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통일신라 사리신앙의 두 모습
8. 통일신라 사리신앙의 두 모습
  • 신대현 교수
  • 승인 2020.04.21 13:14
  • 호수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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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결집 이뤄낸 신라의 핵심동력은 사리신앙”

삼국의 발전 동력원은 불교, 백제와 신라 왕실 불사리 중요성 커  
통일신라 건탑 늘고 탑돌이 유행 “탑들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네” 
654년 의상 스님이 황복사서 ‘허공 밟고 올라가 탑 돌았다’ 기록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7세기 초반만 해도 대중이 불사리를 친견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불사리를 얻으려면 멀리 인도나 중국으로 가서 모셔 와야 했고, 더욱이 중국이 불사리가 국외로 옮겨가는 것을 가능한 한 막으려 한 분위기였기에 더더욱 얻기가 힘들었다. 6~7세기에 중국에 다녀오는 사신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불사리 구득(求得)이었음은 다음의 기록에도 나온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사신이 각각 본국에 가져가서 탑을 세워 봉안할 수 있도록 사리 1매씩을 청하니,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이를 모두 허락하였습니다.”(‘광홍명집’, ‘경사리감응표’)

불사리 단 1매를 얻기 위해 삼국의 사신들이 중국 황제에게 간청했던 것이 601년의 상황이다. 불사리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 마냥 힘든 시기였다. 이는 문화유적으로도 방증된다. 우리나라에서 7세기 이전에 세운 목탑 또는 석탑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만큼 오래 되어서 남아 있지 않은 탓이겠지만 불사리 자체를 얻기 어려웠던 이유도 작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 640~650년대가 되자 상황이 일변했다. 백제와 신라 양국의 왕실이나 지도층 모두 불사리 신앙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대중에게 사리신앙을 전파하는 적극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백제에서는 무왕(재위 600~641)이 특히 익산 지역을 무대로 하여 제석사, 왕궁사, 미륵사 등을 잇달아 창건하며 일관되게 불사리 경배를 강조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신라 또한 거의 같은 시기에 자장 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모셔온 사리 100과를 선덕여왕의 적극적 후원을 받아 전국 각지에 탑을 세우고 봉안함으로써 사리신앙이 증폭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발전기에 불교가 강력한 큰 동력원이 되었던 일은 잘 알려진 역사이다. 기본적으로는 불교 교리에 담긴 높은 이상과 철학 그리고 고급문화를 접하며 사람들의 인지가 높아졌고 문화와 문명 발달이 촉진되었다. 거기다가 외래 종교인 불교를 통해 자신의 나라에 고정되었던 지리적 시야를 큰 폭으로 넓히게 된 것도 불교의 영향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 분위기 아래 사리신앙은 과연 그들에게 무슨 의미로 다가갔고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이는 문헌으로 증명할 수 없으니 불교사를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 직관으로 살핀다면, 대중의 결집을 이뤄 낸 핵심 동력 중 하나가 바로 사리신앙이었으리라고 본다. 삼국 중 신라에서 이런 경향이 가장 두드러졌고,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중국과 맞설 만큼 강성했던 고구려와 문화강국인 백제를 누르고 통일전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는데 불과 30년밖에 안 걸렸을 만큼 경이적인 국력신장을 이룬 것이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나온 사리 장엄. 692년과 706년 등 두 차례에 걸쳐 사리장엄이 봉안됐다.

통일은 오랫동안 이어진 극심한 대립을 종식시켰는데, 한편으론 사회 여러 방면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사리신앙 면에서 보면 탑이 대폭 증가하였고, 이와 더불어 탑돌이 행사가 대중화 되었다는 두 가지 현상을 짚어볼 수 있다. 먼저 절과 탑이 대폭 증가한 상황은, “절들은 별처럼 벌려 있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네”라는 시구에 또렷하게 드러나 있다(‘삼국유사’ ‘흥법’조). 이 시에 묘사된 경주 모습의 시간적 배경은 대략 8~9세기다. 절이 많았다는 것은 불교가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했다는 의미이고, 탑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불사리를 신앙하는 믿음이 그만큼 대중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는 뜻일 것이다. 탑은 불사리를 봉안하기 마련이므로, 이처럼 탑이 대폭 증가한 것은 이전에 비해 불사리를 얻는 방식과 경로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해졌음을 의미한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신라 사람들이 어떻게 인도나 중국에서 불사리를 모셔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는다. 중국은 6~7세기에 주로 인도 구법승을 통해 불사리를 얻어왔다. 중국 역시 불사리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였기에 주변 국가로의 불사리 이동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런데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는 통일신라나 왜와의 교류에 꽤 적극적이어서, 이때 불사리가 국가 간에 외교적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가 삼국시대 후반부터 일어났던 사리신앙 열풍에 따라 사찰이나 민간에서도 적극 불사리를 모시게 되면서 탑의 건립도 급증했던 게 아닌가 한다.  

“육왕(育王, 인도의 아소카왕)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매양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씩 세우게 하여 염부계 안에 84,000기를 큰 바위 가운데 숨겨두었다 한다. 지금 곳곳마다 상서가 나타남이 한둘이 아님은 이 때문이다. 진신사리의 감응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구나.”(‘삼국유사’ ‘탑상’ ‘요동성육왕’조)

어떻게 보면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묘사이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얼마나 많은 탑들이 세워졌는지, 그와 함께 사리신앙이 민간에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충분한 문헌자료인 것 같다.

경주 황복사지에서 발견된 쌍탑 목탑지 전경. 7세기 후반에 세운 석탑 앞에 자리해 있다.  석탑보다 앞서고 규모도 더 컸던 목탑지다.

‘탑돌이’ 역시 사리신앙이 만들어낸 이 시대에 유행한 문화 현상이었다. 탑돌이 자체는 인도에서 석가모니 입멸 후 시작되었으니, 퍽 오래된 습속이다. ‘화엄경’ ‘사분율’ 등 경전에도 탑돌이 의식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삼국유사’ ‘김현감호’조에 나오는, 8세기 후반 경주 흥륜사 탑돌이 행사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를 최초의 탑돌이 관련 기록으로 본다. 하지만 같은 책 ‘의상전교’조에 나오는, 654년 의상 스님이 경주 황복사에서 ‘허공을 밟고 올라가 탑을 돌았다’를 최초의 탑돌이 기록으로 봐야할 것 같다. 2019년 황복사지 발굴조사에서도 7세기의 쌍탑 목탑지가 발견되어 설화 같은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높여주었다. 목탑이라면 건축구조상 ‘허공을 밟고’ 올라가 꼭대기에서 탑돌이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리신앙이 전국에 유행한 시기를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으로 보려는 주장과도 맥락이 닿는다.

탑돌이는 탑보다는 탑 안에 봉안된 불사리에 대한 예경이다. 탑돌이 한 번 할 때마다 부처님을 직접 뵈었다는 뿌듯한 마음이 한 겹씩 쌓이는 것이니, 탑 건립의 대유행, 탑돌이 유행은 불사리에 대한 대중들의 간절한 열망이 담긴 통일신라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풍속도였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34호 / 2020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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