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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려시대에 있었던 분사리 영험의 이야기들

“불사리 유한하나 정성에 감응해 분사리로 화현”

사리신앙 확산은 사리 예경하면 현세 감응한다는 믿음 때문
고려시대 기록 중 최초 분사리는 통도사 금강계단의 불사리
국청사에 사리 봉안하고자 진감스님 기도 올리자 사리 나와

초조본 법원주림 권82(호림박물관 소장). 당나라 도세(道世, ?∼683) 스님이 불교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집대성한 백과사전. 방대하고 다양한 자료를 수록한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이 평가된다. 여기에 불사리에 관련한 각종 영험과 감응의 사례가 적지 않게 보인다.

대중이 불사리 친견을 소망하는 것은 부처님의 큰 덕을 찬탄하고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다. 한편으론 ‘대비경’ 등 경전에 부처님이 아난에게 하신 말씀으로 “내가 입멸한 뒤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내 사리를 공경히 공양한다면 그 선근(善根)으로 말미암아 열반의 세계에 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나오니, 이를 통해 불사리를 친견함으로써 극락왕생의 길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는 믿음도 컸을 것이다.

불사리를 진심으로 예경하면 현세에 감응을 얻는다는 믿음도 사리신앙 확산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불사리의 영험과 감응은 전설이나 설화보다는 역사상 알려진 인물들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보다 큰 믿음을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법원주림(法苑珠林)’ 같은 중국 옛 기록에 오색 광명의 발현, 그윽한 향기의 분출, 병의 치유, 탈출, 재난 구제 등 이를 친견한 사람들에게 이뤄지는 영험의 이야기가 수도없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불사리는 석가부처님의 유골이라 물리적으로 유한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불사리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이 분사리(分舍利) 현상이다. 분사리란 하나의 사리가 스스로 나뉘어 여러 개가 되는 영험이다. 

고려시대 기록 중 최초로 분사리 되었던 것은 통도사 금강계단의 불사리였다. 자장 스님이 중국에서 모셔와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에 봉안한 다음에 통도사를 비롯해 여러 곳에 분장(分藏)했던, 우리나라 사리신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불사리이다. 다만 자장 스님이 처음 모셔왔던 수량이 ‘삼국유사’에는 100여 매로 나오는데 비해서 조선 초기의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엮은 ‘동문선(東文選)’에는 4매였다고 하여 서로 다르다. 지금 어느 것이 맞는다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통도사 등 전국 주요 사찰에 분장할 정도라면 수량이 꽤 많아야 됐을 테니 ‘삼국유사’ 기록이 맞을 것도 같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양주 통도사 석가여래사리지기’에 통도사 분사리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고려 말에 왜구가 통도사 일대까지 쳐들어오자 주지 월송(月松) 스님이 금강계단의 불사리 중 일부를 꺼내서 개성 왕궁으로 피해갔다. 월송 스님은 먼저 당시의 실력자로 정2품 찬성사였던 이득분(李得芬)을 찾아갔고, 이득분은 곧바로 왕궁에 들어가 월송 스님이 가져온 불사리를 우왕(禑王)에게 보였다. 뜻밖에 불사리를 맞이한 왕과 왕비는 아주 기뻐하며 개성 송림사에서 친견법회를 크게 열었다. 그런데 이때 법회에 참석한 이들 중 상당수가 ‘분신(分身)’ 사리를 얻었다고 한다. 이득분 3매, 경창대군 왕유(王瑜) 3매, 시중 윤항(尹恒) 15매, 회성군(檜城君) 황상(黃裳) 부부 31매, 개성 주변인 천마산(天磨山)의 스님들 3매, 성거산(聖居山)의 스님들 4매 등으로, 이를 합하면 모두 59매나 된다. 월송 스님이 통도사에서 가져간 게 몇 매였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59매를 나눠 가졌으면 분명 이때 분사리가 이뤄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양산 통도사 석가여래 영골 사리 부도비. 1706년 계파대사가 금강계단을 중수하고 금강계단에 봉안된 부처님 진신사리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기록한 비석이다.

그런데 분사리는 인위적으로 하는 것일까? 사실 불사리의 크기는 아주 작다. 6세기에 진제(眞諦)가 번역한 ‘무상의경(無上依經)’에는 아난이 “여래께서 멸도하신 뒤에 겨자씨만한 부처님 사리를 얻어 탑 속에 안치하되…”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또 중국 남산율종의 시조 도선(道宣, 596~667)스님과 제자들이 624년에 장안 숭의사(崇義寺) 탑 아래에서 불사리 3매를 얻었을 때도 크기가 기장만 했다고도 나온다. 또 불사리는 아주 단단해서 “망치로 때려도 부서지지 않고, 불에 태워도 타지 않는다.”(‘법원주림’)고 한다. 그래서 불사리를 물리적으로 나누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분사리에 관련한 기록들을 보면 인위적이 아니라 참배자의 정성에 감응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분사리의 영험에 관한 또 하나의 고려시대 기록은 민지(閔漬, 1248~1326)가 지은 ‘국청사 금당주불 석가여래 사리영이기(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에 보인다.

국청사(國淸寺)는 왕족으로서 출가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1095년에 창건했다. 천태종의 종찰로서 왕실의 후원을 받았는데 특히 의천의 어머니이기도 한 인예태후(仁睿太后)가 가장 적극적이어서 그녀의 지원으로 1104년에 황금 13층탑도 세웠다. 고려 역사상 황금 대탑은 개성 흥왕사와 더불어 단 2례만 전할뿐이다. 하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사찰 전체가 불타 없어졌다가, 1315년에 진감(眞鑑)스님이 금당을 지으며 중창하였다. 불사리의 영험은 이때 나타났다. 

금당과 불상까지 다 되었지만 인연이 안 닿아 불상 복장에 넣을 불사리를 아직 얻지 못한 게 진감 스님의 큰 근심거리였다. 함께 걱정하던 노우(盧祐), 정천보(鄭天甫) 등의 단월들이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만일 참되다면 부처님의 사리를 어찌 얻지 못하겠습니까?” 하며 다함께 부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해보자고 하였다. 이에 벽에 걸어 둔 백의(白衣) 관음보살도 앞에 검은 비단을 깔아 단을 마련한 다음 향을 피우고 공손히 세 번 절을 올렸다. 그러자 문득 단 위에 둥근 사리 한 알이 나타났다. 여러 사람들이 놀라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하다가 가까이 만져보다가 굴렸더니 그때마다 하나씩 더 늘어나며 저절로 분사리가 되었다. 색깔도 청색ㆍ백색ㆍ흑색ㆍ황색으로 다양했는데 단지 붉은 색만 없어서 노우가 “만일 붉은 사리만 있으면 오색이 다 갖추어질 텐데”하고 아쉬워하였더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붉은 사리가 연달아 네 개나 나타났다. 이에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들 “과연 부처님의 경지는 막힌 곳이 없고 공덕이 헛된 것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불사리 봉안에 관한 기록이 아주 드물다. 본래 기록이 적었는지 아니면 나중에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사리신앙을 문헌으로 고찰하려는 입장에서는 사료가 극히 빈약하여 아쉽다. 그래도 위에 소개한 두 이야기나마 전해져서 고려시대 사리신앙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분사리와 관련된 일화들을 알 수 있는 것은 다행이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38호 / 2020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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