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고려 왕실에서 150년간 이어져온 불아 사리 봉안의 인연
9. 고려 왕실에서 150년간 이어져온 불아 사리 봉안의 인연
  • 신대현 교수
  • 승인 2020.05.06 14:31
  • 호수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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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침략 고통, 불사리에 귀의해 치유 발원

고려 사람들 불아 사리 존숭…송나라서 이운해 극진히 모셔
1232년 몽골 침략했을 땐  황급히 개성 떠났다가 잃어버리기도
고종, 불아 사리 되찾아 탄식하니 백성들 경배의 마음 두터워져
강화도 강화읍에 있는 고려 고종의 왕릉. 일명 홍릉(洪陵)이다. 고종은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했고 이후 28년 동안 항거했다. 그 동안 팔만대장경을 조판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업적도 냈다.

고려에서는 불교가 국교라 할 만큼 널리 믿어졌기에 사리신앙 역시 보다 보편화되어 있었다. 고려는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송(宋)나라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매우 가까운 관계였기에 상당량의 불사리를 중국에서 모셔왔다.

고려 사람들은 불아(佛牙) 사리를 특히 존숭했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 1119년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극영(鄭克永)·이지미(李之美)가 극적으로 불아 사리를 모셔온 이야기에 덧붙여 150년에 걸친 그 후일담까지 드라마처럼 소개되는 데서도 그런 정황이 잘 포착된다. 

12세기에 접어들자마자 송나라는 도교를 숭상하며 민란을 일으킨 황건적 때문에 불교가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정극영·이지미가 조공사(朝貢使)로 송나라에 갔을 때도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두 사신이 귀국할 무렵 귀가 번쩍이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건적 도당의 한 패거리가 어느 사찰에 난입해 경전을 불사르고 불상을 부수며 행패를 부렸는데, 불사리만은 감히 어쩌지 못해 바다에 배를 띄워 어디든 보내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두 사신은 지체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불사리를 얻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먼저 황건적 수령을 뇌물로 달래고, 또 그 지역 담당 관리에게도 따로 돈을 주어 몰래 빈 배만 띄워 보내게 하고 불사리를 빼내어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왔다. 뜻밖에 불사리를 친견하게 된 예종(睿宗, 재위 1105~1122)이 크게 기뻐한 것은 물론이다. 불아전(佛牙殿)을 지어 봉안한 다음 바깥엔 향등(香燈)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고 늘 정성스럽게 예경을 드렸다. 이 불아 사리는 적어도 13세기 후반까지는 잘 보관되고 있었다(‘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

예종이 불아 사리를 봉안한지 117년이 흐른 1232년, 몽골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해왔다. 막아낼 힘이 모자랐기에 고종(高宗)은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했다. 그런데 너무 경황이 없어 그만 불아 사리를 놔둔 채 떠났다가, 4년 뒤 몽골군이 물러가자 고종은 잠시 강화도를 나와 개성에 들어가 불아 사리를 찾았다. 하지만 난리를 틈타 이미 누군가 훔쳐가 버린 뒤였다. 불당을 관리하던 관원들을 취조하고, 지난 4년간 관리문서를 사흘 내내 샅샅이 뒤진 끝에, 혐의는 궁중 물품관리 최고책임자인 김서룡(金瑞龍)으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그가 범행을 극구 부정해 사건은 점차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나흘째 되는 날 반전이 일어났다. 아침 일찍 김서룡이 입궐해서는 왕에게 불아 사리를 드디어 찾았노라고 아뢴 것이다. 전날 밤 한밤중에 자기 집 담장 안으로 뭔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다름 아닌 잃어버렸던 그 불아 사리함인데 사리도 그대로 들어있더라는 것이다. 
 

산동성 한상현 ‘불아앙시(佛牙仰視)’ 불아전(佛牙殿).

불아 사리를 되찾기는 했지만 그의 설명이 너무 궁생하고 거짓으로 꾸민 것이 뚜렷했다. 김서룡과 일당을 처벌하자는 논의도 나왔지만, 왕은 죄를 묻지 않고 방면토록 하였다. 궁궐 안에 불아전을 새로 짓고 봉안식도 성대히 치렀다. 신효사(神孝寺)에서 온 온광(蘊光) 등 30명의 스님이 와서 재를 베푼 다음 고위 관료들이 한 사람씩 차례로 나와 사리함을 머리에 이고 경배를 올렸다. 사람들은 함에 난 구멍으로 보이는 수많은 불사리들을 보면서 경탄했다. 재가 끝나갈 무렵 고종은 갑자기 긴 탄식을 뱉으며 말했다.

“내가 불아 사리를 잃은 후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었다. 첫째는 의상 스님이 빌려온 불아 사리가 천궁의 7일 기한이 다해 다시 하늘로 올라간 것일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불사리는 신물(神物)인데 나라 사정이 급박하여 인연 있는 안전한 나라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재물을 탐낸 소인이 함은 갖고 사리는 함부로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의심은, 누군가 훔쳐갔다가 차마 이것을 드러낼 수 없어 집 안에 감추어 두었으리라는 것이다. 네 번째 의심이 맞았구나.” 

그리고는 불아 사리를 잘 챙기지 못했음을 자책하며 큰소리로 흐느끼니, 주위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했다. 이런 분위기는 사람들의 신앙심을 더욱 자극해, 감동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이마와 팔을 연비(燃臂)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아마 고종은 불아 사리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소동을 겪은 뒤 사리 경배의 마음이 훨씬 두터워졌던 모양이다. 

고종이 탄식한 ‘천궁의 7일 기한’이란 옛날 의상 스님이 중국 종남산에서 공부할 때 하늘의 제석궁 상제에게 청하여 부처님의 치아 사리 40개 중 하나를 7일 동안 빌려왔는데, 제석천에서의 하루는 인간 세상에서는 100년이라서 700년 동안 이 땅의 사람들이 친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말한다(‘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 의상 스님이 중국 유학할 때가 632년이니, 아닌 게 아니라 불아 사리가 실종된 소동이 일어났던 1232년은 그로부터 꼭 700년째 되던 해다.  
 

예종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궁중에서 일어났던 150년에 걸친 불아 사리 봉안의 이야기가 기록된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 중 일부. 

38년 뒤 고려는 끝내 몽골에 항복하고 막대한 배상을 치른 다음 강화도를 나와 드디어 개성으로 환궁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아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불아전을 관리하던 심감(心鑑)스님이 결사적으로 지켜내 별 탈이 없었다. 1284년에는 고종의 손자 충렬왕과 왕비가 개성 묘각사(妙覺寺)에 행차하여 할아버지 때의 일을 떠올리며 불아 사리를 낙산사의 수정염주, 여의주와 함께 금탑 속에 봉안했다. 일연 스님의 제자 무극(無極)이 행사에 참여하여 이 불아 사리를 직접 보았는데, 길이가 약 3촌(寸) 가량 되었다고 한다(‘전후소장사리’). 

이런 이야기들 읽다보면 고려에서도 불사리 경배에 가장 열성이었던 계층은 왕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는 물론 왕의 개인적 믿음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불사리를 통해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 같다. 

그나저나, 불아 사리 봉안에 얽힌 이야기를 대하드라마처럼 길고 자세하게 ‘삼국유사’에 기록해 넣은 일연 스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예종이 예경한 불아 사리의 후일담들이 그저 전해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경주 기림사의 각유(覺猷) 스님에게 직접 들은 것이라고 재삼 강조한 것을 보면 평소 불사리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불사리가 영험함을 후대 사람들에게 꼭 전해주려는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 일연 스님을 만나 직접 물어보고 싶어진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36호 / 2020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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