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빛 나는 보석이 박힌 보관을 쓰고, 목걸이를 하고, 허리와 목을 꺾은 삼곡(三曲) 자세를 취해 부처님을 시봉하고, 왼쪽 팔뚝에는 끈을 묶어 고귀함을 상징하고, 오른쪽 손에는 하얀 연꽃을 들고 아래를 그윽하게 내려다보시는 보살의 시선은 거룩한 침묵 속에서, 온 중생들을 연민해 마지않는 대비(大悲)의 모습 그 자체이다.’(각전 스님 저서 ‘인도 네팔 순례기’ 중)‘인도 서부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의 아잔타 석굴(Ajanta Caves)에 들어섰다. 가로 35.7m, 세로 27.6m 규모의 제1굴. 중앙광장을 둘러싼 20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토요일 오전. 서울 수국사 대웅보전 앞 산수유 나무가 오랜만에 빗물을 머금었다. 노란 꽃망울에서 빗물이 톡 떨어지자 법당에서 주지 호산 스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러분! 비가 와서 오기 힘들었죠? 그래도 봄비는 참 좋아요. 우리에겐 불편하지만 꽃과 나무에겐 간절했을 물이었겠죠. 내겐 좀 불편한 일이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일들이 있어요. 나의 불편함을 참고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행복도 있고요. 우리 청년들이 그 행복을 알아갔으면 해요. 봄비 내릴 때 싹 트고 꽃 피우는, 우리 그런 인연이 돼 봅시다!”호
부여 무량사 금동아미타불좌상은 도난된지 28년 만에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무량사 5층석탑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의 아미타삼존불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1989년 7월13일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있는 무량사 주지실에 복면을 쓴 강도 두 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주지스님의 얼굴을 가리고 손과 발을 테이프로 묶어 움직일 수 없게 한 뒤 산소용접기로 금고를 해체해 보관중이었던 금동아미타삼존불상과 금동보살좌상, 청동사리구, 청동합, 보살문원판, 동경 등 여덟 점을 모두 훔쳐갔다. 다행히 아미타삼존불상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올해만큼 이 말이 실감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되돌아보면 올해는 출가 전 세월보다 출가 후 세월이 더 많아지는 첫해다. 태어나 출가자로 살았던 삶이 재가에서 살았던 시간들보다 많아지는 나이가 되니 지난 시간들을 한참 뒤돌아보았다.처음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설 때 정말 서슬 푸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출가의 삶을 전혀 모른 상태로 무작정 나서면서 출가는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은행 통장을 없애고, 신용카드를 구겨버리고, 심지어 운전면허증까지 가위로 잘라버리고 딱 주민등록
오산(鼇山)에서 떠오른 달이 휘어진 섬진강을 넘어가려 한다. 밤새 내려앉은 11월의 달빛에 암자의 새벽은 더 깊어진다. 멀리 내다보이는 산하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완전함과 온전함 사이의 간극을 체득한 때부터 시작됐다.1998년 태국으로 떠났다. 선방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완벽한 낯섦에 자신을 떨어트려 거기서 이는 파문을 안아보고 싶어 떠난 길이었다. 정한 곳은 없다. 발 닿은 데로 가고 싶었던 곳이다. 날 것 그대로 보고 싶어 큰 사원을 지나 산속 깊
내장사 대웅전이 전소됐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법당에 휘발유로 추정되는 인화물질을 끼얹고 불을 지른 범행자가 50대 초반의 사미라는 사실에 아연실색해질 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점이다. 내장사가 속해 있는 조계종 24교구본사 선운사는 화재 직후 국민에게 참회했다. “9년 전 화재로 소실된 대웅전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완료된 수행의 근본이자 정신적 위안처였던 대웅전이 또 다시 화마에 휩싸이게 되었다”며 “더욱이 화재 발생 배경이 사찰 내부 대중의 방화로 알려져 국민과 불자님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출가수행자를 나타내는 상징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바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삭발(削髮)’일 것이다. 삭발은 그 자체로 출가를 뜻한다. 또 삭발은 번뇌를 끊임없이 끊어내는 일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 부르기도 한다. 삭발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는 일이기도 하고 또 끈질기게 달라붙는 훈습과의 절연을 뜻하기도 한다.삭발에 담긴 이런 지중한 의미때문인지 삭발에 관한 이야기는 율장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사분율’의 ‘잡건도(雜犍度)’ 가운데 그때에 어떤 비구가 머리가 기니 부처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나 행복을 꿈꾸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과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에 온전하게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병에 걸렸을 때는 병만 나으면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하고, 돈이 없어 쪼들릴 때는 돈만 생기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거야 하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갈등할 땐 이것만 해결되면 자유롭게 살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무엇인가 결핍돼 있다. 그래서 그 결핍으로부터 벗어나기만을 원하며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하고 과거는 후회나 집착 때
“대선사 영전에 운문 선사의 삼전어 법문을 공양 올리겠습니다. 어떠한 것이 진리의 도입니까? 눈 밝은 이가 깊은 우물에 떨어졌습니다. 어떠한 것이 제바종(提婆宗)입니까? 은쟁반에 흰 눈이 가득했습니다. 어떠한 것이 진리의 보배 칼입니까? 산호나무 가지가지에 밝은 달이 주렁주렁 달렸습니다.”일제강점기 단절되다시피 했던 임제 선풍의 법맥을 이어 근·현대 한국불교 선풍의 중흥을 이끈 향곡당 혜림(1912~1978) 대선사의 42주기 추모다례재가 부산 해운정사에서 엄수됐다.해운정사(조실 조계종 종정 진제 법원 대종사)는 1월30일 경내 원
고요했던 고운사에 선풍(禪風)이 휘몰아 쳤다.(1980) 통도사 극락선원, 묘관음사 길상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해 온 현봉근일(玄峰勤日) 스님(현 고운사 조실)이 주석하며 승가는 물론 재가불자들에게도 참선의 길을 열어 보였는데, 월말이면 어김없이 참선법회를 열어 철야정진으로 이끌었다. 안동대 미술학과에 입학(1979)해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청년은 2학년 때 고운사를 찾아 큰스님을 처음 친견했다. 선기 충만한 세납 40대의 근일 스님 위모(威貌)는 고산 속 설원을 활보하는 호랑이를 보는 듯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이뭣고’ 화두를 받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특수단)이 1년 2개월여의 수사 끝에 대부분의 의혹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린 데 대해 실천불교전국승가회(상임대표 시공 스님)가 수사결과를 반발하고 나섰다.실천불교전국승가회는 1월25일 ‘세월호 침몰의 진실규명을 위해 다시 촛불, 다시 세월호를 외친다’ 제하의 입장문을 발표하고 “그동안 대통령은 엄정한 검찰조사 결과를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이번 특별수사는 진실규명의 의지는커녕 최소한의 수사 성의조차 없었다는 것을 입증했다”며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해한다는 절망스런 사실을 재확인 했을 뿐”이라고 지적
국토부가 남부내륙고속철도(김천~거제, 남부내륙ktx) 건설을 추진하면서 해인사와 지역주민들의 염원을 외면하고 ‘해인사역’을 배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해인사와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해인사역’추진위원회는 정부 계획안에서 ‘해인사역’이 배제된 것과 관련해 삭발투쟁을 강행하고, 정부와 국회, 지자체에 해인사역 지정을 촉구하는 서한을 전달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해인사에 따르면 국토부는 최근 남부내륙고속철도 ‘김천~거제’구간의 노선 및 역사 선정과 관련해 전략환경영향평가(초안)을 공고하고 1월6일 주민설명회를
신축년 새해 서산대사의 스승이자 지눌 스님의 법통을 계승한 부용영관 스님 이야기가 영상으로 찾아온다.‘단’ ‘지장보살 신라승 김교각’ 등을 제작한 김행수 감독이 세미다큐멘터리 ‘부용영관 대선사’ 작업을 마치고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부용영관 대선사’는 벽송지엄 스님의 법맥을 이어 꺼져가는 조선불교의 불씨를 되살려 오늘을 있게 한 부용당 영관 스님의 일대기다. 작품은 배우 전무송, 김세홍씨가 주연을 맡아 지난해 여름과 가을 구례 화엄사, 영천 운부암 등에서 촬영했다.영관 스님은 1485년(성종16) 7월7일 경남 사천의 한 참판
“저의 장래 희망은 ‘큰스님’입니다!”초등학교 1학년 민수의 대답에 교실이 술렁거렸다. 선생님은 민수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수에게 ‘큰스님’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른스님들 대화 속 오가는 ‘큰스님’이라는 표현을 들으며 훌륭한 누군가를 말하는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민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함께 학교를 다니는 언니들이 있었고 아침마다 ‘오늘은 머리를 어떻게 묶을까’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지스님을 어머니라, 노스님을 할머니라 여겼고 학교
보설 스님(29)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출가는 자신과 무관한 일이었다. 신심 깊은 부모 밑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절을 찾는 일이 많았지만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의 꿈은 패션아티스트였다. 멋진 옷을 입고 남들에게 주목 받는 삶을 동경했다. 대학에서 ‘패션웨딩스타일리스트학과’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기에 삭발을 하고 먹물 옷을 입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불연이 찾아온 것은 군대에서 군법사 지화 스님을 만나고 나서였다.2011년 7월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꿔보겠다는
“스님, 부디 열심히 수행해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많은 이들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스승이 되어주세요.”산문에 든 지 꼭 6개월 만이었다. 삭발한 머리에 승복을 입은 아들이 낯설 만도 했지만 어머니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제 막 사미계를 받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간절함을 담아 또박또박 말을 건네고 있었다. 출가자로 살아가는 동안 어찌 그 당부를 잊을 수 있을까.2015년 8월30일 출가하던 날, 남원 실상사까지 함께 가겠다며 먼 길을 따라나섰던 어머니. 남들처럼 취업하고 결혼해 아이 낳고 사는 평범한 삶은 이제 기대할 수 없었다. 일
불교에서 출가는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2600년 전 카필라국 왕자 싯다르타가 그랬듯 낡은 생각과 묵은 습관 등 일체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위대한 결단이다. 그래서 출가는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삶의 혁명이다.불교에서 출가는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꼽혔다. 명예, 돈, 권력 등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 보다 가치 지향적이며 삶의 참 행복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이해돼 왔다. 그렇기에 출가는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겠다는 당당한 선언이며,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마주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이다. 또한
우리나라 남성에게는 국방의 의무라는 특수성이 존재한다. 때문에 군가산점제도가 시행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군복무는 대체로 남성에게만 해당하므로, 자칫 성차별의 문제를 수반할 수 있어 결국 폐지됐다. 이 과정서 여성이 제기한 주장 중, 여성만의 특수성인 출산이 대두되기도 했다.평등은 언뜻 단순한 하나의 잣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군복무와 출산의 문제처럼, 그것은 때에 따라 성에 의한 특수성이 작용할 수 있다. 또 육상이나 수영, 농구에서는 우월한 신체조건이 노력보다 경기력을 압도하기도 한다. 즉 평등은 단순이 아닌, 복합 조건 속에서
연말인데도 한 해를 잘 보냈다고 하는 뿌듯함도 없고 새해에 대한 벅찬 기대도 가질 수 없다. 너무 오래 세상이 아프다 보니 움츠린 자세를 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픔과 정면대결하면서 병을 치유하고 예방하는데 불철주야 애쓰는 의료진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눈물 나게 고맙고, 백신과 치료약을 개발해 내는 과학자들이 무척이나 위대하게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아파하고 애쓰는데, 내가 아프지 않다고 해서 그저 편할 수는 없다. 이 아픈 세상을 직접 변화시키는데 특별한 재능이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기본적으로
‘…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 (이원규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에서)산사 풍광에 매료됐거나 산중의 스님들을 동경해서가 아니었다. ‘책 한 번 실컷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 챙겨 지리산으로 걸음했었다. 매월 초삼일이면 어머니와 함께 손전등으로 어두운 길을 밝히며 고성암을 올랐던 게 불연의 전부였다. 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