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보살로부터 법을 부촉 받았음에도 신라 왕족의 일원으로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자장 스님. 어느날 그 앞에 나타나 황룡사 호법룡이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밝힌 신인은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왕업이 길이 편안해질 것이며,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은 이렇듯 자장 스님의 신이로운 경험에서 시작됐다.신라의 화려한 불교문화 총체황룡사지서 옛 모습 그려보고분황사선 원효 화쟁사상 새겨불굴사지의 석조사면불상과이차돈 유물 출토
분황사는 수학여행의 상징이다. 불국사, 석굴암과 더불어 수학여행지로 널리 알려져 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공간이다. 오히려 접근성에 있어서는 불국사, 석굴암보다 뛰어나지만 실은 그만한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들처럼 다양한 볼거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 신라인들에게 있어 분황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남쪽으로 길 건너 바로 있는 황룡사와 함께 과거불의 일곱 설법처 중의 하나로서 막중한 것이었다.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세운모전탑은 신라 최초 석탑 추정현재 3층만 남아 있을 뿐이
우리역사 최초 여왕인 신라 27대 선덕여왕을 기리는 문화다례제가 봉행됐다.선덕여왕 숭모회(회장 권대자)는 4월15일 대구 2·28기념공원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제30회 선덕여왕 숭모 문화다례제’를 개최하고 거리 퍼레이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를 진행했다. 행사는 숭모사, 축사, 격려사, 헌다와 헌화, 궁중음악 공양 등 순서로 제례의식이 이어졌다. 특히 황룡사 호국의탑 세우기 퍼포먼스로 황룡사 9층 석탑과 분황사, 기림사 등 많은 사찰을 창건했던 선덕여왕의 호국불교정신을 되새겼다. 본 행사를 전후해 오페라 합창과 북춤, 난타, 어린
한국불교의 새로운 신행문화를 선도하는 법보신문이 삼국유사 성지순례단(단장 심정섭)을 출범한다.법보신문은 오는 4월30일 경주 순례를 시작으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7시 서울 조계사 앞에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한국불교사의 현장을 찾아 떠난다.‘삼국유사’는 고려시대 국존(國尊)으로 추대된 일연 스님의 역작으로 ‘삼국사기’와 더불어 한국 고대사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역사서다. 특히 ‘삼국유사’는 일반 역사서인 동시에 불교 역사를 비롯해 고승 및 재가불자, 문화재, 신행형태, 영험 등 불교문화 전반이 상세히 기록돼 있어 불자들
차라리 숙명이었다.그는 1943년에 태어났다. 사람들은 옹기골 혹은 기왓골이라고 했다. 신라시대 때부터 그랬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는 그릇 가마터와 옹기점이 있던 마을이었다. 그래서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전성기 서라벌에는 17만8936만호 기와집서 숯불을 피워 밥을 해먹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서라벌 도성에는 기와집이 겹겹이 펼쳐져 비가 와도 어깨가 젖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고도 한다.문화재수리기능보유는 670호제작와공 분야에선 국내 1호경주 기왓골서 태어나고 자라어깨너머 배움서 17세 때 입문노당기와 설립
대학원 다닐 때였다. 도서관에서 일본미술전집을 뒤적거리는데 독특한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이런 작품이 있다니. 놀라웠다. 인물상의 주인공은 스님이었다. 당시에 제작된 대부분의 초상조각이 좌상(坐像)인 데 반해 그 인물상은 입상(立像)이었다. 짚신을 신은 스님은 배꼽까지 늘어뜨린 징을 목에 걸고 오른손에는 징을 칠 방망이를, 왼손에는 사슴뿔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입이었다. 스님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채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입 앞에 6명의 작은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게 뭘까. 스님이 입김을 불
‘삼국유사-탑상편’에 나타난 신라시대 왕경 사찰 관련 기록을 통해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학술회의가 열린다.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는 12월3일 오후 1시 경주 현대호텔 다이아몬드홀에서 ‘신라왕경의 사찰2’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경주시와 신라문화선양회가 주최한 가운데 제43회 신라문화제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첫 발제는 차윤정 불국사박물관 연구원이 ‘탑상’편에 수록된 ‘황룡사장륙, 영묘사장륙’조를 주제로 발표한다. 이어 남동신 서울대 교수가 ‘전후소장사리’조를, 한정호 동국대 교수가 ‘생의사석미륵’조를,
불교문화재연구소·문화재청10월20일 발굴 현장 공개당시 높은 위세 거듭 확인통일신라시대 유력사찰로 추정되는 삼척 흥전리사지 내 금당지 일대에서 드문 형태의 금동 장식판과 귀면와 등이 발견돼 당시 사찰의 높은 위세가 거듭 확인됐다.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정안 스님)는 10월20일 삼척 흥전리사지 발굴현장을 일반에 공개하고 정밀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밝혔다. 흥전리사지는 지난 2014년 1차 조사에서 금당지와 탑지 등 여러 동의 건물지가 발견된데 이어, 신라시대 불교계 최고의 승려를 지칭하는 ‘국통(國統)’이라는
단풍 흐드러진 가을 산사를 찾아 떠나는 사찰순례는 가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다. 무르익은 가을 속 호젓하게 자리한 산사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전하는 힐링 장소이기도 하다. 가을 산사를 향한 이같은 기대감과 더불어, 그곳에 당도하기까지 어떤 교통편을 택하는지에 따라서도 여행의 맛이 달라진다. 올 가을엔 기차를 타고 특별한 순례 여정에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무엇보다 올해에는 KTX호남선이 개통하고 포항역이 문을 열면서 순례객들의 선택범위도 대폭 확대됐다.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된 백제역사지구도 2시간만에공주·부여서
한국의 불탑 역사에서 석탑, 목탑과 함께 전탑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탑은 전(塼), 즉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는데, 비슷한 것으로 모전석탑이라는 것도 있다. ‘모전(模塼)’이란 ‘전’을 모방한다는 뜻이므로, 돌을 마치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은 탑을 말한다. 재료 및 블록을 만드는 방법은 다르지만, 축조의 결과물인 탑은 모습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 기원이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비교도 자주 된다. 특히 현존하는 신라의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분황사탑이 바로 모전석탑이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분황사탑 이후 나타난 신
한기리에 사는 여인 희명의 아이가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벽에 그린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아이에게 노래를 지어 빌게 하였더니 마침내 눈을 떴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일연, 세상에 희망 주기 위해인각사에서 ‘삼국유사’ 편찬현장답사·자료수집으로 완성한국 문화유산의 보고로 칭송단종 유배지 그린 ‘청령포도’슬픈 이야기 생생히 깃들어이야기만 들은 후 그렸다면결코 현장감 표현 못했을 것“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어 사뢰옵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한국연구재단 5년간 10억 지원박태원 울산대 교수가 연구책임불교학·국문학자 등 12명 참여‘종합해제’로 정확·가독성 제고차세대 원효 연구자들도 양성 고전 번역의 성패와 질을 결정짓는 핵심 조건인 ‘정확성’과 ‘가독성’을 최대한 살린 신개념의 원효전집 번역이 추진된다.박태원(60) 울산대 철학과 교수가 한국연구재단의 토대연구지원사업 분야에 신청한 ‘원효전집 번역과 종합해제’가 최근 선정됨에 따라 매년 2억원씩 5년간 총 10억원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원효전집 번역과 종합해제’는 원효의 모든 저서에 대한 문헌학적·개념사적·연구사적
‘아, 원효대사는 동방의 성인인데 비석하나가 없다니….’의천, 퇴락한 분황사 찾은 뒤원효대사 업적 선양에 주력왕에게 시호 내려줄 것 건의‘대성화쟁국사’ 추봉에 일조원효대사의 흔적을 찾아 분황사를 찾은 의천(義天,1055~1101)은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퇴락한 분황사에는 무성한 풀만 자라고 있었다. 의천은 대웅전에 들어가 제수를 갖추고 제문을 읽었다. 제문을 읽는 의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 의천을 진흙으로 빚은 원효대사의 소상(塑像)이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그를
컬러링북이 큰 인기다. ‘안티(anti) 스트레스’를 표방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최근에는 한층 다양한 문양과 형태로 발전,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밑그림에 자유롭게 채색하는 방식으로 나만의 작품을 만들 수 있고, 한 가지에 몰두하는 시간을 통해 정신적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쉽고 재미있는 ‘명상’ 입소문집중력 상승·명상 효과 탁월사경·사불 수행 입문 계기로중국·대만 등 중화권 수출도불교계에도 컬러링북 인기는 상당하다. 사경·사불과 비슷하지만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입소문
94년 종회 참석차 상경했다무심코 빌려준 카드 때문에폭력배 동원 의심 받아 징계초심호계원, 조사 없이 ‘제적’억울함 호소하며 재심 청구재심선 ‘공권정지 1년’ 경감징계 확정되자 주지서 면직소송제기하자 다시 징계회부초·재심서 ‘체탈도첩’ 확정 “말주변도 없고, 그 때 일은 잘 기억을 못해요. 괜한 분란만 일으키게 될지도 모르는데….”불국사 전 주지 종원 스님은 인터뷰 제안에 한동안 머뭇거렸다. 자신의 일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종원 스님은 1994년 9월 개혁회의로부터 체탈도첩(멸빈)된 이후 세상을 등지
‘아, 몹시 목이 마르구나.’황폐한 무덤 속에서 잠을 자던 원효(元曉,617~686)대사는 심한 갈증으로 잠이 깼다. 곁에서 의상(義湘,625~702)대사의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 항구로 향하던 두 사람은 직산(?山:천안)에서 밤을 맞아 무덤 속에서 눈을 붙였다. 이번 유학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에도 그들은 유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경인 요동에서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첩자로 오인 받아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수십일 만에 간신히 빠져 나와 목숨은 건졌지만
“너희 나라 왕은 인도(天竺) 석가족(刹利種族)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음이요 동이공공(東夷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잘못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는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법문을 많이 들어 아는 승려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만민이 화평할 것이다.”자장율사, 당나라 유학 도중선덕여왕 요청에 신라 귀국대국통 되어 황룡사탑 건립왕실권위 회복하는 데 일조‘금낭화’는 조화로움 돋보여괴석을 배치해 안정감 배가말을 끝낸 문수보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통일 지향적인 지도자를 뽑기 위해 지금부터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준비에 앞서 통일을 왜 해야 되는가에 대해 짚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통일을 하지 않아도 별 지장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은 많이 했지만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 일극 체제에서 우리는 한미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기술도 최고 앞선 기술을 배우고, 안보도 튼튼히 마련되었고, 우리가 따라가야 할 선진국과의 간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모방을 통한 압축 성장이 가능했습니다.주
우리나라의 불탑은 특히 석탑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 중국이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塼塔), 일본은 나무를 짜 맞춘 목탑을 주로 세웠다면, 우리나라는 화강암을 쌓아올린 석탑을 위주로 발전했다. 이러한 석탑도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로 크게 3분된다. 고구려계가 강원도 평창 월정사의 8각 다층석탑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면, 백제계 양식은 익산 미륵사탑, 부여 정림사탑과 같이 목탑을 석조로 번안한 양식에 연원을 두고 있다. 신라계 석탑은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시작된 전탑을 모방한 양식계통이다.양식상 백제계 탑으로 인식돼1965년 해
건봉사(乾鳳寺) 재금강산남(在金剛山南), 해인사 재가야산(在伽倻山), 전등사 재길상산(在吉祥山), 조선 초(15세기 후반)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의 지역별 불우(佛宇: 사찰)항목에는 하나 같이 사찰의 소재지를 ‘在OO山’과 같이 산을 중심으로 밝히고 있다. 신라 최초의 가람 흥륜사는 도읍의 숲(천경림)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떻게 가람이 산중으로 갔을까?산지가람이 본격 도입된나말여초에 사찰림 시작선종 도입·풍수지리설도사찰림 형성에 큰 영향삼국유사에 진여원 기록국가 내린 사패지서 비롯학계에서는 시대에 따라 사찰의 창건 장소가 도읍(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