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서 나당동맹협정이 체결된 것은 삼국통일전쟁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사실은 신라인들에게 크게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말기 최치원이 찬술한 ‘성주사낭혜화상비명’에서 구체적으로 특필하였던 내용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춘추의 대당외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동맹협정의 체결을 전후하여 다양한 문화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김춘추는 당에 도착하자, 먼저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에 참관하기를 요청하여 당 태종의 허락을 받았고, 군사
7세기 중반 즈음 달성된 삼국통일은 신라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의 전체 역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삼국통일이 고구려・백제・신라 3국 가운데 국가의 발전이 가장 뒤떨어졌던 신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3국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각 나라의 전성기를 맞게 하였던 국왕들을 비교하면, 고구려의 19대 광개토왕(391~413)과 백제의 13대 근초고왕(346~375)에 견주어 신라의 24대 진흥왕(540~576
신라의 특수한 신분제도 골품제(骨品制)는 고대사회의 실태를 잘 나타내는 핵심적인 주제어다. 골품제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일반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가 별도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법흥왕대 율령체제 성립으로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었다. 신라사회는 골품 등급, 즉 신분 등급에 따라 정치적 지위가 결정됐을 뿐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었다. 골품제는 왕족인 성골과 진골, 중・하위 귀족인 6~4두품, 평민에 속하는 3~1두품 등 8등급으로 구성되었으며, 관청이나 귀족들에 예속된 노비는 골품제에 포함
한국고대사 기본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역사를 3기로 구분한 점은 일치하지만, 시점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삼국사기’는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36대 혜공왕대(765~780)를 ‘중대(中代)’로, 그 이전과 이후를 ‘상대(上代)’와 ‘하대(下代)’로 구분하였다. 반면 ‘삼국유사’는 23대 법흥왕대(514〜540)~28대 진덕여왕대(647〜654)를 ‘중고(中古)’로, 그 이전과 이후를 ‘상고(上古)’와 ‘하고(下古)’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시기구분은 ‘삼국사기’ 편찬자 김부식이 유교사관에 의
28대 진덕여왕(647~654)에서 29대 태종무열왕(654~661)으로 왕위가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대사건이었다. 이러한 시기구분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일치된 주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구분의 기준이 왕통의 변화, 즉 왕실의 신분이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강등되었다는 점에서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그런데 두 역사서 모두 성골과 진골의 구분 기준이나 이유에 대해 일체 설명이 없으며, 특히 성골 신분에 대한 설명 자료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그 구분의
27대 선덕여왕대(632~647)에 이어 28대 진덕여왕대(647~654)도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연합의 과두체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에서 용수·춘추 부자는 국왕의 측근 인물로서 착실하게 정치권력을 강화해 가고 있었다. 먼저 선덕여왕대 용수는 26대 진평왕의 사위이자 여왕의 제부로서, 그리고 왕궁과 왕실의 관리 책임을 맡은 내성사신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실추된 여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국가적인 불사로써 국가불교를 대표하는 자장과 함께 황룡사의 9층목탑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인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자로서 진덕여왕대
27대 선덕여왕대(632~647)와 28대 진덕여왕대(647~654)는 귀족연합 지배체제로 국왕권력이 약화된 반면 종교적 신성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선덕여왕대는 왕실 최고원로인 을제(乙祭)가 섭정을 담당하고, 상대등 수품(水品)과 내성사신 용수(龍樹) 및 서불한(이벌찬) 사진(思眞) 등이 주도하는 과두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선덕여왕 말년 상대등 비담(毘曇)의 반란을 계기로 주도세력이 바뀌어 진덕여왕대는 상대등 알천(閼川)을 대표로 임종(林宗)・술종(述宗,竹旨아버지)・무림(武林,慈藏아버지)・염장(廉長)・유신(庾信) 등이 참여하는
26대 진평왕(579〜632)은 54년이라는 오랜 기간 재위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왕권강화와 대당친선외교에 성공하고, 중앙행정관서의 정비, 왕궁의 관리와 수비 기구의 설치, 군사조직의 정비 등 지배체제의 정비를 서둘러서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두지 못한 것이 말년에 가까워 오면서 새로운 정치적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딸만 2인을 두었는데, 큰 딸 덕만은 왕위를 이어 선덕여왕이 되었고, 작은 딸은 진평왕의 4촌 아우인 용수와 결혼하여 김춘추를 출생하였다.진평왕 말년 즈음의 정치적 불안은 결국 53년(63
신라 ‘중고’시기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기틀을 마련한 23대 법흥왕(514~540)을 이어 왕권 강화와 지배체제 정비를 정력적으로 추진하여 3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한 것은 24대 진흥왕(540~576)과 26대 진평왕(579~632)이었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자로 그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立宗)갈문왕,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었다. 이러한 근친혼은 3촌 숙질 관계로써 권력을 다른 가문과 나누지 않으려는 정략결혼의 결과였다. 진흥왕 즉위 당시 7세의 어린 나이로 모후가 섭정을 맡고, 왕과 같은
신라의 불교공인은 3국 중 가장 늦어서 23대 법흥왕 14년(527)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150여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늦은 것은 아니었다. 13대 미추이사금 2년(263) 고구려 승려 아도가 일선군(선산)의 모례(毛禮)에게 와서 불교를 전도하였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설화이지만, 김씨가 왕위세습권을 확립한 때인 17대 내물마립간 26년(381)에 중국의 북조왕조인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하여 호불군주로 유명한 부견(苻堅)을 면대케 하였던 사
28대 진덕여왕대(647〜654)는 선덕여왕 말년 일어난 비담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혈투를 계속하였고, 친당정책의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는 당과의 군사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 정치와 문화의 개혁을 추진하여 다음에 등장하는 강력한 중대왕권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진덕여왕대 김춘추가 주도한 정치와 문화의 개혁내용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것은 중앙 행정관서의 정비와 새로운 운영원리의 모색이었는데, 이것은 왕권강화의 차원을 넘어
26대 진평왕대(579~632)는 대내적으로는 노리부(弩里夫)와 수을부(首乙夫)가 연이어 상대등으로 취임해 왕을 보좌함으로써 왕권과 귀족세력이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가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혈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백제는 성왕의 피살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 국력을 회복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분쟁은 있었지만, 격렬한 전투는 없었다. 이로 인해 비교적 정치적 안정을 이루게 된 신라는 대내적으로 지배체제 정비를 서두르는 한편, 대외적으로 불교를 중심으로 한 중국문화 수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