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辛丑)년이 밝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힘겨웠던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왔습니다. 경자(庚子)년에서 신축(辛丑)년으로 우주의 기운이 바뀐 만큼 올 한해는 불행보다는 행복이, 슬픔보다는 기쁨이 가득하길 바라봅니다.올해 신축년은 흰 소의 해라고 합니다. 신(辛)은 금(金)으로 흰색을, 축(丑)은 12지간의 동물 중 소를 뜻합니다. 그래서 흰 소의 해라고 합니다. 우리 문화에서 소는 고집이 세고 어리석은 측면도 있지만 대체로 풍요, 부유함, 길조, 의로움, 자애, 여유, 우직함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여행은 어느덧 우리 삶에 일상이 되었다. 관광이나 휴양으로 시작된 여행이, 역사적 자취나 유적과 인물의 흔적을 쫓는 인문학 기행으로 확대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재앙 속에서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여행도 크게 위축 됐다. 그저 집에 박혀 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며 또한 국민적인 미덕이 되고 있다. 말 그대로 여행의 빙하기라 할 수 있다.이런 시기에 특별한 여행을 권하는 책이 나왔다. ‘조용헌의 영지순례(靈地巡禮)’다. 일단
우리나라 문학계에 처음으로 선시(禪詩)의 세계를 개척해 알렸던 석지현 스님이 ‘선시 삼백수’를 펴냈다. 선의 정수를 가장 잘 드러낸 중국과 한국의 대표 선시 300편을 가려 뽑은 선시 모음집이다. 중국의 선시 219편, 한국의 선시 81편 등 선의 세계를 깊이 함축하면서도 시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을 엄선해 실었다. 선시 제목은 번역하지 않고 그냥 원제(原題)를 살렸고 원제가 없는 것은 원문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 붙였다. 내용 안에는 각각의 선시에 대한 친절한 해석과 더불어 출전을 밝혔고, 용어 설명과 함께 독자들의 안목을
적습성성(積習成性)은 ‘대지도론’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습관이 오래되다보면 그게 바로 본성이 된다는 말이다. 습관은 좋은 습관도 있고 나쁜 습관도 있다. 다만 어떤 습관을 들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나 품성이 달라진다. 좋은 향을 피우면 몸에 향기가 배고, 생선과 함께 있으면 생선냄새가 몸에 배는 것과 같은 이치다.거듭된 습관이 본성이 되는 것이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가정과 사회, 정치와 종교계,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올해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국난 속에서 각 종교가 보여준 모습들은 지난 과거 쌓아온 습관이 어
프랑스 교사가 목이 잘린 채 발견됐다.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자료를 사용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일주일 뒤에는 성당에 온 60대 여성을 포함해 3명이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테러가 발생해 2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무슬림들이 저지른 보복이었다.이런 잔악한 행위가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특정종교에서 신성시하는 인물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로 포장돼서는 곤란하다. 사상이나 관습에 대한 배려 없는 풍자는 조롱이며 폭력이다. 프랑스 정부가 이런 비열한 조롱을 언론의 자유로 호도하는 이상 살육
나락이 영그는 가을 길을 걷습니다. 코로나19로 고통 받는 국민들 시름을 덜기 위해 스님과 불자들이 함께 원력을 세워 걷는 자비순례. 그러나 걷는 내내 자연이 베푸는 자비에 결사대중의 눅진 번뇌가 씻겨갑니다. 바람은 가볍게 불고 하늘은 청명하고 따스한 햇살에 대지는 노랗게 더러는 붉게 물들어갑니다. 길을 따라 늘어선 벼들은 가득 여문 결실들을 간직한 채 순례대중을 경배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오고야마는 계절처럼 우리가 겪는 국난 또한 순례대중의 원력이 영글면 절로 시간의 뒤안길로 물러날 겁니다. 우리의 걸음걸음이 약사여래부처님의
티베트불교는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이 시대의 성자, 달라이라마 존자 때문이다. 달라이라마의 울림 있는 가르침과 고귀한 삶은 많은 이들의 불성을 고양시키고, 존경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티베트불교는 슬픔을 한자락 깔고 있다. 중국에 나라를 빼앗기고 인도 다람살라에서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라마의 고단한 삶과 티베트 난민들의 나라 잃은 설움은 일제강점기의 식민시대를 거쳤던 우리에게 과거 아픈 기억을 일깨워 묘한 동질감을 일으키기도 한다.티베트불교의 상황은 비극적이지만 역
아이가 눈이 아프다고 했다.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다가 최근에는 학원 강의까지 온라인으로 듣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눈이 아프지 않을 재간이 없을 터였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의 삶이 애잔했다. 약육강식 같은 교육환경에 마음껏 뛰어놀 수도 없었는데, 이제 밖에 나가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 돼버렸다.학교는 덧셈뺄셈만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또래 아이들과 교류하며, 소통과 협력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쌓아가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배움의 과정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지 않다. 종말은 지구의 주요 부분에 이미 도달해 있다. 우리가 믿을 수 없는 특권과 사회적 단절의 거품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종말의 예측이라는 사치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테렌스 맥케나, 식물학자)종말이 있을까? 과거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했겠지만 이제는 인류의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종교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하는 이야기야 유사 이래로 반복되는 이야기이니, 웃고 넘기면 될 일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말이라면 다르다. 인류가 종말로 향해간다는 과학적인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 특
대승불교의 핵심대의를 담은 경전으로 ‘화엄경’을 빼놓을 수 없다. 통일신라 전후 한국에 전래된 이후 한국불교 교학의 최고봉은 단연 ‘화엄경’이었다. 한국 역사상 가장 빼어난 선지식이었던 의상·원효 스님은 중국의 화엄을 뛰어넘은 위대한 화엄법사들이었다. ‘화엄경’은 전래 이후 한국불교 신행의 대표경전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화엄경’은 분량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선지식의 친절한 해설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경전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불자들에게 ‘화엄경’은 선뜻 접근하기 어려운 경전으로 인식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불교는 어렵고 무언가 염세적인 종교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하게 접하는 ‘반야심경’만 해도 본래 없으며 또한 전부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만이 초지일관 이어진다. 그래서 자칫 삶의 부정으로 이해되기 쉽다. 불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인 공(空)에서 세상의 덧없음을, 무상(無常)에서 결국 소멸돼야 할 삶의 슬픔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다. 불교에 대한 이런 이해들이 그저 믿고 따르면 천국으로 가는 종교와 달리 철학적이고 깊이 있으며 심오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또한 현대인
코로나19에 감염돼 치료를 받고 퇴원한 전광훈 목사가 퇴원하자마자 순교(殉敎)하겠다고 밝혔다. 전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는 사랑제일교회와 이들이 참석한 광화문 집회로 인해 코로나19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국민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사태에 대해 일말의 반성이나 사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전 목사가 순교를 언급한 이후 포털사이트에서는 순교가 검색어 1위에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졌다.순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죽을 순(殉)에 가르침 교(敎)이니, 따르는 가르침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극한의
“일부의 몰상식이 한국교회 전체의 신망을 해치고 있다. 예배가 마음의 평화를 줄 수는 있지만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지는 못한다.”문재인 대통령은 목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제일교회로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확산은 불과 2주 만에 1000명을 넘어섰다. 극우세력이 함께 주도한 광화문집회를 통한 감염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수도권과 지방의 크고 작은 교회에서의 코로나19 확진사례도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이런 사태에 대해 대통령은 목사들의 책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황당했다.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지구촌이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동토의 땅 시베리아는 섭씨 38도가 넘는 폭염으로 얼음이 녹고 크고 작은 산불로 유래 없는 재앙을 맞고 있다. 유럽 또한 알프스 빙하가 녹고 동북아는 계속된 폭우로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재난 앞에 망연자실한 상태다. 코로나19로 미증유의 고통을 겪고 있는 와중에 닥친 자연재해들은 지구가 종말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현실로 바짝 당겨놓았다.이 모든 것들이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시작된 자연에 대한 탐욕스런 착취의 결과물들이다. 땅과 바다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오염되고 파괴되고 있다
‘도끼나물’이라는 말이 있다. 고기를 이르는 말이다. 한참 커야할 동자승을 저자거리 신도 집에 보내 고기를 먹여야 할 때, 병든 도반의 치료를 위해 고기가 필요할 때 고기라는 말을 차마 못하고 ‘도끼나물’이라 조심스럽게 부른다. 그래서 ‘도끼나물’이라는 용어에는 육식에 대한 죄스러움, 민망함 등 다양한 의미가 함축돼 있다. 불교는 불살생계를 중시한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말라는 의미를 넘어 모든 생명의 목숨을 중시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불교는 육식에 부정적이다. 그러나 경전에 나온 삼정육(三淨肉)을 예로 들며 부처님께서
날마다 걸었다. 틈틈이 걷고 마음으로 매일 걸었다. 지난겨울 상월선원의 천막결사는 혹독했다. 아홉 스님들의 목숨을 건 정진력은 수행에 대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인고의 겨울을 나고 코로나19의 어수선한 봄을 보내고, 상월선원 정신을 잇는 두 번째 결사가 발표됐다. 인도만행결사였다. 인도만행결사는 인도로 떠나, 부처님께서 수행하고 전법했던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45일에 걸쳐 1080km를 순례하는 구법의 여정이다. 척박한 인도의 땅과 기후를 견디며 매일 30km를 걷는 고행의 길. 그 길에 서겠다고 결심한 순간 순례는 시작
“모든 분들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 달라. 모두 안녕.”7월9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필로 눌러쓴 유서에는 삶에 대한 회한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이 피처럼 배어있다. 그의 삶은 다면적이었다. 인권변호사에서 사회운동가로, 정치인으로 변신의 폭은 컸다. 그러나 앞에 붙은 수식어만 다를 뿐 삶은 일관됐다. 평등하고 바르고 살기좋은 세상을 지향했다. 사람과 환경, 동물의 복지에 이르기까지
훈습(薰習)은 불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다. 범어(梵語) ‘바사나(vāsanā)’를 한역한 것으로 어떤 냄새가 몸에 배는 것을 뜻한다. 좋은 향을 피우면 좋은 향기가 몸에 배고, 생선과 함께 있으면 생선의 비린내가 몸에 배는 이치가 훈습이다.훈습의 의미는 가치중립적이다. 맑고 투명한 마음과 선하고 진솔한 행동들은 좋은 습관으로 이어져 훈습돼 몸에 쌓인다. 나쁜 마음과 독한 행동들은 또 그대로 쌓여 그 사람의 졸렬한 인격과 못된 습관들을 형성한다. 그런데 훈습은 꼭 스스로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훈습은
미국에서는 연간 4만명이 총기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총기난사와 같은 비극적 범죄도 수시로 일어난다. 총기사고가 늘어나면 겁에 질린 국민들의 총기구입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총기사고를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정부가 개인의 총기를 거둬들이고 더 이상 총기구입을 못하도록 규제하면 된다. 그런데 미국서는 이게 불가능하다. 총기회사의 공격적인 로비에 길들여진 정부와 정치권이 현실을 애써 외면해 버린 결과다.인종이나 종교, 성적지향성에 따른 차별과 혐오를 금지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미국의 총기규제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차별금지법은 2007
대학시절 수업 중에 ‘포교론’ 강의가 있었다. 강사는 선진규 법사였다. 한 학기 강의였는데 수업이 끝날 때까지 모두들 교수가 아닌 법사님으로 불렀다. 그는 개인적으로 동국대 불교학과 선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선배님으로 부르지 못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호칭은 언제나 법사님이었다. 평생을 법사님으로 불린 그는 6월8일 86세의 나이로 세연을 접었다. 중생구제와 대중포교의 원대한 꿈을 펼쳤던 김해 봉화산 정토원에서 조용히 아미타불 회상으로 향했다.법사(法師)는 그의 인생을 응축한 언어 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