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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분황사 모전석탑은 원래 몇 층이었을까?

기자명 주수완

분황사탑은 ‘모전’의 총 부피 측정결과 9층이 적합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제30호. 634년 건립(추정), 현존 높이 9.3m.

분황사는 수학여행의 상징이다. 불국사, 석굴암과 더불어 수학여행지로 널리 알려져 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공간이다. 오히려 접근성에 있어서는 불국사, 석굴암보다 뛰어나지만 실은 그만한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들처럼 다양한 볼거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 신라인들에게 있어 분황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남쪽으로 길 건너 바로 있는 황룡사와 함께 과거불의 일곱 설법처 중의 하나로서 막중한 것이었다.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세운
모전탑은 신라 최초 석탑 추정

현재 3층만 남아 있을 뿐이나
1990년대 들어서 9층설 대두
탑 부피·삼국 탑파 흐름 고려해
9층 이상의 탑일 것으로 예상

고유섭 선생 등 3·5층 주장하나
이유에 대해서 뚜렷한 설명 없어
신라3보 표기는 ‘동경잡기’ 오류

다만 접근성이 너무 좋은 나머지 몽골이나 왜군의 병화에 더 쉽게 노출되어 그만큼 피해가 컸을 따름이다. 그래서 분황사는 이제 모전석탑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나마도 완전한 탑이 아닌 거의 다 무너지고 3층만 남은 탑으로 말이다. 그래도 분황사탑은 보기에는 벽돌로 쌓은 탑처럼 보여도 그것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탑이 아니라 돌을 벽돌처럼 깎아 세웠다는 뜻에서 ‘모전(즉, 벽돌을 흉내냈다)’이라 했다는 사실만큼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의하면 분황사는 선덕여왕 재위 3년인 634년에 창건되었다. 이 기록에서 탑이 처음부터 함께 세워졌는지 아니면 그 이후에 세워진 것인지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고대 사찰에서 탑이 차지했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아마도 함께 세워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탑이 지금의 모전석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사고를 열어둘 필요가 있다.

▲ 9층으로 복원되었을 때의 분황사탑과 주변 전각의 복원 상상도.

여하간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지금의 모전석탑이 634년 분황사 창건 때 세워진 탑이라고 믿고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분황사탑이 가진 미술사적 의미는 현존하는 신라 최고(最古)의 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아있지 않은 탑으로서 더 오래된 탑도 있을까? 널리 알려진 황룡사 9층 목탑도 선덕여왕대에 세워진 것이지만 이는 분황사탑보다 늦은 645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황룡사에 그 이전부터 원래 탑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9층 목탑 이전에 진흥왕이 황룡사를 창건했을 때부터 이미 탑이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황룡사는 처음부터 거대한 목탑을 염두에 두고 맨 마지막에 세우기 위해 당시까지 탑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머문 곳인 도리사와 엄장사에도 탑이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공식적으로 신라 최초의 사찰이 된 법흥왕대의 흥륜사에도 분황사에 앞서 탑이 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도리사에 남아있는 석탑은 고려시대의 유구로 생각되고, 그 외에는 탑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설령 탑이 있었더라도 목탑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분황사 모전석탑이 신라 최초의 ‘탑’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최초의 ‘석탑’이었을 가능성은 틀림없지 않나 싶다.

분황사탑은 현재 3층만 남아있지만, 원래는 더 높은 탑이었다. 여러 문헌기록에도 원래 탑이 더 높았지만 무너졌음을 밝히고 있다. 때문에 일찍부터 여러 학자들은 이 탑의 복원 층수를 즐겨 논의해왔다. 예를 들어 우현 고유섭 선생은 현재와 같은 3층이거나 혹은 조금 더 높은 5층으로 추정했다. 반면 세키노 타다시 같은 일본 연구자들은 9층으로 추정했다. 9층으로 추정한 가장 큰 이유는 1669년 경주부윤 민주면(旻周冕)이 경주의 몇몇 인사들과 함께 편찬한 경주 읍지 성격의 ‘동경잡기’에 실린 기사 때문이다. 여기에 의하면 “분황사탑은 신라 3보의 하나로서 9층이었다”고 한다. 이 기사는 고유섭 선생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9층설을 부인한 것은 신라3보에 들어가는 탑은 황룡사탑이지 분황사탑이 아니기 때문에 ‘동경잡기’의 9층 주장은 황룡사 9층 목탑과 헷갈린 내용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분황사탑의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어온 중국 서안의 자은사 대안탑. 당대.

고유섭 선생은 그의 불후의 명저 ‘조선탑파의 연구’에서 이같이 설명하였으나, 왜 3층이나 5층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추정컨대 3층만 남은 탑 위에 상상으로 몇 개의 층을 더 올려보면 그다지 많은 층이 올라가지 않을 것 같은 비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한 대부분의 전탑들이 5~7층의 규모이고, 7층인 경우는 체감률, 즉 위로 올라갈수록 옥개석이 좁아지는 비율이 그리 크지 않은데 반해 분황사탑은 체감률이 큰 편이어서 5층 정도 올리기에 가장 적합해 보이기는 하다. 또한 신라 당시에 이러한 벽돌형 부재를 쌓아올릴 때는 중간에 시멘트 같은 것을 바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층부가 급격히 좁아지면서 7~9층까지 쌓아올리게 되면 구조적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아마 이런 이유 등등이 5층으로 제한한 실질적 배경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그러나 해방 후 원로 학자들은 현존하는 탑의 비율을 고려하면서도 조금 더 높은 7층탑으로의 복원을 시도했다. 우선 분황사 모전석탑의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중국 서안의 자은사 대안탑이 7층이라는 것이 참고가 된다. 비록 대안탑은 전탑이지만, 3층까지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동경잡기’ 이외의 조선시대 문집에 보면 원래 분황사탑이 상당히 높은 고층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5층보다는 더 높았을 것이라는 추정도 일조했다고 생각된다. 비록 ‘수종재집(守宗齋集)’ ‘연재선생문집(淵齋先生文集)’ 등은 9층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임란 후 분황사탑이 무너진 다음의 기록이기 때문에 이들이 실제 본 것이 아니라 ‘동경잡기’와 마찬가지로 황룡사 9층 목탑과 혼동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서서히 ‘9층’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신라삼보9층탑”으로 전해지는 기록들을 모두 무시할 것이 아니라, 분황사 탑이 9층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를 황룡사 9층탑이 신라3보의 하나였다는 사실과 헷갈려 분황사탑을 신라3보로 기술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물증을 더한 것이 바로 분황사에서 수습된 ‘모전’, 즉 탑을 쌓아올린 벽돌형 석재들의 전체 체적이었다.

분황사탑을 7층으로 복원했을 때와 9층으로 복원했을 때를 가정하여 각각의 탑의 사라진 부피를 측정하고, 더불어 현재 수습된 ‘모전’의 총 부피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가까운가를 계산한 것이다. 그 결과 7층으로 하기에는 남고, 9층으로 했을 때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분황사탑이 9층으로 해석되기 시작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촉매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분황사탑에 사용된 모전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모전이 인근 300m 떨어진 구황동사지 탑지에서도 발견되었는데, 분황사탑 1층의 문 좌우에 봉안되었던 금강역사와 닮은 역사상들도 발견되어 분황사탑과 유사한 형태의 탑이 또 있었을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혹 분황사에서 수습된 모전 중의 상당수는 바로 이 구황동 폐사지에서 수습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다. 그렇다면 비록 300m로 가까운 거리에 있긴 했지만 왜 부재들을 옮겨왔을까? 분황사탑은 조사 결과 고려시대 화폐가 출토되는 등 이미 고려시대부터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임란 때 병란으로 무너진 뒤 이 안에서 사리장치를 꺼냈다가 다시 넣고 임시로 몇 층 쌓아올렸음을 암시하는 기사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수리할 때마다 파손된 모전을 대신할 재료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근처에 이미 무너져 있던 구황동 탑지의 부재들을 옮겨다가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에 9층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체적 문제에 더하여 기존에 분황사탑의 모델로 생각되어 왔던 자은사 대안탑이 사실은 삼장법사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온 645년 이후에 목탑으로 세워졌다가 701년에 전탑으로 개축된 것이므로 오히려 분황사탑이 더 일찍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따라서 자은사탑의 7층이 분황사탑의 원형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 대안으로 산동성의 사문탑(611년)과 같은 수나라 시대의 전탑형 단층탑, 나아가 인도·간다라의 조적식 스투파를 원형으로 두었고, 더불어 분황사탑 직전에 백제에서 세워졌을 미륵사지의 석탑이 9층으로 추정되는 것과, 같은 선덕여왕대에 세워진 황룡사탑도 9층임을 감안하여 당시 삼국 탑파의 흐름은 9층탑을 이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알고 보면 미륵사 창건주 무왕의 부인 선화공주는 선덕여왕의 동생이니 6세기 전반의 대규모 공사의 배경에는 이들 자매가 큰 역할을 한 셈이 된다.

▲ 분황사탑의 모델로 새롭게 제기되었던 산동성 제남시 신통사 사문탑(四門塔). 611년 건립.

근래에는 인터넷 상의 고수들이 나름대로의 견해를 펼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동사강목’의 기사를 통해 9층설에 힘을 보탰다. 내용을 살펴보면 경덕왕 17년(758년)에 “영묘(靈廟)에는 재앙이 네 번 있었고, 황룡사에는 큰바람에 불전(佛殿) 하나가 무너지고 9층탑 둘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황룡사에는 탑이 하나 뿐이므로, 여기서 둘이라 한 것은 바로 옆에 있는 분황사탑을 함께 묶어 언급했다는 주장이다. 분황사와 황룡사를 묶어 언급한 것은 의아하지만, 황룡사의 9층탑 2기는 더욱 의아하므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현재는 대체로 9층설로 정리되고 있는 듯한데, 다만 떠도는 복원 상상도는 조금 더 개선될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임란 직후 분황사탑은 1층만 남아있었고, 2층은 일부만 남아있었던 것 같으며, 이마저도 후일에 보수하며 더욱 훼손되었다 한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사진에 찍힌 분황사탑은 원형이 아니라 이미 변형된 것이므로 그에 기초해 정비된 현재의 3층 석탑의 체감비율 그대로 9층을 세우는 상상도는 조형적으로 다소 어색한 감이 있다.

더불어 분황사탑에 신라3보를 잘 못 끼워 넣어 혼란을 야기한 ‘동경잡기’ 등의 찬술자들이 살짝 미워지려고 한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42호 / 2016년 5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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