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직전 글의 부록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천오백여 년 전에 살았던 규기(窺基) 스님의 어떤 한마디에다 현재의 내가 부연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유식(唯識)의 이치를 선양하는 데 모든 열정과 지성을 쏟아부었던 그 스님의 헌신만큼 감동적인 것은 불교사에서 그리 흔치 않다. ‘성유식론’ 제7권에서 유식의 이치를 방어하기 위해 그가 다루었던 외인의 힐난들은 모두 힘겨웠던 정신적 투쟁의 기록이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 간의 격렬한 비방과 반목, 상이하고 모순된 진술이 난무하는 가운데 깊은 회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몇 번의 글에 걸쳐 ‘성유식론’에 의거해서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다. 글의 주제가 처음엔 ‘가짜’로 시작되었다가 어느샌가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런 식으로 흘러간 이유를 잠깐 복기해 보겠다. 미륵의 후예들은 우리의 집착을 일으키는 강력한 힘을 ‘말[言]’에서 찾았다. 모든 집착이란 실은 하나의 빈 이름에 불과한 말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유식(唯識)의 이치를 설한다. ‘모든 말은 본래 가짜 이름으로, 진짜 실재가 아니라 가짜 환영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한 말과 결합되는 환영들
나는 올 초부터 가짜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해 오면서, 되도록 내 생각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 지난 글에선 나의 마음과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하는 나의 몸에 대해 사색하였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타자의 몸[他身]’이라는 주제로 옮겨오게 되었다. 나는 이번 주제의 독특함에 흥미를 느끼지만, 많은 사람이 그 내용에 흔쾌히 동의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긴 해도 그것 또한 미륵의 후예들만의 기이한 학문적 열정으로 도달한 결론이니, 그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저 미륵의 후예들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가면서 그
미륵의 후예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과 같다고 하지만, 또한 우리가 다 알기에는 너무 복잡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들에 따르면, 마음(제8아뢰야식)에 의해 변현되는 세계는 극히 미세하거나 혹은 극히 광대하기에 불가지(不可知)하고, 그것들을 변현해 낸 마음의 작용은 극히 미세하기에 불가지하다.(‘성유식론’ 제2권) 그런데 ‘불가지’라는 말은 실은 가짜 말이 막다른 길에 이르렀을 때 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치 꿈과 같고 환과 같다’고 하는 은유적 표현도 실은 말문이 막혀서 하는 말이요, 어떤 경이로움과 불가지함을 표현한
이번 글에서 나는 언설희론의 습기 혹은 명언종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보충하려 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습기’ 혹은 ‘종자’라는 은유적 표현이 모호하게 다가올 수 있다. 어쩌면 그 가짜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떤 환영을 가리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륵의 후예들에겐 명료하게 보였지만 우리에겐 잘 보이지 않는 어떤 환영들 말이다. 물론, 그들의 체계적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이름의 의미가 점점 분명해질 것이다. 그 대신 우리의 인내심을 압도하는 생소한 많은 동의어와 파생어를 연쇄적으로 익혀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나는 지난번 글을 “최고의 환술사는 스스로를 홀리는 범부의 마음”이라는 취지로 끝맺었는데, 그로 인해 어떤 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오게 되었다. 그 문구는 우리 자신이 마치 창조자가 된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도력 높은 불보살들도 중생 교화를 위해 환 같은 일들을 변화로 지어내지만, 그 환상에 스스로 속지 않는다. 그런데 범부의 마음은 자기가 그린 그림이 저 바깥에 존재하는 굳건하고 항구적인 세계라고 믿도록 스스로에게 강력한 주술을 건다. 미륵의 후예들이라면, 이 세계를 ‘바깥의 경계[外境]’라고 믿게 된 것은 그의 무지 때
나는 새해 들어 ‘가짜[假]’라는 주제와 연관된 몇 편의 글을 연재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것이 그 두 번째 글이다. 이전 것을 건너뛰고도 매회의 글이 그 자체로 이해되면 좋겠다. 그래서 이후로도 이전 내용을 종종 반복하게 될 것 같다.이번에는 환상(幻狀)의 세계와 그곳의 환술사(幻術師)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어떤 교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교설대로 세상을 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고, 또한 거기서 고통의 근원과 그로부터 빠져나올 출구를 찾는다는 것이다. 저 가짜에 관한 학설을 받아들인 이후로, 나는 자연스럽게 어떤 환상의 세계에
나는 산만한 정신의 흐름 속으로 문득 끼어든 어떤 순간적 접촉에 의해 무엇인가를 하기로 결심하곤 한다. 오래전 내가 아직 학위논문의 주제도 정하지 못했던 시절, 고(故) 원의범 선생님이 내가 다니던 학교로 몇 년간 외부 강의를 하러 오셨다. 그분이 어느 날 수업 중 뭔가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전해주셨다. “우리 선생님(김동화 박사)이 말씀하시길, 가짜[假]에 대해 알면 유식학을 거의 다 안 것이나 다름없다.” 초보 불교학도였던 나는 어떤 황홀감 속에서 그 말의 의미를 다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즉각 받아들였다. 그것은 마
세상의 모든 날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날짜들은 자기만의 특별한 이름을 갖는다. 며칠 전 그날은 ‘이스달 여인의 날’,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미스터리한 죽음에 경의를 표하고 기억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 한 인물이 홀연히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모든 것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고독한 방식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마치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고, 내 삶의 노고에 깃든 비밀스런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듯하였다. 그러면서도 마치 미래의 동일한 날짜가 되면 다른 누군가 다시 그
최근 들어 세상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두 가지 사물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그것은 등잔과 거울이다. 미륵의 후예들은 이 세계의 어떤 비밀스런 본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것을 자주 비유로 든다. 나 또한 같은 이유에서 그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개인적 사연을 하나 덧붙이자면,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들이 나로 하여금 내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보게 되는 이곳이 진정 어떤 곳인지 다시 사색해 보도록 만들었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뿌리 깊은 우환 의식이 다시 고개를 드는 시절에는 마치 순진한 어린아이인 양 세상은
나는 최근 들어 부쩍 나이가 들어감을 느낀다. 몇 차례 반복해서 어떤 당혹스런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의 가까운 지인이 나의 과거에 관한 것인데 내가 처음 들어보는 사실 하나를 무심코 말한다. 다행히 내게는 판단력이 조금 남아 있기에 그 말이 진실임을 눈치챈다. 그러나 곧장 의문에 휩싸인다. 그때 그곳에 있었을 리 없는 그 지인이 어떻게 나도 모르는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의 대답은 예전에 내게서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증언으로 다시 옛 기억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낯설음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인다. 말하자
나는 오래전에 ‘몸의 밀의(密意)’라고 하는 주제로 논문을 쓴 적이 있다. 그때는 유식(唯識)이라는 용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이 교리가 오직 순수한 식(識)만 있고 몸통은 사라진 존재들을 강조한 것이 아님을 부각하려 했었다. 우리의 ‘식’에 나타난 형상 중에 가장 생생하게 실감하는 것은 자기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이 변해가면서 내 생각도 조금 바뀌었다. 어쩌면 사람들의 오랜 꿈속에는 ‘보이지 않는 몸’에 대한 염원도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난번 ‘초인’에 대한 글과 마찬가지로 이번
우리의 꿈이 빚어낸 형상들 중에 막상 현실 속에 나타나면 우리의 애정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있다. 가령 인형과 거울 같은 물건들 말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처음부터 인간의 형상이나 행위를 모방하도록 허용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그것에 막연한 두려움도 갖고 있다. 가령 내 손끝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 할 꼭두각시 인형이 다른 누군가의 주술에 따라 움직인다거나, 혹은 거울 속의 영상이 더 이상 내 얼굴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다른 표정을 짓는다고 상상해보라. 그다음엔 저 인형과 거울 속 영상이 언젠가 나를 공격해올지도 모
우리가 한 번쯤 여행을 다녀왔을 이웃 나라의 최대 도시는 옛 이름 대신에 이제는 한 혁명가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는 20세기 초중반의 혹독한 시절을 겪으면서 ‘지상의 천국’을 꿈꾸었던 사람 중 한 명으로, 예전에 나는 두꺼운 그의 평전을 다 읽은 적이 있다.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가 잊히질 않는다. 타계 직전 그와 인터뷰했던 한 저널리스트가 이렇게 전했다. “그는 젊은 시절 혁명적 열정이 지나쳤을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소련에 살던 시절 실크 드레스에 하이힐 차림이라는 이유로 어떤 젊은 여자를 꾸짖은 일이 있다고 후
아주 오래전 충무로 전철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청년이 나를 붙잡고는 “내 조상들이 나를 씨종자로 삼아 안타까운 원을 실현하려 한다”고 간절히 호소하였다. 나도 모르는 나의 운명적 의무 같은 것이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한번 들어나 보자 하는 생각으로 그를 따라갔다가 결국 엉뚱한 이야기만 듣게 되었다. 그는 나의 전생과 현생에 걸친 거창한 목표, 이 우주의 놀라운 미래를 이야기했고, 또 종말과 구원의 필연성을 믿게끔 의도된 말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나의 관심사는 내 인생에 과연 어떠한 의무가 지워져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불교 문헌 속의 많은 철학적 주제를 넘나들면서 종종 시간에 대한 다양한 논증과 관념을 목격하였다. 그때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란 알려 하면 할수록 더욱 모르게 되는 것임을 되새기곤 하였다. 내가 끝내 시간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큰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나는 여전히 시간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인간의 종(種)에 머물면서, 앞으로도 계속 ‘시간이 온다’거나 ‘시간이 간다’는 식의 말을 쓰며 살아갈 것이고, 가끔은 시간에 대해 나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어떤 견해를 늘어놓을 것이
나는 대승(大乘)으로 분류되는 유식 문헌을 연구해온 사람이지만 최근에 이르러 명료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저 대승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 대적자들로부터 예상을 뛰어넘는 심한 모욕과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내가 알게 된 바로는, 대승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이런 환청에 시달렸다. ‘대승의 법은 부처님 설이 아니라 마구니 설이다. 그것을 좋아하는 너희는 정법을 무너뜨리는 사자충(獅子虫: 죽은 사자의 몸에서 저절로 생겨나 그 몸을 파먹는 벌레)이다.’ 마구니설, 사자충, 이런 말들은 불법이 혼탁해진다고 느낄 때마다 불
저 천상의 책(‘유가사지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끊임없이 굴러가는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서 죽음과 태어남은 마치 저울의 양쪽 추와 같다. 죽음의 추가 내려가면 동시에 태어남의 추는 올라간다. 나는 이전 두 편의 글에서 죽음을 다루었는데, 한 번쯤 ‘생(生)’에 대해서도 써야 균형이 맞을 것 같다. 이런 생각으로 유식 문헌들을 뒤적이고 있을 때, 매년 이맘때 남쪽의 한 도시에서 열리는 추모 행사에 관한 뉴스가 들려왔다. 나는 불현듯 이런 환상을 떠올렸다.‘그때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이 환생했다면, 강한 업력으로 다시 이 땅으로 왔을 것
미륵의 후예들 삶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내 앞에 놓인 저 어마어마하고 불가사의한 세계가 실은 모두 나의 식(識) 안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의 관념을 흔들어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제8아뢰야식이다. 나는 이전 글 곳곳에서 이 식에 대해 한마디씩 말하였지만, 이것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하길 꺼려왔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 이름을 자주 부르다 보면 필시 그것을 마치 ‘나[我]’인 것처럼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그 점을 우려하였기에 그 식에 대해 오직 밀의(密意)로만 짧게 설하였다(‘해심밀경’의 ‘
내가 대학원생이었을 때 처음으로 제바달다가 석가모니를 세 차례나 시해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의 나는 아마 석가모니 같은 성자는 항상 고요한 물과 같고, 선한 역할만 하며, 또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잘생기고 의젓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정원 뒤편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왠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 글은 그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바달다를 분석한 것이며, 현장과 연관된 문헌들에서 본 두 개의 문구 즉 ‘우유죽을 먹지 않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