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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장 스님과 사리신앙의 전파

자장 스님 통도사 사리봉안, 사리신앙 확산 견인

안홍 스님, 인도의 비마라 스님 등과 576년 귀국해 큰 반향
자장, 643년 당에서 사리 100립 모셔온 건 기념비적 사건
645년 황룡사 구층탑에 사리…통도사엔 비라금점 가사도  

자장 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통도사 금강계단(국보 290호). 우리나라 사리신앙 확산의 뿌리가 되었다.

549년 양나라에서 신라로 전래된 진신사리가 신라 사회에 사리신앙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기회였다고 한다면, 27년 뒤 이어진 사리전래는 왕실과 귀족계층을 넘어서서 드디어 일반 대중에게까지 전파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진(陳)나라로 유학 갔던 안홍(安弘) 스님은 함께 공부했던 인도의 비마라 스님 등을 대동하고 576년에 귀국해 신라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얻은 진신사리를 일반에 선보임으로써 사리신앙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삼국사기’ ‘진흥왕’ 37년). 앞서 549년의 진신사리 전래가 국가 또는 정부 간 친선의 목적이 짙었던데 비해서 이번 전래는 안홍 스님 개인의 노력이 큰 몫을 했다. 이 무렵부터 사리신앙 전파는 인도·중국에서 돌아오는 구법승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그 흐름도 바뀌었다. 물론 개인으로써 진신사리를 들여오는 일은 매우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언제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때론 적잖은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진지하고 이타적인 노력들이 쌓인 덕분에 사리신앙은 그만큼 빠르고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안홍 스님은 진신사리 외에 ‘능가경’ ‘승만경’ 같은 불경도 함께 들여왔다. 이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가 촉진되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능가경’과 ‘승만경’은 돈독한 신행(信行)을 통해서라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이른바 여래장사상의 핵심 경전이다. 그런데 안홍 스님이 여러 경전 중에서 하필 이 책들을 들여온 데에 각별한 의미가 담겨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바로 사리신앙의 확산을 의도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공부할 때 눈앞에 스승이 있어야 잘 되듯이, 대중들에게는 신행의 롤 모델이나 구심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석가모니와 동일체로 인식되는 진신사리보다 더 나은 대상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후 고구려·백제·신라 등 각국에서 진신사리 전래와 사리신앙에 관련한 이야기가 부쩍 많이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643년에는 사리신앙에 있어서 기념비적 사건이 신라에서 일어났다. 자장(慈藏, 590~658) 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진신사리 100립(粒)을 가져온 것이다(‘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 자장 스님은 석가모니가 입었던 비라금점 가사 한 벌도 함께 가져와 대중들로 하여금 이 땅이 불교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자존감을 갖게 해주었다. 진신사리 수량도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그 중에 정수리사리 및 치아사리가 있었던 건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정수리는 머리 꼭대기이니 바로 깨달음의 정신이고, 치아는 입의 일부이니 곧 그 깨달음을 펼치는 설법을 의미한다. 신라 사람들이 이들을 보면서 느꼈을 환희심과 신행에의 굳은 다짐은 안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자장 스님은 645년에 경주 황룡사 구층 목탑에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아울러 사리신앙이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일부를 울산 태화사(太和寺) 탑, 양산 통도사(通度寺) 금강계단에도 넣었다. 통도사에는 특히 비라금점 가사도 모셔두었다. 그런데 이후의 뒷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왜적의 약탈을 피하려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지만 종내는 빼앗기고, 우여곡절 끝에 되찾았다가 결국 다시 다른 곳으로 분산하게 되는 등, 여러 번의 굴곡과 명암이 있었음이 전해오는 이야기다. 이는 고려 말 대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이 1379년에 지은 ‘양주 통도사 석가여래사리기’에 자세히 적혀 있다. 통도사에서 1858년에 원문 그대로 적어 넣은 현판(懸板)을 만들어 걸어두기도 했다. 이 글 중 고려시대에 개성으로 이안되었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우고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등 신라불교에  큰 자취를 남긴 자장 스님의 진영(조선시대, 통도사 소장).

통도사 진신사리에 처음 변고가 생긴 것은 고려시대인 1379년이었다. 왜군이 통도사를 향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주지 월송 스님은 급히 금강계단에서 정골사리 1매와 신골사리 4매를 꺼내고, 비라금점 가사도 함께 갖고 서울(개경)로 올라가 당시의 권력자 이득분(李得芬)을 만났다. 그가 사리를 지니고 멀리 개경으로 간 이유가 이득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대목에 잘 나온다.

“정사년(1377) 4월에 왜적이 사리를 빼앗으려고 쳐들어오기에 저는 사리를 짊어지고 절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왜적은 물러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사리를 편안히 모실 수 없을 것 같아서 모시고 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득분은 그때 병중이었다. 하지만 진신사리가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 나가 맞이했는데, 친견 후 곧바로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진신사리는 곧이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왕과 왕비 모두 예를 다하며 공경히 맞이했다. 또 태후는 진신사리를 은접시에 담아 개성 송림사에 안치토록 했다. 이때 열린 친견식 광경을 이색은 이렇게 표현했다. “나라 안의 단월 중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슬기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물결처럼 모여들었다. 친견 후 사리를 나누어 이득분이 3매, 영창군 유(瑜)가 3매, 시중 윤환이 5매, 황상이 1매, 그의 부인 조 씨가 30여 매, 천마산 스님들이 3매, 성거산 스님들이 4매씩 얻어갔다. 통도사에 진신사리가 모셔진 것은 신라 선덕대왕 때부터였으나, 500년이 지나도록 송경(松京, 개성)에 이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상전하(우왕)께서 등극한 지금 월송 스님이 불사리를 받들고 오게 된 일이 분명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월송이 가져간 것은 자장 스님이 처음 봉안한 진신사리 중의 일부였다. 위 글에는 통도사 진신사리가 개경에 오자 아래위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친견식을 성대히 베푼 장면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질 만큼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쉬운 건, 이 진신사리가 여법하게 봉안되지 않고 권세가들이 나누어 가져간 점이다. 그래도 궁중에 남은 일부 사리는 그 뒤 통도사에 돌려졌거나, 개성 부근 사찰에 재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렇다면 금강계단이 있었던 흥국사·영통사·용흥사 등이 그 유력한 장소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인간을 위해 모습을 나툰 진신사리가 제자리에 온전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지고 흩어지는 것은 대부분 인간의 탐욕 탓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진신사리는 말없이 더 큰 가르침과 믿음을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사리의 놀라운 영험 아닐까.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26 / 2020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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