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우리 역사에서 불교가 가장 성했던 시기이기는 했어도 사리신앙에 관한 한은 정보의 밀도가 그다지 높지 않고 빈 칸이 많아 아쉽다. 역사 자료의 많고 적음과 역사의 이해도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료의 부족이 정밀한 연구에 걸림돌이 되기는 한다. 그래도 몇몇 장면들을 통해 고려시대 불사리 봉안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건 다행이다. 특히 고려 왕실에서 불사리 봉안에 유난히 비중을 두었던 모습이 눈에 띤다. 고려가 건국한지 30년이 지난 948년, 정종(定宗)이 궁궐을 나와 지금의 개성시 독암동 탄현문(炭峴門)을 지나 걸
대중이 불사리 친견을 소망하는 것은 부처님의 큰 덕을 찬탄하고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다. 한편으론 ‘대비경’ 등 경전에 부처님이 아난에게 하신 말씀으로 “내가 입멸한 뒤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내 사리를 공경히 공양한다면 그 선근(善根)으로 말미암아 열반의 세계에 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나오니, 이를 통해 불사리를 친견함으로써 극락왕생의 길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는 믿음도 컸을 것이다.불사리를 진심으로 예경하면 현세에 감응을 얻는다는 믿음도 사리신앙 확산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불사리의 영험과 감응은 전설이나 설화보
고려에서는 불교가 국교라 할 만큼 널리 믿어졌기에 사리신앙 역시 보다 보편화되어 있었다. 고려는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송(宋)나라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매우 가까운 관계였기에 상당량의 불사리를 중국에서 모셔왔다.고려 사람들은 불아(佛牙) 사리를 특히 존숭했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 1119년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극영(鄭克永)·이지미(李之美)가 극적으로 불아 사리를 모셔온 이야기에 덧붙여 150년에 걸친 그 후일담까지 드라마처럼 소개되는 데서도 그런 정황이 잘 포착된다. 12세기에 접어들자마자 송나라는 도교를
7세기 초반만 해도 대중이 불사리를 친견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불사리를 얻으려면 멀리 인도나 중국으로 가서 모셔 와야 했고, 더욱이 중국이 불사리가 국외로 옮겨가는 것을 가능한 한 막으려 한 분위기였기에 더더욱 얻기가 힘들었다. 6~7세기에 중국에 다녀오는 사신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불사리 구득(求得)이었음은 다음의 기록에도 나온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사신이 각각 본국에 가져가서 탑을 세워 봉안할 수 있도록 사리 1매씩을 청하니,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이를 모두 허락하였습니다.”(‘광홍명집’, ‘경사리감응표’)불사리 단
진신사리는 처음에는 탑에만 봉안되어 경배되었기에 사람들의 사리신앙도 자연스럽게 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후 인도나 중국, 우리나라 등지에서 탑 일변도에서 벗어나 불상이나 불화에도 사리를 봉안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7세기 후반에 이런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이미 말했듯이 이때는 사리신앙의 역사상 변화 시기였다. 신라나 백제에서 주로 왕실과 귀족 계급 등 일부 계층에서 주로 향유되었던 사리신앙이 이때부터 급격히 대중화의 길로 흘러간 것이다. 따라서 탑만이 아니라 불상, 불화에도 사리를 봉안한 데는 사리신앙의 대
7세기는 공교롭게도 백제 역시 사리신앙이 대중화된 시기였다. 신라나 백제 두 나라 모두 독자적으로 중국의 선진 사리신앙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충분히 살펴본 다음 그 핵심을 도입했던 결과였다. 백제는 익산 제석사 목탑에서 불사리가 출현함으로써 대중적 관심을 모으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이때가 643년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미 이전에도 비슷한 이적이 나타난 적 있었다. 577년 2월15일, 위덕왕(재위 554~598)이 왕흥사를 짓고 불사리를 봉안할 때였다. 이 불사는 위덕왕의 아들이 갑자기 죽자 불사리를 모셔와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
신라에 사리신앙이 전국화, 대중화 되었던 건 643년에 자장 스님이 중국에서 불사리를 모셔와 황룡사 구층목탑,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하면서부터라고 얘기했다. 사실 자장 스님은 그 외에 오대산 월정사에도 소중하게 불사리를 봉안했다. ‘삼국유사’에 “석가모니 입멸 후 다비해서 나온 불두골, 치아사리, 가사 등은 문수사리에게 맡겨졌다. 훗날 신라의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이 불두골, 치아사리, 가사를 받았고 귀국하여서 월정사에 봉안했다”라고 나온다. 석가모니의 사리가 이 땅에 왔다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나라 불교 발전에
549년 양나라에서 신라로 전래된 진신사리가 신라 사회에 사리신앙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기회였다고 한다면, 27년 뒤 이어진 사리전래는 왕실과 귀족계층을 넘어서서 드디어 일반 대중에게까지 전파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진(陳)나라로 유학 갔던 안홍(安弘) 스님은 함께 공부했던 인도의 비마라 스님 등을 대동하고 576년에 귀국해 신라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얻은 진신사리를 일반에 선보임으로써 사리신앙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삼국사기’ ‘진흥왕’ 37년). 앞서 549년의 진신사리 전래가 국가
진신사리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 분명히 나오는 기록은 딱히 없다. ‘삼국유사’에 몇 편의 사리 관련 기사가 강조되어 있는 것 말고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불교사의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생각할 때 4~6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으니, 사리신앙이 정착된 시기도 이 무렵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다.진신사리를 들여오고 사리신앙을 알리는데 가장 앞장섰던 계층은 인도와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스님들이었다. 특히 자장, 의상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라 고승들의 역할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1세기에 중국, 4세기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불사리는 생전의 석가모니와 다름없다는 사리신앙은 불탑의 건립을 유행시켰고 나아가 불교의 전파에 큰 동력이 되었다. 사리관(舍利觀)도 확대 변화되어, 처음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만 예경의 대상이었으나 나중에는 고승들의 사리 역시 그 가르침을 이어받으려는 제자들에 의해 존숭되었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특별히 ‘진신사리’ 또는 ‘불사리’라고 하여 승려의 사리와는 구분해 부르기도 했다.문헌으로 보면 우리나라 사리신앙은 4~5세기 무렵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돌아가신 조상이 남긴 몸을 후손들이 땅에 묻고 기리는 풍속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왔던 풍습이다. 영혼이 뼈에 깃든다고 생각해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모아 따로 모시기도 했다. 유골을 통해 후손들이 조상들의 영혼과 연결된다는 고대 조령(祖靈) 신앙의 한 모습이다. 보통사람의 유골도 이러하였으니, 만인이 믿고 의지하던 성자(聖者)에 대해서는 더욱 특별한 숭앙심이 표출되는 것은 당연했다. 약 30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나 수행자로서 뭇 사람들의 커다란 존경을 받다가 열반한 고타마 싯달타가 바로 그렇다. 한계를 넘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