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정문길 제와장인

흙과 물, 불 그리고 바람 반백년이 빚은 기와로 지붕을 얹다

▲ 정문길 제와장인은 흙과 물, 불 그리고 바람과 반백년을 살았다. 흙을 발로 다져 손으로 빚고 불을 때서 구워야 비로소 기와 한 장을 만든다.

차라리 숙명이었다.

그는 1943년에 태어났다. 사람들은 옹기골 혹은 기왓골이라고 했다. 신라시대 때부터 그랬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는 그릇 가마터와 옹기점이 있던 마을이었다. 그래서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전성기 서라벌에는 17만8936만호 기와집서 숯불을 피워 밥을 해먹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서라벌 도성에는 기와집이 겹겹이 펼쳐져 비가 와도 어깨가 젖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고도 한다.

문화재수리기능보유는 670호
제작와공 분야에선 국내 1호

경주 기왓골서 태어나고 자라
어깨너머 배움서 17세 때 입문
노당기와 설립해 기와생산 앞장
조부가 시작해 4대째 가업계승

흙 밟고 문양 새겨 건조한 뒤
1000도 가마서 굽는 고됨에도
57년 전통한식기와 외길 걸어
옹기 만든 고령토로 재료 삼아
주문생산 방식 전통기와 구워

기와 굽기에 알맞은 점토가 지천이라 조선시대 이후 많은 와공(瓦工)들이 배출돼 기왓골로 불렸다. 기왓골은 1930년대 주로 옹기를 구웠지만 그 기술이 이어지면서 40년대에는 기와를 만들었다. 당시 기와공장 10여곳이 불을 때던 가마에서 피어올랐던 기와 굽는 연기는 바람이 됐다. 노당기와 홀로 기왓골을 지키고 있다.

“할아버지가 기와를 만들었어.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지. 할 일이 없었어. 이 일대에서 기와일을 배웠던 거야. 노당기와를 세웠고, 11년 뒤에 아버지가 가업을 이었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때야. 인심도 삶도 흉흉했어. 흙일하며 사는 수밖에.” 

70대 노인은 유년을 더듬었다. 2013년 작고한 중요무형문화재 제91호 한형준 제와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유년시절부터 흙과 물, 불 그리고 바람과 함께 지냈다. 아버지를 도와 잔심부름을 했다. 흙도 나르고 밟으면서 어깨너머로 제와(製瓦)를 배웠다. 기와 굽는 가마터를 뛰어 놀다 몇 장씩 깨기도 했으리라. 사실 기와 한 장 구워내기도 힘들 때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어찌나 고되는지 ‘흙일’이라고 했다. 흙을 파내는 게 시작이었다. 다행히 흙은 좋았다. 광맥지도상 기계지적 19호 고령토 광구로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고령토가 나오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흙이 좋다고 좋은 기와가 나오진 않았다.

“옛날엔 정자 하나 지으려면 옆에 가마를 만들었어. 거기서 기와를 구워서 바로 지붕에 올렸지. 날이 궂을 때도 좋을 때도 있고 볕이 좋거나 나쁠 때도 있고 바람이 불거나 안 불 때도 있었을 거야. 그래서 아무리 와공이 기와를 말려서 열심히 불 때 구워도 옛 전통기와가 잘생긴 놈 못생긴 놈이 나오기 마련인 거지. 자연과 사람의 정성이 조화를 이룰 때 좋은 기와가 나와.”

고 한형조 제와장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실력 좋은 사람이라도 ‘운’이 따라야 기와가 제대로 구워진다. 기와를 가져갈 사람, 만드는 사람, 기와공장 주인까지 세 사람의 운이 잘 맞아야 한다.”

제와공이 가마 앞에서 겸손해야하는 이유다. ‘운’은 정성이자 자연이리라. 그랬다. 흙과 물, 불, 바람 그리고 와공의 정성이 어우러져야 좋은 기와를 빚어낼 수 있었다. 점토를 채취하고 도구를 이용해 흙을 고른 뒤 물 섞은 흙무더기를 발로 밟아 반죽 해야 한다. 흙으로 담을 쌓고 거기서 기와 크기에 맞게 ‘쨀줄(흙 자르는 철사줄)’로 흙을 잘라 나무로 만든 와통에 흙판을 붙인다. 바대치기(문양 넣기 혹은 흙 다짐)를 한 다음 기와 끝 면을 다듬어 곡선을 만들고 2~3일간 볕 좋은 곳과 안 드는 곳에서 말려야 비로소 가마에 기와가 든다. 여기까지도 고되지만 불 때는 일은 더하다. 처음에는 연기로 말리기 위해 말림불(연기 건조)을 붙여 초불을 넣는다. 중불 과정에서는 창구멍 3분의 2를 막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창에 작은 구멍만 남기고 나무를 가득 넣어 때는 대불을 놓는다. 마지막 공정인 막음불은 아궁이를 포함해 가마 전체에 모든 구멍을 막고 기와를 굽는다. 그렇게 1000도 가까운 온도에서 20시간 굽고 잔불로 72시간을 식혀야 전통한식기와 한 장이 세상 빛을 본다.

하루에 500장씩 만들면 많은 축에 든다. 종일 흙과 물, 바람과 부대껴야 했다. 어느 과정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게 없지만 불의 온도 조절은 오직 경험으로 익힌 감이 필요한 작업이다.

이렇게 힘든 제와인 만큼 예로부터 나라에서도 와공 관련 제도가 있었다. ‘경국대전’ 공장조에 따르면 조선시대 법정공장 중 건축분야 종사직으로 와장(瓦匠)이 있다. 기와 만드는 공인은 와서(瓦署) 소속으로 정원을 40명으로 책정했다. 흙을 반죽하는 소를 정부에서 지급했고, 법대로 기와를 만들지 않으면 엄중 처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전통가옥이 줄어 와공이 소멸될 지경에 이르게 됐다.

“장남인 내가 가업을 이었지만 얼마나 힘들던지 도망가고 싶기도 했어. 동생은 일 배우다 서울로 도망치기도 했었어. 할아버지에서 시작해 아버지 그리고 내게 이어졌지. 지금은 내 아들이 이수 받아 4대째 노당기와를 운영하는데,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 내겐 운명이었는지 몰라. 기왓골에서 났고 기와 만드는 일이 숙명이었나봐.”

 
▲ 흙 밟아 점성 높이고 기와를 만들 흙 떼서 와통에 붙인다. 문양 넣을 바대로 치고 나면 와통에서 흙을 분리해 건조시킨 뒤 가마에서 구워내면 암키와 한 장이 나온다.

노당기와는 그의 할아버지가 1940년에 설립했다. 10년 뒤 그가 태어난 마을에 공장을 만들고 1951년 아버지가 가업을 이었다. 당시 정미소를 했지만 인민군이 불을 질렀고 생계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장사 않고 술 마시고 다니던 아버지였지만 기와는 열심히 만들었다. 그는 중학교 졸업 후인 1959년 17세 때 제와에 입문했다. 그는 1967년 가업을 이은 뒤 1979년 문화재관리국에 노당기와를 등록했다. 자신은 1983년 문화재수리기능보유자 670호 자격증을 취득했다. 수많은 문화재수리기능보유자가 있었지만 제작와공(製作瓦工) 분야에서 그가 국내 1호였다. 기와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가업을 번창시켰다. 1993년 그을림 한식기와로 KS 표시허가를 취득하고 법인을 설립했다. 70년대 후반부터 도입된 기계식 제와를 했지만 전통한식기와는 수요자 특별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2006년엔 아들이 노당기와 운영을 맡았다. 70년 넘게 이어진 전통한식기와 제작은 2013년 경북 산업유산으로, 향토뿌리기업으로 인정받았다. 

노당기와는 200kg 하중을 견디는 강도를 지니고, 동파 염려가 적은 놀라운 방수효과로 유명세를 탔다. 우리나라 기후에 적합한 단열과 통풍효과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은 따듯한 지붕을 만든다. 노당기와가 만든 전통기와는 그 쓰임새에 따라 기본기와, 막새기와, 서까래기와, 마루기와, 특수기와 등 종류가 다양하다. 기본기와는 수키와와 암키와다. 지붕을 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은 수량이 필요한 기와다. 눈과 빗물의 누수를 방지하기 위한 가장 보편적 기와로 수키와는 기왓등, 암키와는 기와골을 형성한다. 쉽게 말해 지붕바닥에 놓이는 암키와 사이에 등처럼 ‘∩’ 모양으로 생긴 기와가 수키와다. 줄줄이 이어지는 이 기와들 끝을 막는 기와가 수막새, 암막새다.

노당기와의 장인정신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으로부터 예경대상인 석가모니부처님을 지키기 위해 전각 지붕에 수없이 많은 기와로 앉아있다. 미국 역사상 유래 없는 1500년 전통공법으로 조성되고 있는 한국불교 전통사찰 뉴욕 원각사 대웅전에도 곧 노당기와가 지붕을 만든다.

“매일 불과 흙, 바람, 태양 곁에서 살았어. 보람도 컸지. 내가 만든 기와를 지붕 삼아 그 아래서 오순도순 살아갈 가족들을 생각했어. 손수 만든 기와가 이어져 있는 지붕 밑에서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인생이 살아가는 게지. 그래서 기와 한 장 만드는 일에 소홀할 수 없는 거야.”

아직 노당기와 공장에는 옛 가마 3개가 있다. 그가 기와를 빚는 공방에는 막새틀을 비롯해 전통한식기와 제작도구가 있다. 수키와·암키와 와통, 수키와 분할도구, 가마 흙손, 빗살무늬 방망이, 흙무더기 치는 방망이, 흙 성형 방망이, 무늬판(바대), 문양 칼, 쨀줄, 내림틀 등등.

옛 신라 사람들은 웃는 기와로 지붕 얹어 웃는 집에서 살았는지 모른다. 기와 하나 처마 밑으로 떨어져 얼굴 한 쪽 금이 가고 깨졌지만 나뭇잎 뒤에 숨은 초승달처럼 웃고 있으니. 천년을 가는 그런 웃음 남기고 싶어 흉내 내는 이봉직 시인의 감성을 닮아서일까. 혹은 정문길(74) 제와장인은 반백년 전통한식기와를 빚은 기와로 엮은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 웃음을 지켜주고 싶어서일까.

“천직이야, 천직….”

반백년 넘게 흙일 하다보면 손발은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갈라진다. 왜일까. 제와장인, 그의 손에 새겨진 주름이 웃는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천년고찰 부처님 지붕으로 엮인 노당기와

장인 손길 닿은 사찰

불국사·부석사 등 기와불사
해외 고건축에도 기와 수출


▲ 영주 부석사.

▲ 영천 거조암.

전국에 있는 천년고찰은 어김없이 정문길 제와장인이 만든 노당기와의 전통한식기와를 지붕으로 얹었다. 그가 1979년 노당기와를 문화재관리국에 등록하고, 5년 뒤인 1983년에 문화재기능보유자 670호로 인정받자 그가 빚은 기와는 천년고찰 지붕이 됐다.

주문자 생산방식으로 제작한 전통한식기와는 경주 불국사는 물론 기림사와 분황사, 쌍계총림 쌍계사, 팔공총림 동화사, 영축총림 통도사, 금정총림 범어사로 향했다. 교구본사인 김제 금산사와 영천 은해사도 그가 전통방식으로 구워낸 기와를 지붕에 올렸다.

특히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권수정혜결사문(勤修定慧結社文)’을 천명한 정혜결사 도량 영천 거조사(암) 지붕도 그의 정성이 담겼다. 국보 14호인 영산전의 지붕이 노당기와다.

▲ 경주 분황사.

▲ 김제 금산사.

▲ 영천 은해사.

영산전에는 오백나한과 부처님 10대 제자, 16나한 등 526분의 나한성중이 봉안된 전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은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그리고 거조사(암) 영산전 등 4곳뿐이다. 단청이나 어떤 무늬도 없고 나무도 벽에 바른 흙도 그냥 자연색이다. 그가 만든 전통한식기와로 지붕을 엮어야 하는 이유였다.

뿐만 아니다. 배흘림기둥으로 천년 동안 불법을 떠받친 영주 부석사 곳곳에도 노당기와가 보인다.

이 밖에 경복궁, 창덕궁, 청와대 춘추관, 개성공단 일주문, 목월기념관, 경주교촌 한옥마을, 안동하회마을에도 노당기와를 올렸다. 파라과이 대통령궁, 중국 상해 담장, 광동성 정자, 모스크바 삼오정 등 해외에 건립된 고건축에도 노당기와가 쓰였다.

   

 

[1335호 / 2016년 3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