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행적과 저술편년을 통해 불교사상의 변화과정을 추구할 때 두 번째에 해당되는 시기(신역경전의 전래와 ‘대승기신론별기’)는 진덕여왕4년(650)~태종무열왕8년(661)으로서 원효 나이 34~45세 무렵이다. 이 기간 원효는 새로 전래된 ‘유가사지론’을 중심으로 신역경전, 그리고 신역경전으로 인한 당 불교계의 파동소식을 접하며 국제불교에 대한 안목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당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불교계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당 유학을 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덕여왕4년(650) 원효가 의상과 시도한 당 유학은 실패했고, 이후
원효의 저술편년을 통해 불교사상의 변화과정을 추구할 때 어려운 문제가 저술의 종류와 분량에 대한 이해부터 혼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원효 저술의 목록작성이 추진되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근거가 된 장소록(章疏錄)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어떤 것에 의거할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목록 작성자의 견해 차이 못지않게 근거하는 자료 자체의 기술이 모호한 곳이 많은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원효의 저술이 몇 부 몇 권이라는 것을 확정할 수 없다. 그 결과 저술의 종류는
원효의 행적과 불교대중화운동,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추적한데 이어 저술과 불교사상을 검토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이 장절의 제목을 ‘동아시아 불교역사상의 원효불교’로 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원효의 행적과 사상의 이해를 추구하는 역사학자나 불교학자들의 관점과 접근방법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첫째는 원효 행적에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오해로 이미 6회에 걸쳐 이것에 관한 자료들을 검토했다. 결과를 종합하면, 원효 행적 가운데 특히 불교대중화운동을 주목하고, 주된 교화 대상이 평민과 노비와 같은 피지
원효 자손 가운데 이름이 전하는 인물은 아들 설총(薛聰)과 손자 설중업(薛仲業)이다. 그 가운데 설중업은 36대 혜공왕 15~16년(779~780) 일본에 사절단 일원으로 다녀왔으며, 40대 애장왕대(800~809)에 원효 유문(遺文)을 수집하고 고선사에 원효 소조상과 서당화상비를 조성하는 등 현창사업을 추진하였던 인물로 알려졌다. 그런데 ‘삼국사기’권46, 설총전 말미에는 설중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일본국 진인(眞人, 제1급의 성씨로 일본어 발음은 마히토)이 신라 사신 설판관(薛判官)에게 주는
원효는 태종무열왕 8년(661) 45세 즈음 당 유학을 가던 중에 무덤 속에서 깨달음을 체험하였고, 이어 요석공주를 만나서 설총을 낳고 환속하여 거사가 되었다. 그 뒤 문무왕대(661~681) 20여년 동안은 원효 생애의 전성기로 불교대중화운동과 불교사상체계 수립에 매진한 시기였다. 이 기간 쟁관법(錚觀法)을 만들어 엄장(嚴莊) 같은 화전민을 교화했고, 사생아로 태어난 불구의 사복(蛇福)과 어울리고, 그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주기도 하였다.다른 한편으로는 경전연구에 몰두하여 100종 가까운 저술 대부분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원효의 활
태종무열왕 8년(661) 원효의 45세 즈음 무덤 속에서의 깨달음과 요석공주와의 만남이라는 두 사건은 그의 불교적 삶의 방향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20여년 동안 원효는 저술활동과 대중화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서는 민간에 전승되는 설화를 모은 향전(鄕傳)을 인용하여 대중화운동의 모습을 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뒤부터 속인의 의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으므로 그 형상을
신라 역사에서 원효가 출생한 26대 진평왕 39년(617)부터 입적한 31대 신문왕 6년(686)까지 70년간은 정치적으로 삼국통일이라는 공전절후의 격변기였으며 사상적으로 유교가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대두되고 다양한 불교사상들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모색되던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인 면에서 원효의 청소년기 43년간은 삼국항쟁과정에서, 장년기 16년간은 백제・고구려 멸망과 당나라 세력의 축출과정에서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노년기 11년간은 신라가 통일국가로서의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전제적인 왕권을 강화하여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역사적 인물로서 원효(617~686)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26대 진평왕・27대 선덕여왕・28대 진덕여왕・29대 태종무열왕・30대 문무왕・31대 신문왕 등 무려 6대의 국왕을 거치는 동안 신라는 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원효의 불교적인 삶도 그에 못지않은 여러차례의 전기를 맞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온몸을 던져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원효의 출가 전 행적에 관한 자료는 전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어릴 때 이름이 군부대의 이름인 서당(誓幢)이었다는 점을 들어 젊은 시절 일시적이나마
한국불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신라의 원효를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00년대 초기부터 원효는 주목을 받아 저술들이 수집 정리되기 시작하였으며, 최근에는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추진되어 적지 않은 분량의 저서와 논문이 축적되었다. 특히 원효의 저술 발굴과 주석 작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화쟁(和諍)’과 ‘일심(一心)’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에 관한 연구도 상당한 진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에 관한 연구에 비하여 역사적 연구는 부진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신라는 26대 진평왕(579∼632)과 27대 선덕여왕(632∼647) 때에 국왕의 권위 강화에 기여하는 왕실불교가 완성되어 가는 한편 그러한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의 대중화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왕실불교‧대찰불교의 한계와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대중불교‧가항(街巷)불교가 새로 대두된 것이었다. 불교대중화의 선구자로서 혜숙은 시골의 농촌에서, 혜공은 골목 거리에서, 그리고 대안은 시장 장터를 무대로 하여 각각 일반 서민들을 대상으로 불교를 포교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들은 단순한 불교의 포교사‧전도사
신라는 27대 선덕여왕대(632~647)에 이르러 국가의 총체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바로 앞선 진평왕대(579~632)는 대내적으로 왕권의 강화와 지배체제의 정비를 서두르는 한편, 대외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평왕은 54년간의 장기집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서 왕위계승 문제로 정치적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왕실과 귀족세력의 타협으로 가까스로 맏딸인 덕만이 즉위하여 선덕여왕이 되었으나, 실제 국정은 여왕을 대신하여 종실의 원로대신 을제(乙祭)가
신라는 24대 진흥왕대(540~576)에 병부를 강화하고 군사조직을 정비하면서 적극적인 대외팽창정책을 추진하여 낙동강유역과 한강유역으로 영역을 크게 확장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런데 26대 진평왕대(579~632)에는 대외적인 확장정책보다는 대내적인 지배체제의 정비에 주력하여 왕권강화와 중앙행정관서의 설치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어 신라 국가체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지배체제의 정비에 상응하여 골품제도라는 신분체제가 고착화되면서 지배계층과 피지배층과의 단층이 벌어지게 되었고, 지배층 안에서도 정치권력에서 탈락되거나 소외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