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서양철학서까지도 섭렵했다. 탄허 스님은 불교 외적으로 역학은 물론 서양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칸트나 소크라테스 등 서양철학자들의 사상을 꿰뚫어 비판하기도 했고,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는 등 독서를 통한 사상의 보폭이 동서양을 넘나들었다. 탄허는 이 가운데 영국이 지배 철학으로 삼았던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원리로 힘이 곧 정의임을 의미했으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평등이론이 등장하면서 적자생존의 진화론은 패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론을 극복하고 소멸시킬 대안으로 불교의 화엄사상이 이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요체라고 역설했다. 특히 탄허는 ‘순수이성비판’ 등 칸
▲스님은 주역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기도 했다. “나는 학교 문턱에도 가지 않았다. ‘사서’ ‘삼경’ ‘주역’ 등 한문학을 했다. 수 백 독씩 했고 줄줄 외웠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책을 통째로 외워댈 수 있다. 한문 성경도 읽었는데 ‘성경’은 단편적으로 공부했다.” 1913년 전북 김제 만경에서 독립운동가 율제 김홍규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탄허는 1918년부터 1928년까지 10여 년간 부친과 조부 그리고 향리의 선생으로부터 ‘사서’와 ‘삼경’을 비롯해 유학 전 과정을 배웠다. 그리고 1929년 17세에 충남 보령으로 옮겨 기호학파 면암 최익현의 제자 이극종으로부터 다시 ‘시경’을 비롯한 ‘삼경’과 ‘예기’ ‘춘추좌전’ 등 경서를 수학했다.
▲탄허 스님은 ‘화엄경’을 불교의 최고봉으로 꼽았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 하시고 6년 고행을 통해 우주관과 인생관을 타파한 것은 무엇인가. 결국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최초로 3·7일간 설법하신 화엄학의 도리다. ‘화엄경’은 부처님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낸 법문이다. 49년간 법을 설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인 그림자 몸이다. 교리적으로는 같은 부처님이지만 최초에 우주관·인생관을 타파해서 설한 화엄학은 법신의 소설(所說)이요, 무지한 대중을 위해 평생 설하신 화엄학을 부연한 팔만대장경은 화신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현토역해 신화엄경합론’을 번역·출간해 우리 민족문화사에 영원히 빛날 금자탑을 쌓았다는 칭송
▲스님은 능엄경 독경소리를 들으며 입적했다. 경전 번역으로 일관했던 운허는 1952년부터 ‘능엄경’을 번역하고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후 몇 년간 동학사, 봉선사, 통도사, 해인사 등에서 학인들에게 강의하던 운허는 1956년 ‘사미율의’를 시작으로 ‘무량수경’, ‘범망경’, ‘금강경’, ‘정토삼부경’ 등 중요 경전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능엄경’ 인연은 운허가 입적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능엄경강화’에서 수행과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선종이라고 해서, 참선을 해야 되지 경만 보아 가지고는 성불치 못한다고 한다면 부처님이 경을 설하지 않았어야 한다”며 “성불하라고 경을 설했는데 왜 경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는가.
▲스님은 항상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봉일사에서 경송 스님에게 “중 노릇 잘하여 조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주면 그것도 독립운동”이라는 가르침을 듣고 계를 받은 후, 금강산 유점사로 가서 서기 일을 보며 불법을 배우던 운허는 경송의 은사 봉선사 월초 스님 뜻에 따라 봉선사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자신을 미나미 총독의 수양아버지라며 일본 경찰들을 나무라기도 했던 월초는 운허에게 “봉선사 월초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편지를 갖고 벙어리 흉내를 내도록 하는 등 일본 경찰을 피해 안전하게 올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운허는 그렇게 봉선사로 와서 월초 밑에서 본격적으로 ‘능엄경’, ‘법화경’을 비롯한 경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스님은 독립운동 중 뜻하지 않은 계기로 불교에 입문했다. 20세기 한국불교사에서 뛰어난 학승으로, 또 불경번역의 일인자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운허 스님은 ‘나라를 위해서는 애국인, 후배를 위해서는 교육인, 자신을 위해서는 수행인이면서 고금을 통한 지식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스님은 1892년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어호동 전주 이 씨 집안에서 태어나 불과 여섯 살에 한글을 깨우칠 정도로 어려서부터 영민했다. 한글을 깨치고 곧바로 일곱 살에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한 스님은 14세에 한학당인 회보제가 폐지됨에 따라, 집에서 김익진 선생으로부터 유교경전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四書)를 배웠다.
▲스님은 보조국사의 간화결의론과 원돈성불론도 애독했다. 용성 스님으로부터 ‘선정을 익히는 일이 불교수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배웠던 동산 스님은 1917년 대교과를 졸업하고 범어사 선원에 올라가 선정을 닦는데 전념했다. 이때부터 경학을 익히는 한편 꾸준히 병행하던 참선 공부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이후 10여년 동안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고 직지사에서 3년 결사까지 마친 스님은 1927년 4월 범어사로 돌아와 금어선원에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이때 스님은 선원 동쪽 대나무 숲을 좋아해 방선 시간이면 늘 그곳을 거닐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 때와 같이 대나무 숲을 거닐던 스님은 바람에 부딪치는 댓잎 소리를 듣고 활연히 마음이 열렸다. 그동안 가슴 속에
▲스님은 제자들에게 ‘신심명’과 ‘증도가’를 외우도록 했다. ‘설법제일 하동산’이라는 말이 널리 유행할 만큼 동산 스님이 법석에 오를 때면 언제나 법을 청하는 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때문에 아무리 가난한 절이라도 스님이 한번 다녀가면서 법회를 열면 3년 먹을 양식이 들어온다고 할 만큼 복을 몰고 다니는 큰스님으로 추앙을 받았다. 스님은 법문 때마다 ‘화엄경’, ‘원각경’ 등의 경전 말씀을 인용했으나, 이러한 경전보다도 옛 조사들의 가르침을 더 자주 곁들였다. 그 중에서도 중국 선종 3조 승찬 스님의 ‘신심명’과 영가 스님의 ‘증도가’를 법문 때 가장 많이 이용했고, 달마 스님의 어록과 몽산 법어도 적지 않게 전했다. 특히 스님은 매년 연초 법회에
▲설법제일로 불리기도 했던 동산 스님은 ‘화엄경’, ‘원각경’ 등 경전 말씀을 자주 인용했다. 철저한 계행에 바탕을 둔 수행인으로 성철, 광덕, 지유, 능가, 정관, 무진장 등 걸출한 제자를 길러냈던 동산 스님은 평소 보살계 법문을 할 때면 “사람마다 천진 그대로요 조금도 건드릴 것이 없으며 뚜렷하고 깨끗한 그것을 이름하여 계(戒)라 한다”며 계를 잘 지킬 것을 강조했다. 출가자는 물론 재가불자들에게도 계를 잘 지키라고 누누이 당부했던 스님은 1941년 선학원에서 개최한 유교법회에서도 다시한번 지계(持戒)를 강조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아 조사의 종풍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역설한 스님은 이때 ‘범망경’을 강설해 취처승들이 왜
▲스님의 좌탈입망 모습. 한암 스님은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7인의 교정으로 추대된 이후 조계종 창종 때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는 등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종정을 역임하면서 근대 한국불교를 이끌었다. 오늘날 조계종이 선종을 표방하며 선 제일주의에 빠져 있으나, 조계종 탄생에 크게 기여하며 종정까지 역임했던 한암은 결코 선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암은 이른바 승가오칙이라 하여 “참선, 간경, 염불, 봉사, 포교 등 다섯 가지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선중방함록 서’에서 염불과 참선이 둘이 아님을 명쾌하게 적시하고, 선문납자로 하여금 선의 본지를 깨달아 선원을 개창한 의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간절한
▲한암 스님 보조국사 ‘수심결’ 내용 중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 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을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신연비의 고행을 하고 모든 경전을 독송하더라도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아 오히려 수고로움을 더할 뿐이다”라는 대목에서 지견을 얻었던 한암 스님은 이후 수행과 후학양성 과정에서 보조 스님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이후 1903년 해인사에서 ‘전등록’을 읽다가 “한 물건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구절에 이르러 의단이 끊어지는 경지를 만나 확철대오한 한암은 금강산 장안사 지장암에서 수행하던 중 1921년 건봉사 주지 이대련 등의 청을 받아들여 건봉사 조실로 주석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
▲ 한암 스님은 제자들에게 ‘금강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25년 왜색 승려들이 설치는 꼴을 보다 못해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27년간 동구불출하며 ‘오대산 학’으로 불린 한암 스님은 1876년 3월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속성이 방 씨였던 스님은 9세에 처음 서당을 다니며 ‘사략(史略)’을 배우던 중 ‘태고에 천황씨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반고씨가 있었다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가’를 선생에게 물을 정도로 유년시절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이때부터 세상과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스님은 이후로도 10여년 동안 그 근원적 의문을 풀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