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한 잎의 혀로참, 좋은 말을 쓴다미소를 한 육백 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한줄기의 슬픔으로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한 송이의 말로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귀촌한 뜻을 묻는 오랜 친구에게퉁명스레 한 말씀을 나는 던졌다.여기 죽으러 들어왔지 달리 무슨 뜻을 두겠나선산 자드락에유류품처럼 흙 한줌 더 얹어놓고휘적휘적 가는 홀가분함이지.내 가고 난 뒷날에도이 전가(田家)의 뜨락에서누군가는 여전 지켜보겠지,꽃망울이 뭉글뭉글 부푸는 저 소릴배곯고 잉잉거리는 벌이나 나빌 제 젖먹이처럼 데리고 빨릴하루하루 불어터지는 꽃망울들이신열에 뜬 벚나무를.(‘시로 여는 세상’ 82, 2022년 여름호)도연명(陶淵明, 365~427)은 41세에 귀향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명시를 남겼다. 지금이야 41
부엌 구석 자루에 담긴 고구마삶아 먹으려고 꺼내보니삐죽삐죽 싹이 돋아 있다어둠 속에서몸으로 온몸으로 생명을 싹 틔운침묵의 비명이내 몸을 찌른다이 한 뿌리가 내뻗은 줄기로밭 한 고랑이 풍성하겠고내년 겨울도 풍성하겠지종자가 된 고구마봄은 이렇게 준비하는 거라고마음의 밥은 이런 거라고한 수 뜨겁게 가르쳐준다(배한봉 시집 ‘주남지의 새들’ 천년의시작. 2017)고구마는 겨우내 가만히 명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 방 한구석에는 고구마 보관장치가 있었다. 보관장치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름은 잊어버렸다. 멍석을 재료로 원통형으로 만든
삶은 계란의 껍질이벗겨지듯묵은 사랑이벗겨질 때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너의 그림자가움직이듯묵은 사랑이움직일 때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젖어 있듯이묵은 사랑이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젖어 있을 때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1959년작,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붉은 파밭에 푸른 싹이 올라왔다. 아마도 황토밭일 것 같은데, 시인은 푸른 새싹이 올라오는 바탕은
무명실에 둥둥 감긴 북어 한 마리눈 뜨고 말라가네고수레 소리에 뻗친 희망 배 속에 꽉 채웠을 텐데마른 장작처럼 좀버섯 하나 피우지 못하고새벽이슬 한 방울 호흡 못 하고눈뜨고 말라가네빛이란 무엇인가토막 날 몸뚱이 오랜 세월 말려끝내 추억 뒤로하고 흠뻑 두들긴 채 갈기갈기 찢겨다시 짠물 속에 빠질 생이여저 북어 보면눈뜨고 말라가신 할머니 그립고꽁꽁 얼어붙었던 동태 같던 내 지난 세월도줄줄 흐를 것 같아한적한 읍내 식당 푸른 벽에 걸린 북어 한 마리눈 뜨고 조금은 입도 벌리고(조인선 시집, ‘노래’, 문학과지성사, 2010)어느 날 시인
나도 한때는어머니의 자랑스런 자식이고자 했네.그렇게 세상에 도움도 주리라 믿었네.평생의 끄트머리에 이른내 마지막 바람은단 하루라도 세상에 누가 안 되는 것.나를 무는 모기며 쇠파리한 마리에도부끄러워 눈길을 피하네.(송기원 시선집, ‘그대는 언제나 밖에’, 살림, 2023) 송기원 시인은 소설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내게는 수행자로 다가온다. 그는 인도에서 여러 해 수행했고, 국내에서도 2년 이상 탁발하면서 수행했다. 그가 쓴 ‘숨’이라는 자전적 소설에 따르면, 미얀마 파욱 수행센터에서 몇 년 동안 수행하면서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시 공부 10여 년에 쌓인 책 이희승 국어사전 빼고 나머지 한 도라꾸 판 돈으로 한 여자 모셔와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 세 들어 살면서 나는 모과할게 너는 능금해라 언약하며 니뇨 나뇨 살아온 지 오늘로 50년 오매 징한 사랑아!(서정춘 시집, ‘하류’, 도서출판b, 2020)2년 전인가? 서정춘 시인이 ‘현구집(玄句集)’이라는 제목의 책 세 권을 보내왔다. ‘현구집’은 태화당(泰華堂) 정원(淨圓, 1950~) 스님이 경론에서 좋은 구절을 뽑아 1994년도에 옛날 책의 장정으로 펴낸 것이다. 당신이 그다지 열심히 보지 않은 책인데, 내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때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로 떠오를 듯 달려나가기도 하니언덕에 섰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도 마음이 연해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고청설모며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터내가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오자산은 슬며시 나의 옷깃을 잡으며곧 볍씨 뿌리는 들판이 될 것이라 귀띔을 한다따뜻한 바람을 모아
한적한 마을에 만물트럭이 지나간다늙수그레한 남자와 동승한 여자 목소리는옆자리에 앉지도 않고평생 늙지도 않는다젊은 여자의 목소리만으로도 설레는바깥노인들아이가 없는 집에서 우유를 사고남편이 없는 집에서 국수를 산다사탕 한 봉지를 사는 할머니는일주일 동안 입안을 굴리며 말 상대를 대신할 것이다마시멜로는 손주들의달콤한 말맛이어서 좋고잇몸의 사정을 잘 헤아리는 두부는무를수록 부드러워서 좋다사탕은 평생을 통틀어가장 달달한 대답 같다늙은 마을에어린 입맛들농번기에는 모두 흙 묻은 손이다트럭이 돌아 나가는 저녁처럼 어둑한 손끝들외상은 몇 달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이 산산조각 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그럼에도 불구하고,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그 어긋남에 대해
어디에 앉혀놔도 등신이었지만시라는 거울 앞에 서면척추가 휘어진다초대장도 없이 잔치 구경 간 실업자같이기웃거리는 습성을 대인 관계라 착각했다사람을 넓혀야 한다고 욕심부리다가기념사진의 병풍 노릇까지 해봤다감기 걸렸다고 이불이나 탓하는 얼뜨기여서타인의 재능을 노력으로 메우려 헛발질했다비굴은 치욕을 성형한 생필품재촉하는 이 없는데 결승선 같은 것 없는데지각한다는 느낌에 시달렸다알았던 노래의 2절처럼모임마다 가벼운 낯설음으로 채워졌다웃더라도 타인들이 내 행복을 시기하지 못하도록최초의 미소를 만들고 싶다아무도 모르는 웃음소리를 내
걸레질을 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허리와 머리를 깊이 숙여야 한다.엉덩이를 들어야 한다.무릎걸음으로 공손하게 걸어야 한다.큰절 올리는 마음으로아기 몸의 때를 벗기는 마음으로 닦지 않으면방과 마루는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어디든 떠돌아다니고 기웃거리고틈만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 눌러앉는 먼지들:오라는 곳 없어도 밤낮없이 찾아오고누구와도 섞여 한 몸이 되는 먼지들:하지만 정성이 지극하면 먼지들도 그만 승복하고고분고분 걸레에 달라붙는다.걸레 빤 물에 섞여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그렇게 그녀는 방과 마루에게 먼지에게매일 오체투지하듯 걸레질을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오래 걸었습니다저녁을 말아먹고 검어지는 수제비마당에대야를 내놓고 발을 담급니다걷다가 아주 많은 발을 보았습니다말, 양과 돼지 오리와 토끼의 발 자전거 자동차의 발도빌딩이라는 황무지를 걷다가김밥을 넘기며 잠시 멈춘 발도지금쯤 그들의 발도 퉁퉁 불어 있을 겁니다모두들 걷고 있었으니까요심지어 낙엽도 온몸으로 걷고 있었습니다바람은 파스를 붙인 어깨로늙은 호박의 가장자리를 말리고마당 그늘에서 고사리는 갈빛의 우산을 펴네요여름길 걷느라 지쳐서 낡은 구두는늙은 소처럼 어둠 속에 웅크립니다앞으로 걸으려던 발자국들이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매일이 보람차다면힘겨워 살 수 있나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맹물 마시듯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잘 살려고 애쓰지 않은 날도 있어야지(심재휘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2022) 틱낫한 스님의 ‘플럼빌리지’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룬 영화 ‘나를 만나는 길’에서 본, 서구 사람들이 출가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진지해 보였다. 플럼빌리지로 출가
산성 마을에 와서새벽 닭소리 듣는다저 닭들은 모두가 잠든 깊은 밤홀로 깨어서 홰를 치며왜 저리도 큰소리로 자꾸 외치는가한참 생각하다가그 사연과 까닭 문득 깨달았다닭들은 밤새도록 하늘의 경전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달과 별과 구름의 운행벌레소리와 안개의 조용한 이동을 보다가옛날 어느 큰스님이 그랬듯이한순간 알았다 알았다 되풀이하며그 기쁨 못 참고 날개까지 푸드득거리며통쾌한 깨달음의 소식혼자 목청껏 외치는 것이다(이동순 시집, ‘고요의 이유’, 애지, 2022)광명 금강정사에서 기거하던 시절, 새벽에 예불 올리고 기도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아프다가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오래 때가 묻은손가락 두 마디만 한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좋겠다 너는,생명이 없어서아무리 들여다봐도마주 보는 눈이 없다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무엇에게도아프다가돌아오다가지워지는 길 위에쪼그려 앉았다가손을 뻗지 않았다(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한강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소설가가 되었지만, 그의 문학인으로서의 출발은 시였다. ‘조용한 날들’은 시인이 좀 아팠을 때 쓴 시이다. 아프다보
제 몸을 둥글게 껴안고스스로의 깊은 생각에 잠긴다더 이 상 튀어오를 수 없는 건가바람이 빠지자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졌다제 몸의 생각을 숨쉬게 되었다숱한 발길질에도 구겨지지 않고둥글게 살려고 하던 공세게 얻어맞을수록 더 높이더 멀리 더 오래 날아가던 공고통이 그를 움직이던 에너지였다생각하며 사는 게 괴로울 때도 많았다골대 밖으로 튕겨 나와 발버둥치고벽을 넘으려고 안간힘을 쓰고퍽, 공은 마침내 늪에 처박혔다뿌리 잃은 삶의 구렁텅이를 딛듯제 몸의 숨구멍을 더듬게 되었다(안명옥 시집, ‘뜨거운 자작나무 숲’, 리토피아, 2016)우리
햇볕이 나무의 몸을 빌려그림자를 만드네요그림자 속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네요햇볕이 흘린 땀방울 같아요, 눈물 같아요어쩌면 햇볕에게 이 지구는고단한 허리를 두드리며아버지가 몰래 소리 없이 눈물을 쏟고잠시 쉬었다 가곤 하던뒤꼍의 헛간 같은 건지도 몰라요나뭇잎과 새들의 몸을 빌려햇볕이 또 그림자를 만드네요(함명춘 시집,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천년의시작, 2020)햇볕만큼 위대한 CEO(Chief Executive Officer)가 또 있을까? 누구에게나 똑같은 은혜를 베풀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권력을 행사하며, 누구에게나 꼭
반지하 창문 앞에는늘 나무가 서 있었지그런 집만 골라 이사를 다녔지그 집들은깜빡 불 켜놓고 나온 줄 몰랐던저녁나절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었던가산들바람이 부는 저녁에집 앞에서나는 얼마나 많이 서성대며 들어가지 못했던가능금나무나 살구나무가 반지하 창문을가리던 집,능금나무는살구나무는산들바람에얼마나 많은 나뭇잎과 꽃잎을 가졌는지반지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떨어지기만 했지슬픔도 환할 수 있다는 걸아무도 없는데 환한저녁나절의 반지하집은 말해주었지불 켜진 저녁나절의 창문을 보면아직도 나는 불빛에 손끝이 가만히 저린다(박형준 시집, ‘줄
왜 그런 거 있지초면인데 익숙한 사람 같은말하자면 그녀는 그녀대로나는 나대로 걸어왔지만낡아가면서 서로 닮아가는기억 속먼저 핀 꽃잎 날리는데고운 손 펴는 녹음 앞에서 어찌눈물이 나려 하는지깔깔거리는 어린것들아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줄게영원히 네 곁을 지켜줄게맹세하고픈,왜 그런 거 있지꽉 쥐어짜면 주르륵 흐를 것같이윤기 나는 햇살보리밭 비탈 논 왈츠를 추는 새들이런 날 나는호수에 떠 있는 섬,섬에 갇힌 호수로 간다(고성만 시집,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고요아침, 2019)이 시에 나오는 “왜 그런 거 있지?”의 ‘그런 거’는 대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