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중생이 부처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때부터 중생이 부처님을 공부해 나가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줄여서 발보리심이라고 하고 더 줄여서 발심이라고 합니다. 발심은 곧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최상의 깨달음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음력 3월이 되면 전국의 도량에서 보살계를 설합니다. 금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의 보살계 수계법회가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보살계를 설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살계를 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과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삶의 지침을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참선, 간경, 염불, 진언 무엇을 하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야 올바로 할 수 있습니다. 사찰의 살림을 살고 불사를 하는 스님들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반드시 일으켜야 합니다. 재가불자 또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되어야 진정으로 대승의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일체중생, 특히 지옥, 아귀, 축생 세계에 있는 중생까지도 다 제도하고 나서야 자신도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웁니다. 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남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 그리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는 것, 이것이 자비를 갖추는 것이고 자비를 실현하기 위하여 반야지혜를 갖추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승은 참 무섭고 어렵습니다.
대승 경전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 바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입니다. ‘금강경’에도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이 발아뇩아라삼먁삼보리심입니다.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보살계를 받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보살계 심지법문’이라고 하는 내용 중 송나라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선사의 ‘수보살계법(授菩薩戒法)’ 법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살계란 모든 성인을 세우는 바탕이며 모든 선행을 생성하게 하는 터전이다. 그리하여 감로의 문을 열어서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는 길이다. ‘범망경’에서 말씀하셨다. 중생들이 부처님의 계를 받으면 바로 모든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간다. 부처님의 계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중생의 마음이요 그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느니라. 자기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님이라 하고, 규범대로 지니면 법이라고 하며, 심성이 화합하여 하나가 됨을 승가라고 한다. 심성이 원만하고 청정하므로 계라고 이름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관조하므로 반야라고 이름한다. 마음은 본래 고요하고 적멸하므로 열반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이 여래의 최상승 가르침이며 조사께서 전해오신 뜻이니라.”
보살계가 바로 모든 성인을 출생시키는 바탕이고 터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글귀를 읽을 때마다 정말 환희심이 나곤 합니다. 이것은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이 받는 계가 그만큼 위대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성인이 보살계로부터 나온 것이고 모든 선법이 보살계로부터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선법을 행한다면 우리는 보살이 될 수 있고 성인, 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부처님의 계를 받으면 바로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계는 무엇일까요? 부처님의 계는 다만 중생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생심으로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역사 속 위대한 인물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으로 탄생하신 분은 없습니다. 날 때부터 부처님은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 중생이지만, 중생이 부처의 씨앗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갖고, 그 씨앗의 싹을 틔워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완벽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마음을 깨달아서 부처님이 되셨고, 모든 조사도 마음을 깨달아서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마음을 움직여서 역사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내셨고, 마음을 움직여서 일체중생을 제도하셨습니다. 이 중생심 외에 다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佛)라고 하고, 부처님의 법규대로 살아가면 그것을 법(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서로 화합해서 하나가 되면 승가(僧)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만 생각합니다. 생각과 행동조차 어긋납니다. 반면 성인은 말과 생각과 행동이 한 결 같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마음 성품이 원만하고 청정하므로 계(戒)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계의 생명은 청정입니다. 율(律)의 생명은 화합입니다. 고요하면서도 항상 모든 것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비추어보기 때문에 그것을 반야라고 했으며, 마음이 고요해서 어떤 번뇌도 일어남이 없기에 그 자리를 열반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행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믿는 마음을 낸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장애가 들어와서 그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박복하고 온갖 번뇌가 치성하기 때문이라고 영명연수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처음 절에 들어왔을 때 어른 스님들께서 말씀하시면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졸면서 깨면서 법문을 들었었습니다. 경전을 공부하고 율장을 공부하고 삼장을 연마하고 끊임없이 세상의 이치를 관하고 셀 수 없이 절을 하다 보니까 ‘아, 이제야 이 말씀에 믿음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사무쳤습니다.
그냥 우연히 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수행했을 때 조금씩이나마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보살, 선지식, 지혜로운 분, 현명한 분들은 하나같이 욕심과 욕망과 아집을 버리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들은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죽도록 노력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산꼭대기에도 올라가고 바다 밑에도 들어갑니다.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속이고 권모술수를 부립니다. 이것이 모두 죄의 근원이 됩니다. 이 썩어질 몸뚱이를 잠깐 먹여 살리려고 못 먹는 것이 없습니다. 모기 눈알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곰의 쓸개를 뽑아서 먹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잔악한 일들은 모두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모든 고통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이러한 잔악한 행위에 있습니다.
보살계를 받고, 채식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욕심을 줄이고 만족하면서 살아간다면, 많은 것을 구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경전도 읽고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애는 너무나 많고 복덕은 너무나 가볍습니다. 업장은 너무나 두텁고 죄악은 너무나 무겁습니다. 좋은 마음을 잠깐 내었다고 하더라도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하지만, 법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 삶이 가벼워집니다. 법을 가까이하면서 세상을 보면 좋고 아름답고 그저 모든 사람이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오더라도 진정으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을 조금만 떠도 부처님의 안경을 빌려서 잠시 세상을 보더라도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풍요롭고 여유로운 세상이 됩니다.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이 법을 안다해도 여러 가지 장애를 겪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장애를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으로 여길 뿐 그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가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니, 죽음이 지금 오더라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육신은 죽지만 정신은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실한 마음만 일으킨다면, 계를 받는 이와 듣는 이가 모두 다 계법의 무한한 이익, 계법의 다함없는 공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정말 세상에는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백천 가지 일을 다 해서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고 그림자 같은 것이고 메아리 같은 것입니다. 오로지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고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은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 의해 보살계를 받고 보살계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두려움의 세계, 고통의 세계를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여겨집니다.
모든 부처님이 함께 말씀하셨고, 모든 조사 스님들이 함께 말씀하셨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다 부처님으로 받들어 모시고 존중해주십시오. 그러면 스스로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없고 불행하고 싶어도 불행한 세계에 갈 수 없습니다.
대중이 모여 법회를 볼 수 있는 날이 언제 올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절에 오시든지 오시지 않든지 항상 언제 어디에서나 발보리심의 기도를 지속해 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3월24일 조계총림 송광사 부산분원 관음사에서 봉행된 ‘음력 3월 초하루 법회’에서 조계총림 율주이자 관음사 회주인 지현 스님이 경내 법당과 온라인 유튜브 ‘늘기쁜마을관음사’를 통해 ‘발보리심에 대하여’를 주제로 법문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33호 / 2020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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