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삼국시대 사리신앙을 마무리하며-백제와 신라 사리신앙의 대중화 과정
6. 삼국시대 사리신앙을 마무리하며-백제와 신라 사리신앙의 대중화 과정
  • 신대현 교수
  • 승인 2020.03.24 09:58
  • 호수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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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리 스스로 늘고 성지 봉안하니 백성 귀의하다

백제, 위덕왕 재위시 왕흥사에 불사리 봉안할 때 2매→3매로
신라, 자장 스님 중국에서 100매 모셔와 황룡사 탑 등에 봉안
7세기 후 통도사 금강계단 사리 일본에 뺏기는 등 풍파 많아
건봉사 치아사리탑. 통도사에서 이운된 치아사리를 봉안해 1724년에 세운 불탑. 옆에는 봉안 사유를 적은 사리탑비도 있다.

7세기는 공교롭게도 백제 역시 사리신앙이 대중화된 시기였다. 신라나 백제 두 나라 모두 독자적으로 중국의 선진 사리신앙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충분히 살펴본 다음 그 핵심을 도입했던 결과였다. 

백제는 익산 제석사 목탑에서 불사리가 출현함으로써 대중적 관심을 모으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이때가 643년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미 이전에도 비슷한 이적이 나타난 적 있었다. 577년 2월15일, 위덕왕(재위 554~598)이 왕흥사를 짓고 불사리를 봉안할 때였다. 이 불사는 위덕왕의 아들이 갑자기 죽자 불사리를 모셔와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 왕실에 들어올 때는 2매였던 불사리가 장례를 치르자마자 갑자기 3매로 바뀌었다. 이 ‘신의 조화[神化]’로 왕은 크게 감동했다. 그래서 ‘왕흥사’라는 이름으로 절을 크게 짓고 왕실의 번영까지 기원토록 했다. 또 이 사실을 순금 판에 새겨서 불사리와 함께 탑 안에 넣었다(‘불사리봉안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위덕왕은 이 신의 조화에 관한 증언이 먼 후대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랐을까? 왕흥사는 조선시대에 폐사되어 오랫동안 땅속에 묻힌 채 긴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신의 조화는 다시 일어났으니, 창건 1430년 만인 2007년 절터가 발굴되어 드디어 현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불사리 매수가 늘어났던 영험은 사람들의 큰 관심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덕왕은 원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10년 전인 567년에도 자신의 누이동생이 사리감[창왕명 석조 사리감, 부여박물관 소장]을 만들 때도 일정 역할을 하는 등 누구보다 불사리와 인연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연을 개인의 차원에서 단 한걸음도 더 넓히려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무왕은 639년 제석사에서 일어난 분사리(分舍利)의 기적을 경험한 뒤 이를 외연하는 데 매우 적극성을 띠었다. 이 일을 전국적으로 홍보함으로써 국가적 부흥의 원동력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위덕왕과 무왕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행보는 결국 사리신앙의 형성 여부에도 다른 영향을 미쳤다. 

신라 쪽에서는, 사리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결정적 모멘텀이 자장 스님이 642년에 중국에서 불사리 100매를 전래해온 일에서 나왔다. 개인의 신앙 차원이거나 혹은 왕실의 안녕만을 빌기 위한 게 아니라 마음속에 그 이상의 큰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100과나 되는 엄청난 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당히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플랜을 갖추고 있었음은 이후 행보에 잘 드러나 있다. 먼저 당시 정치경제와 문화 중심지 경주 한복판의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세워 사리신앙을 서울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널리 알렸다. 사리신앙을 성공적으로 중앙에 소개한 다음에는 지방 차례였다. 울산의 대찰 대화사에 불사리를 봉안하자마자 양산 통도사에도 금강계단을 설치해 불사리를 봉안했다. 

부여 창왕명 석조 사리감의 명문 탑본. 557년 백제 위덕왕의 누이가 불사리를 봉안하는 사유를 적은 글.

특히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설치한 것은 우리나라 승려들의 자존감을 한껏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당시 문화가 급속히 발전하던 강원도의 월정사와 정암사에 탑을 짓고 불사리를 봉안했다. 특히 월정사가 자리한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상주처이고, 석가부처님 다비 직후 불사리를 부촉 받은 이가 바로 문수보살이라는 경전 이야기가 서로 겹쳐지면서 자연스레 ‘신라 땅은 곧 불국토’라는 인식도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써 7세기 중반 신라 영토 대부분에 불사리 신앙이 골고루 일게 되었다.

그런데 7세기 이후 자장 스님이 정성스레 봉안한 불사리들 중 유독 통도사 금강계단 불사리에 풍파가 잦았던 게 이채롭다. 아무래도 통도사가 대중적 인기를 가장 많이 받았던 데 대한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 환란인 고려 말의 왜구 침입에 관해서는 지난 회에 자세히 언급했다. 위험을 피해 멀리 개성으로 옮겨졌다가 고려 귀족들의 신심을 크게 높여 중앙에까지 사리신앙을 넓히기는 했으나, 불사리들이 모두 온전히 되돌아오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자장 스님의 불사리는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두 번째 환란을 겪었다. 이번에도 일본의 침략이 원인이었다. 치열한 전쟁은 6년 뒤 일단 휴전되었고, 의승군 대장 사명대사 유정(惟政) 스님은 통도사로 내려왔다. 그리곤 우리 불교사의 일대보물인 금강계단 불사리를 어떻게 안전하게 관리해야 할지 큰 고민에 빠졌다. 전황으로 볼 때 그대로 두면 적군의 수중에 넘어갈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렇다고 존귀하기 짝이 없는 불사리를 함부로 꺼내 옮긴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전부가 아니라 12매만 꺼내고, 이안할 장소도 스승 서산대사 휴정(休政) 스님의 권고에 따라 가장 멀고 험한 지역인 강원도 건봉사(乾鳳寺)로 정했다. 일설에는 치아사리만 옮겼다는 말도 있다. 

결국 전쟁은 얼마 뒤 재개되니 바로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의 일대 반격이 시작되었다. 남겨진 금강계단의 불사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쉽게도 일본군의 침탈을 피하지 못하고 일본 땅으로 넘어가 버리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전쟁 종료 후 양국의 전후 협상 과정에서 사명대사가 담판 끝에 통도사 불사리 전부를 되찾아 와 금강계단에 다시 봉안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일본군은 통도사에서 불사리들을 탈취한 뒤 진중에 두었는데, 그때 일본군 진중에는 부산 동래에 살던 옥백(玉白) 거사가 잡혀 있었다. 그는 한밤중 몰래 이 불사리들을 빼앗아 달아났다가, 전쟁 후 통도사에 돌려주었다는 것이다(‘축서산 통도사 금강계단 봉안 세존사리’). 

왕흥사 사리기. 사진 왼쪽의 청동 사리호에 불사리가 2매에서 3매로 변신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렇게 금강계단 불사리는 지금까지 두 번 제자리를 떠나 개성과 강원도 등으로 이안된 적이 있었다. 이중 일부는 왕실 또는 개인이 갖거나, 고찰(개성 송림사, 강원도 건봉사)에 봉안되는 변화가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다시 통도사로 되돌아 와 다시 잘 봉안되었다. 

지금까지 백제와 신라의 사리신앙이 대중화되는 과정의 큰 줄기를 짚어보았다. 7세기가 지나면 삼국이 통일되고 일대변혁이 일어난다. 통일된 사회에서는 질서가 새롭게 짜이고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풍조들이 나타나곤 한다. 사리신앙 역시 이후 새로운 면모를 보이며 변하는데, 격변의 시대를 지나온 대중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보듬던 사례들이 역사 곳곳에 남겨져 있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30호 / 2020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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