 온라인 법회를 하나 개설했습니다. 소참법문은 모이는 대중이 없을 때도 할 수 있고, 한 사람
오늘은 음력 2월 초하루 법회일입니다. 문명의 발전 덕분에 실시간 유튜브 방송이라는 색다른 방식으로 법회를 한다는 것은 발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것이 우리의 자의적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적 재난인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방지를 위해서 진행된다고 하는 것은 큰 아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법문을 하기 위해 이 법좌에 올랐습니다만 사실 굉장히 어색합니다. 그 어색함을 딛고 오늘 몇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절이라고 해서 부처님이 계시고, 가
나이 칠순을 맞이하여 선방에서 더 정진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문경 봉암사를 시작으로 해남 대흥사, 백담사 무문관, 내연산 보경사, 오대산 상원사에서 정진하다 보니 어느덧 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선방에서 40·50대 스님들과 나란히 앉아 한 치의 틈도 없이 짜여 있는 일과 속에서 지내니 힘이 들기도 했지만 규칙적인 생활은 수행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번 안거 때 제가 간략하게나마 쓴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하얀 눈을 밟아본다. 눈은 소리도 없이 나를 맞이한다. 눈이 내리면 무작정 좋아서 온 동네를 뛰어다니던 어린 시
오늘은 명상법회를 하는 날입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지금 여기, 지금 눈앞에 있는 이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들, 여기서 경험되는 모든 것들, 내가 삶이라고 여기는 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 일어나도록 완전히 허용해주는 것입니다. 해석,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허용해주는 것이지요.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어떤 대상이 앞에 오더라도, 좋은 대상이 오든 나쁜 대상이 오든, 좋은 사람이 오든 나쁜 사람이 오든 전혀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출 뿐입니다. 그래서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는 “있는 그대로 보라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여의시어 온갖 공양과 예경 받으실만한 분이자, 사성제 진리를 비롯한 모든 법을 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으신 존귀하신 부처님께 절합니다.”이 예경문은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예경문은 길이는 짧지만,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예경을 했던 내용으로 그 속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표현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확실하게 새기면서 예경을 올리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아무에게나 부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예경문에서는 “모
‘화엄경’의 ‘아승지품(阿僧祗品)’은 굉장히 길이가 짧습니다. 숫자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승지에서 ‘아’는 없다는 부정사입니다. ‘승지’는 한문으로 번역하면 수(數)입니다. 아승지는 곧 무수(無數)라는 뜻입니다. 무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숫자가 없는 것 또는 아주 많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승지는 ‘무수히 많아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화엄경’에서 부처님은 단 두 품을 말씀하셨고, 나머지는 보살님이 부처님을 대신해 설하십니다. ‘아승지품’과 ‘여래수호광명공덕품(如來隨好光明功德品)’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내용입
오늘 법회에 오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30년 전 부산 국제시장에 갔을 때 콩나물 파는 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30년 후에도 그분은 그 자리에 똑같이 앉아서 콩나물을 팔고 계셨습니다. 30년 동안 그분이 들고 다녔던 그 콩나물 바구니 안에는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이 담겨 있을까. 저기에는 아들을 낳고 며느리를 보고 손주를 키웠던 그분의 말할 수 없는 행복과 애환이 모두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저 자신을 돌아볼 때, 나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으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