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승려들의 생활규범이나 승가 체제는 당대 백장이 제정한 청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승가에서 승려들이 행하고 있는 운력[노동]에 대해 사유해 보자.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승려들의 운력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자.빨리 ‘법구경’ 게송 #77의 내용이다. 어느 때 끼따기리 마을에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 등 500명 비구들이 살고 있었다. 이 비구들은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밭을 일구며, 과일을 손수 농사지어 수확으로 생활하였고, 꽃밭을 가꾸었다. 그런데 비구들의 이런 생활 방식은 계율에 어긋
마조 문하에서 선의 획기적인 발전은 백장에 의한 청규 제정에서 비롯됐다. 청규를 제정하게 된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당시 선종 수행자들이 전통적인 율원 생활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대승불교의 실천자들이 대승계율을 무시하고 전통적인 소승계율을 따르는 모순점이 있었다. 둘째, 마조선은 일상화된 생활 실천의 선종으로서 국가권력의 보호를 받지 않았다. 또한 초기 습선자들이 스스로 경작하는 생활이나 5조 홍인·우두법융·육조혜능 등이 대중을 위해 노동을 한데서 자연히 노동과 수행을 동일하게 보았다. 이에 9세기 말 회창파불[845년]의
마조선은 백장 문하에서 임제종·위앙종으로 발전하였다. 백장에 의한 마조선 발전은 일상성의 선으로 발전하면서 선종 교단에 알맞은 변화가 필요했는데, 이 변화의 형체화(形體化)를 만든 이가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이다. 백장은 복건성 출신으로, 출가해 대장경을 열람한 뒤에 마조에게 귀의했다. 마조가 입적한 뒤에 신도들의 요청으로 대웅산[百丈山]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선풍을 전개하다 세수 66세, 법랍 47년에 입적하였다. 백장에 대해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 보자. 첫째, 백장의 교육관이다. 어느 날 제자 황벽에게 백장이 이
마조선이 전개되는 시기는 선종이 성립하고 발전하는 시대와 맞물려 있다. 마조선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 불교의 최성기라고 할 수 있는 당나라 때이다. 당시 불교는 정치적·사회적 보호정책 등으로 국가불교적인 성격을 띠면서 천태종·법상종·화엄종·선종 등 8종이 형성되었다. 교학불교의 여러 종파가 형성되어 최대의 전성기를 누릴 무렵, 당나라는 2건의 큰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불교계에 큰 타격을 입혔던 무종[在位 840∼846] 때 일어난 회창파불(845∼847)이고, 또 하나는 회창파불보다 80여 년 앞서서 일어난 안록산의 난(755∼76
첫째, 좌선과 일상에서의 수행 문제이다. 인도 선은 좌선 중심으로 선정이 발달되어 있다. 물론 아함부 경전에도 행선(行禪)이 나타나 있고, 위빠사나에서도 행선이 발달되어 있다. 움직이면서 걷는 행위나 모든 행위에 사띠(sati)를 챙기는 일상의 명상을 중시한다. 반면 중국선은 인도 선보다 한발 더 나아가 행주좌와어묵동정에서의 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일상에서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그대로가 본원 자성청정심의 발원지요, 본래심의 작용이라고 본다. 마조는 밥 먹고 옷 입는 모든 일상에 마음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마음이 곧 부처라고
당대∼오대[8세기∼10세기]는 중국불교 역사상 선의 르네상스이다. 다음 시대인 송대는 간화선이 등장하지만, 선의 발전이라기보다는 답보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연하자면, 송대까지 선과 선종이 정립되고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선종사를 개괄하면, 달마∼6조 혜능까지 선의 씨앗이 뿌려지고, 당나라 때의 선[마조계 조사선]이 근간을 형성했으며, 북송과 남송 시대에 살이 붙고 피를 통하게 한 것이라고 보면 맞을 듯하다. 이에 중국 선의 최고 정점은 당대 조사선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 한국불교도
불교는 인권 존중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축생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생명차원에서 인간과 동등하다고 본다. 경전이나 어록에서 축생은 그 축생의 특징을 통해 수행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다. 이번 주는 마조 문하의 축생에 대한 마지막으로 말‧고양이‧지렁이 등을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말[馬]에 대해 보자.초기불교 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태어나실 그 해에 상서로운 일이 여섯 가지가 있었다. 야쇼다라 공주‧아난존자 등 그리고 ‘깐타까’라 불리는 말이 포함된다. 깐타까는 부처님의 왕자 시절 명마[白馬]다. 부처님께서 출가할 때, 이 깐타까
근자 조계종에서 ‘성불하십시오’가 아닌 ‘전법합시다’로 바꿔야 한다고 할 정도로 대중 포교에 관심이 고조되어 있다. 필자가 출가했을 무렵, 불교는 선이 중심이었다. 승려는 오롯이 선방에서 올곧게 사는 모습이 ‘중 답다’고 하였고, 강원이나 동국대 수업에서도 선 위주의 수업이 많았다[선학과]. 그런데 불교에 이타(利他)가 없어서 승려들이 오롯이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조계종도 대승불교에 해당하며, 당연히 선자들의 중생 제도가 있다. 그 대표적인 이타에는 남송 시대 등장한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인 입전수수
대승불교 경전보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코끼리‧사자‧원숭이‧말‧뱀 등 다양한 축생이 등장한다. 코끼리는 경전에 충직‧충실한 이미지다. ‘법구경’에 코끼리를 주제로 하는 ‘코끼리품’이 따로 있을 정도로 홀로 고고하게 정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것에 기인해 대승불교에서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타고 있는 동물이 코끼리다. 부처님께서 코삼비 비구들의 분쟁을 피해 잠시 숲속에 홀로 머물 때, 부처님을 시봉하며 공양 올렸던 동물이 코끼리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코끼리가 홀로 숲속을 거닐듯이’라며, 고고하게 수행할 것을 말씀하고
그동안 일상에서 전개된 선사상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선문답에 등장하는 소[牛]에 대한 언급인데, 일상성의 선과 관련된다. 소는 경전이나 어록 등에 자주 등장한다. 동양의 숲속 문화와 농경사회에서 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숫타니파타’에 “자식이 있으면 자식 때문에 근심이 생기고, 소가 있으면 소 때문에 걱정할 일이 생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는 중생들 삶에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불유교경’에는 “목동이 소[牛]가 남의 곡식을 함부로 짓밟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처럼, 수행자는 5근[눈‧귀‧코‧혀‧몸]이 탐욕에 빠지지
일상에서의 선은 노동 자체를 수행의 연장, 즉 본래심에 입각한 불행(佛行)이라고 하였다. 마조의 제자인 백장회해(749∼814)에 의해 선사들의 계율인 청규가 제정되었다. 청규 내용 가운데 노동과 관련된 부분이 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와 보청법은 일상화된 선사상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 일상에서 본래심을 전개하는 움직임[動中] 가운데 고요함[寂靜], 이를 평상심의 연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분율장’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비록 승려의 규율상 제정한 율이지만 그 나라의 풍습이나 풍토상 어쩔
마조의 제자 가운데 선의 일상화를 잘 표현한 대표적인 시가 있다. 내 일상생활에 특이한 일이 따로 없으며/ 내 스스로 차별 없이 즐긴다./ 선택해서 버리고 취할 것이 별도로 없으며/ 너무 법석 떨 것도 치워 버릴 것도 없다./ 누가 주사(朱紫)라고 말하는가?/ 산과 언덕엔 티끌 하나 없는데/ 신통과 묘용은 물을 나르고 섶을 나른다.위의 시는 마조의 제자인 방 거사(?∼808)의 선시이다. 참 진리인 진여 혹은 실상·여여함이라는 것조차 마음에 두지 않는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앞의 시 내용 중 ‘주사(朱紫)’는 붉은색의 관복으로 나라
‘조론’의 저자, 승조(僧肇, 384∼413)는 ‘도량’이라는 말을 ‘한가롭고 편안하게 수도하는 장소’라고 주석을 붙이고 고요히 마음 편안하게 수행하는 어떤 장소이든 간에 그곳이 깨달을 수 있는 장소라고 명명하였다. 승조는 이렇게 도량을 해석하고 있는데, ‘도량=마음자리’라는 공식으로 봐도 된다. ‘유마경’에서 ‘도량을 가꾸는데,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굳이 고요한 숲속에 머물러야 선을 하는 것이 아니며, 수행하기 적합한 장소에서만 도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머무는 일상에서, 자신
중국 선종은 인도불교와 차원이 다르다. 인도불교에서 탈피해 완전히 중국화된 문화와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문화의 코드로 변형된 점은 선이 일상에서 수행하는 것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달마가 중국에 입국[대략 520년]하기 이전부터 중국에 선수행자가 있었다. 곧 중국 선종의 역사는 달마를 처음 기점으로 보지만, 선사상적 측면에서는 그 이전인 200∼300여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처음 중국에 선이 수입되었을 때, 중국인들은 선을 도교적인 성향에 견주어 이해했다. 즉 신비스럽거나 감통(感通)으로 받아들였다고 보
‘금강경’에 “일체법이 모두 불법[一切法 皆是佛法]”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불법이요, 수행의 길 아님이 없다는 뜻이다. 또한 ‘법화경’에서도 “일체 생산 업무가 모두 실상과 위배되지 않는다[一切治生産業 皆與實相不相違背]”고 하였다. 이 말 또한 ‘금강경’ 사상처럼, 살아가는 삶의 원리 자체가 불도의 길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조사선의 개조(開祖) 마조(馬祖, 709∼788)를 비롯해 모든 선사들이 ‘멀리서 찾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늘 우리 자신이 참된 본성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들이 살아
육조혜능(638∼713)에게서 중국선 특유의 전환점이 만들어졌다면, 마조에 의해서 중국선으로 완전히 탈바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선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 조사선의 개조(開祖)가 마조이다.스위스의 심리학자 칼융(Carl Jung, 1875∼1961)은 “선은 동양의 정신 가운데서도 불교의 방대한 사상체계를 훌륭하게 수용하여 핀 중국 정신의 가장 놀라운 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칼융의 이 말은 중국선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인데, 인도선의 색채에서 벗어나 중국의 문화와 사상이 녹아든 중국화 된 조사선을 말한다. 이렇게 당대
5주간에 걸쳐 선가에서 방망이를 휘두르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활발발한 선기와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언급했다. 앞 원고에서 언급했듯 선기의 획기적인 연출은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면 선사들의 활기찬 언행이 현시대에도 활용되는지를 보자.현재 중국은 사찰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선종 사찰에서는 객당에 두 개의 향판을 세워놓는다. 향판 하나는 보편적인 청규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그 사찰만의 청규를 말한다. 그 향판에 ‘청규(淸規)’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선가의 엄격한 규율을 상징한다.청대 이후로는 방(棒)보다 향판(香版)
3주 동안 언급했던 대로 공안 형성에 마조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이 원고에서는 마조의 선기 방편이 불교사적 위치에서 어떤 관점으로 평가되고 있는지, 또한 선의 역사상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고존숙어록’에 의하면, 위산영우(771∼853)와 앙산(807∼883)의 선문답이 등장한다[위산이 스승이고, 앙산이 제자]. 위산이 앙산에게 물었다. “백장이 마조 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 서로 간에 불자(拂子)를 든 인연이 있었다. 이 두 존숙의 뜻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대기의 대용을 드러낸 것입니다.
지난주에 마조의 언어에 의한 대기대용 방편이었다. 이어서 이번 주는 몸의 동작이나 행위에 의한 대기대용 사상을 만나보자. ⓐ 마조와 백장이 들판을 지나는 중이었다. 이때 들오리 떼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마조가 백장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슨 물건인고[是甚麽]?”/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갔는가?”/ “이미 날아갔습니다.” 마조가 머리를 돌려 백장의 코를 한번 비틀었다. 백장은 아픔을 참느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조가 말했다. “다시 한번 날아갔다고 말해봐라.” 백장은 마조의 말끝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이 이야기는 ‘백장야얍(
지난주에 이어 언어에 의한 제접 방법을 더 살펴보자. Ⓒ 방거사가 마조에게 물었다. “만법(萬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그대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실 때를 기다려 말해 주리라.”방거사가 질문한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이란 일체 차별을 떠난 절대자이자 초월자이다. 외부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저간의 소식을 물은 것이다. ‘서강’은 마조가 머물렀던 개원사(현 佑民寺)가 위치하는 강서성 남창(南昌)을 가로지르는 강 이름이다. 마조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실 때를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