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차 수보리 선남자선여인 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시인 선세죄업 응타악도(復次 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 先世罪業 應墮惡道) 이금세인 경천고 선세죄업 즉위소멸 당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 阿縟多羅三貘三菩提) 또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다 하더라도, 전생의 죄업이 큰 까닭에 마땅히 삼악도에 떨어질 사람이겠지만, 금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벼이 여김과 업신여김을 받는 것만으로 선세의 죄업을 대신 멸하고 아울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라.악도
“1991년 출범한 한국불교법사대학은 1988년 창간한 법보신문과 더불어 불교의 발전과 변화의 시대를 함께 걸어온 도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법보시캠페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자’는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불교법사대학의 이념과 가치를 실천하는 또 하나의 불사라 생각합니다.”한국불교법사대학장 지일 스님이 법보시캠페인에 동참하며 전한 일성은 ‘도반’이었다. 1991년 6월5일 ‘대승보살의 행원을 실현하는 법사(法師) 양성’을 천명하며 출범한 한국불교법사대학은 지금까지 3000여명의 법사를 양성, 배출하며
“법보신문을 보다가 교도소에 있는 수용자가 보낸 편지를 읽게 됐어요. 신문으로 불교공부를 하고 있는데 많이 부족해 더 보내줄 수 있냐는 내용이더군요. 이렇게 부처님 법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싶었어요.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자고 다짐한 사람인데 그 간절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심동희(82. 보장화) 불자가 수용자들에게 신문을 전달하고 싶다며 법보신문의 법보시캠페인에 동참했다. 그는 “아이들을 홀로 키우며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부처님 말씀이 큰 도움이 됐다.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수용자들도 신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인 노은주 명창이 교도소·군법당·병원법당 등 소외된 곳에 법보신문을 전하는 법보시캠페인에 동참했다. 노은주 명창은 “법보시캠페인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법보신문이 불자들에게 친숙한 만큼 불자들이 더욱 쉽게 접할 수 있도록 SNS와 유튜브 등 다양한 분야로도 더욱 활발하게 소식을 전해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노은주 명창은 사단법인 한국판소리보존회 본부의 과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국판소리보존회는 대한제국시기인 1902년 설립한 성악 단체 협률사와 조선성악회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적성·성격·교육배경 등 근기에 맞추어 지도하였고[對機說法], 계율도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제정[隨犯隨制]하였다. 부처님의 교육방법처럼 마조도 제자들의 심인(心印)을 일깨워 주기 위해 쓴 방법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기설법과 비슷하다. 제자들의 질문이 같을지라도 마조는 상대방의 근기·상황·시기에 맞추어 대답이 제각각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祖師西來意]는 질문이다. 여기서 조사는 달마를 가리키는데,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중국에 온 이유는 무엇이냐?’는 뜻이다. 단순한 어구
아프다가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오래 때가 묻은손가락 두 마디만 한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좋겠다 너는,생명이 없어서아무리 들여다봐도마주 보는 눈이 없다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무엇에게도아프다가돌아오다가지워지는 길 위에쪼그려 앉았다가손을 뻗지 않았다(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한강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소설가가 되었지만, 그의 문학인으로서의 출발은 시였다. ‘조용한 날들’은 시인이 좀 아팠을 때 쓴 시이다. 아프다보
몸을 관찰하는 신념처 위빠사나의 세 번째 명상법은 ‘분명한 알아차림(sampajāna)’ 이다. 무엇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것일까? 몸의 모든 움직임과 활동, 동작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라고 한다. 그래서 이 명상법은 ‘일상선(日常禪), 일상수행’이라고 하고, 움직임명상, 동작명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분명한 알아차림’의 빨리어는 ‘삼빠자나(sampajāna)’이다. 삼빠자나는 ‘분명하게, 철저하게 바르게’라는 뜻의 접두사 ‘삼(sam)’과 ‘꿰뚫어 앎’이라는 ‘빠자나(pajāna)’가 결합한 명사이다. 그래서 삼빠자나는 ‘분명하
매일 연습했음에도 다리, 허리, 손목, 뱃속 장기들까지 아팠다. 또래 불자와 노보살님들이 아니었으면 몇 번을 그만뒀을 것이다. 삼천배를 하고 난 뒤 며칠은 힘들었지만, 마음 속에는 수행을 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아비라기도’를 알고 나서는 두 달 뒤 오직 아비라기도를 위해 매일 절을 했다. 한 곳에 모여 앉아 4일 동안 기도하려고 회사 휴가까지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수행에 심취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마음이 맞는 도반들과 함께했기에 더욱 힘이 되고 즐거웠던 기억이다.‘108배 예불대참회문’과
출가 전 템플스테이에 참여해 명상을 처음 접했던 때가 생각난다. 살면서 한 번도 마음에 관심을 가진 적도,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찰해본 적도 없었다. 마음을 바라보기 위해 눈을 감았다가 나는 너무 놀라 금방 눈을 떠버리고 말았다. 무작위로 올라오는 많은 생각을 마주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머리가 터지지 않고 지금까지 제정신으로 살아온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우리의 마음은 찰나 찰나 무상하게 변한다. 저절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생각 중에 내가 좋아하
오늘 불자님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법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가장 많이 수지독송하는 ‘금강경’을 통해 참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오직 조사관을 투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사관이라고 하면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사관이라는 것은 본래 마음, 자성 혹은 본성이라고 하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 모든 근심을 다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조사 관문을 투과하는 데는 근심 가득한 중생심이 있으면 세간에 걸려 절대 통과할 수 없습니다. 다 놓아버리고 해탈할 때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① 법장비구의 48원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르셨다, “법장 비구는 왕의 자리를 버리고, 스님이 된 분이셨다. 구원겁 전의 일.”당시의 부처님, 세자재왕불이 2천 1백만 부처님 나라를 법장에게 보여주셨다. 법장이 살피고 또 살피고, 5겁 사유 끝에 이들 나라보다 더 좋은 국토를 만들기로. 그래서 내세운 48원!-내 국토에는 지옥·아귀 등 3악도가 없을 것.-내 국토에 오려면 칠보 연꽃대좌에 화생할 것.-원하는 온갖 음식이 칠보 바루에 나타날 것.-원하는 옷이 절로 입혀질 것.-내 국토에는 칠보의 꽃나무가 무성할 것.-내 국토에는 죄악이란
우리의 꿈이 빚어낸 형상들 중에 막상 현실 속에 나타나면 우리의 애정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가령 인형과 거울 같은 물건들 말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처음부터 인간의 형상이나 행위를 모방하도록 허용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그것에 막연한 두려움도 갖고 있다. 가령 내 손끝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 할 꼭두각시 인형이 다른 누군가의 주술에 따라 움직인다거나, 혹은 거울 속의 영상이 더 이상 내 얼굴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다른 표정을 짓는다고 상상해보라. 그다음엔 저 인형과 거울 속 영상이 언젠가 나를 공격해올지도 모
앞에서 의상(625~702)의 10대 제자와 화엄 10찰의 문제를 중심으로 의상 법손들이 번성하였고, 화엄종이 신라 불교계의 주류로 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당시 불교계에서 화엄학을 연구하고 대승보살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의상의 법손들 이외에도 상당수 발견된다. 이른바 ‘비의상계’ 인물들은 의상계 법손들과 달리 종파를 형성하고 조직적인 교단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화엄학 연구가 후계자들에게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의상계 화엄종에 흡수되면서 점차 잊혀 갔다. 그런데 ‘비의상계’라는 표현은 의상계를 주류
‘관세음보살님! 이 아이를 온전히 주신다면 제가 불법을 정말 열심히 전하겠습니다.’위급한 상황이었다. 태아의 머리가 산도에 끼인 채 오도가도 못하는 채로 30분이 넘어갔다. 흡입기로 아이를 빼려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보호자들에게는 산모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응급수술 동의서를 받았다. 분만실 분위기는 초긴장 상태로 흘러갔다.“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의료기술도 지금처럼 발전된 상황이 아니다 보니 분만 중 안 좋은 결과가 심심찮게 일어나기도 했죠. 이 아이를 꼭 살리고 싶다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천수경’을 외우
항상 쉴 틈 없이 일하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경력을 좇아 새로 이직했던 회사에서도 아낌없이 열정을 쏟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직장 내 괴롭힘에 병원까지 다니게 될 정도로 매일 출근하는 것이 너무 힘겨웠을 때, 문득 템플스테이를 하고 싶어 혼자 낙산사를 찾았다. 모태불교였기에 절에서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홍련암으로 새벽 예불을 하러 갈 때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파도소리가 마치 천둥번개가 치는 것처럼 크고 무섭게 들려 주춤거리게 했다. 하지만 진짜 천둥번개도 아닐뿐더러 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낙화(落花)’를 읽던 소녀의 두 눈이 반짝였다. ‘어쩜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감탄했다.
“저는 불교가 종교라기보다 삶을 살아가는 데 방향을 제시하는 세상의 등대라고 생각합니다. 법보신문은 불교계 신문으로 포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보신문이 더욱 널리 전해져 세상 모든 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서로를 위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전북 진안 금당사(회주 원행 스님) 신도 최윤호(법명 각현) 불자가 법보신문 법보시에 동참하며 이같이 말했다. 최 불자는 1995년 전북불교회관에서 근무하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이때 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과도 인연을 맺어 지금도 명절 때면 스님
“불교가 오늘날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법보시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셨고, 그 법을 받은 제자들은 다시 그 제자들에게 진리의 길을 전했습니다. 대승불교에 이르러 법보시는 더욱 강조돼 ‘금강경’에서는 부처님 법이 설해지는 곳은 불법승 삼보를 모신 곳과 같다고 했습니다. 불자라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삶의 무게에 지친 모든 이들이 희망을 갖도록 법보신문에 담긴 부처님 가르침이 널리 전해지길 기원합니다.”조계종 전 불학연구소장 정운 스님이 법보신문 법보시 캠페인
“… 이러한 모든 것(경전)들 가운데 여러 경전의 핵심을 하나로 꿰뚫은 것은 오직 이 기신론뿐이다.”(은정희 역주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중에서)마명(馬鳴) 스님은 “중생들이 불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릇됨이 없이 여법하게 실천수행” 하도록 이끌고자 ‘대승기신론’을 썼다. 교계에서는 ‘불교 입문서’로 알려져 있으나 ‘대승기신론’의 마지막 장까지 독파하기란 여간 녹록하지 않다. 대승불교의 반야, 공(空) 사상과 유식 철학을 통하지 않고는 이 명저의 핵심어 ‘진여일심(眞如一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망망한 ‘기신론의 바
오늘 주제는 대부분의 입시설명회 주제와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나와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법’은 잘 실천하면 분명히 아이도 행복하고 기도하는 부모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입시를 앞둔 자녀와 부모인 자신을 위해서 어떻게 평화로운 마음을 간직하고 유지해서 아이가 시험을 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간단하게 제 소개를 먼저 하겠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2012년에 범어사로 출가를 했습니다. 범어사승가대학과 율학승가대학원을 졸업한 후 부산 영도 해련사에서 수행하다가 지난해 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