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불상과 불화 내 사리 봉안
7. 불상과 불화 내 사리 봉안
  • 신대현 교수
  • 승인 2020.04.07 10:05
  • 호수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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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석가모니와 같고 영험 깃들 것이라 믿게 돼

불상 처음 나타났던 시기인 1세기 이후에는 정수리에 사리 봉안
8세기부터는 불상 배 가슴부위 안쪽 등에 빈 공간 마련해 넣어 
30cm 이하의 작은 불상, 금속불의 경우 대좌에 복장 공간 확보
간다라 불상의 정수리 육계 부분의 홈.

진신사리는 처음에는 탑에만 봉안되어 경배되었기에 사람들의 사리신앙도 자연스럽게 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후 인도나 중국, 우리나라 등지에서 탑 일변도에서 벗어나 불상이나 불화에도 사리를 봉안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7세기 후반에 이런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이미 말했듯이 이때는 사리신앙의 역사상 변화 시기였다. 신라나 백제에서 주로 왕실과 귀족 계급 등 일부 계층에서 주로 향유되었던 사리신앙이 이때부터 급격히 대중화의 길로 흘러간 것이다. 따라서 탑만이 아니라 불상, 불화에도 사리를 봉안한 데는 사리신앙의 대중화라는 배경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사실 불교 전래 초기에 탑과 불상은 불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 중심축이었다. 그런데 이 둘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의 정도는 늘 균등하지 않았다. 처음엔 탑을 아주 중시하였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탑보다 불상을 좀 더 의미 있게 바라보았다. 이런 차별적 이원화의 신앙 형태는 학술적으로도 증명된다. 사찰 공간에 봉안된 탑과 금당의 공간 배치를 보고서 신앙의 중심이 어느 쪽으로 좀 더 쏠렸던가를 추정할 수 있어서다. 금당은 불상을 봉안하니 불상 자체를 상징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예를 들어 4~5세기 평양 청암리의 고구려 절터는 가람의 한가운데 핵심공간을 목탑이 널찍하게 차지한데 비해서, 금당은 그 뒤편으로 다소 치우쳐 있는데다가 규모도 목탑에 비해 현저히 작다. 말하자면 불교 발전 초기에는 금당보다 탑에 무게중심을 더 둔 것이다. 아마도 진신사리 봉안의 유무로 둘 사이 비중의 차이를 가름했던 것 같다. 

7세기 중반에는 경주 감은사처럼 아예 탑 둘을 나란히 배치하는 쌍탑 가람도 나타났다. 높이도 13미터가 넘을 정도로 웅장해 절터에 들어서는 사람은 이 두 탑에게 먼저 압도당하곤 한다. 이때가 사리신앙의 전성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8세기부터 탑은 점차 작아지고 그에 반비례해서 금당의 크기는 커진다. 이후 탑은 규모가 전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줄어들고, 위치도 가람의 중심에서 비켜나 아래로 쳐진다. 반면 규모가 더 커진 금당은 가람 중심구역을 차지하며 명실 공히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한다. 바야흐로 불상의 시대가 열린 것인데, 이때가 묘하게도 불상에 사리를 봉안하기 시작하던 때와 일치하는 것이다. 불상 안에 사리를 넣으면 실제 석가모니를 대한다는 실감이 났을 터이고, 또 이로써 불상에 영험이 깃들 거라는 믿음이 생겨 불상의 권위가 더욱 높아졌을 것 같다. 
 

중국 송나라 시대의 불상. 왼쪽 불상의 육계 위에 작은 홈이 나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과연 불상 어디에 사리를 봉안했을까? 불상이 처음 나타났던 1세기 이후에는 정수리에 사리를 봉안했다. 인도 간다라 불상이 그렇고, 중국도 불교 전래 이후 초기에 만든 불상에도 역시 정수리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사리를 넣었다. 이 자리를 선호했던 데 대한 뚜렷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리를 부처님 정신의 결정체로 이해해 머리야말로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불상 제작의 규범 및 관련 의식을 규정한 ‘조상공덕경’에도 처음에는 불두에 사리를 넣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8세기부터 복장(腹藏)이 사리 봉안처로 애용되었다. 복장이란 불상의 배 또는 가슴에 해당하는 부위 안쪽에 빈 공간을 두고, 그 자리에 사리를 비롯해서 각종 진귀한 보배 등을 넣은 것을 말한다. 이때는 비약적으로 발전한 불교의식의 영향을 받아 오보(五寶)나 오곡, 각종 다라니를 적은 진언(眞言)과 경전, 후령통(喉玲筒), 비단 또는 옷 등이 사리와 함께 불상 안에 넣어야 할 중요한 품목으로 인식되었다. 품목이 다양해지니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져 선택된 자리가 바로 복장이다. 

중국은 8세기부터 불상 내에 복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유물로는 10세기 송나라 불상에서 복장이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 ‘腹藏(복장)’이라는 말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 처음 나오는데, 실제 유물도 대부분 고려 불상에서 확인되었다. 

그런데 1척, 곧 30센티미터 아래의 작은 불상이나, 석불 및 금속불 역시 제작기법상 복장 마련이 쉽지 않다. 이런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 배와 가슴의 복장이 아닌 다른 자리를 찾게 되었으니 바로 대좌(臺座)이다. 대좌란 ‘불상이 앉은 자리'인데 크고 높으니 자연히 불신(佛身) 복장에 비해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가 수월하다. 유물로 보자면 산청 내원사의 ‘석남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대좌 내에 사리를 봉안한 불상 중 가장 빠른 예이다. 이 불상은 776년작이니, 적어도 8세기부터는 이런 새로운 사리 봉안 방식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통도사 신중도(1890년) 복장낭. 이런 모습의 복장주머니가 불화 상단 좌, 우, 중앙에 걸려 불화의 위신력을 높였다.

석굴암의 석조여래좌상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뛰어난 예술품이다. 그런데 이 국보 중의 국보가 사리와 관련해 큰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 석굴암 불상의 오른쪽을 자세히 보면 엉덩이 한쪽에 금이 간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1965년 석굴암을 중수할 때 조사단은 여래좌상 대좌 주변에 엉덩이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이는 조각이 바닥에 뒹굴어 있는 것을 보았다. 조사단이 주변에 탐문하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도굴꾼이 석굴암 불상을 보고 “이처럼 훌륭한 불상에 사리 같은 보물이 봉안되어 있지 않을 리 없다” 하며 그 부분을 쪼아낸 것이라 들었다. 석불이라 대좌 윗부분에 사리가 봉안되었을 것으로 보고 엉덩이 한쪽을 떼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전 동국대 총장 고 황수영 박사의 전언). 떨어져 나갔던 부분은 조사단이 말끔히 수리했지만, 불신은 물론이고 대좌 어느 곳에도 사리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신라 사람들은 석굴암 여래상 자체가 진신사리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불상 말고 불화에도 사리를 봉안한다. 복장을 넣은 복주머니 모양의 복장낭(腹藏囊)을 불화 맨 꼭대기에 걸어두거나, 불화 뒷면에 넣어두는 것이다. 불상 복장과는 달리 사리와 발원문 등 꼭 필요한 물품만 들어간다. 또 불경에도 사리를 봉안했다. 8세기 중반의 ‘대방광불화엄경’ 사경의 권축 아래 위를 장식한 수정(水晶) 안에는 사리가 각 1립씩 담겨 있었다. 

이렇게 여러 방식으로 사리가 봉안되면서 대중들의 사리신앙 역시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이전보다 자유스럽고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일신라 이후 사찰의 발전은 분명 사리봉안의 양적 팽창과 관련이 깊다고 해야 한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32호 / 2020년 4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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