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9층목탑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덕여왕 14년(645) 공사가 시작되어 다음해 완성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조성공사가 기획된 것은 그보다 2년 앞서 자장이 귀국한 때부터였다. 자장은 진골귀족의 출신으로 선덕여왕 7년(638) 당으로 유학을 떠나 5년 동안 당태종의 후원을 받으면서 주로 수도 장안(長安)과 근교의 종남산(終南山)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오대산에 갔다는 것은 뒤에 만들어진 설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선덕여왕 12년(643) 3월 16일 자장이 급거 귀국한 것은 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속고승전’ 자장전에
결국 다시 곡성 성륜사로 돌아왔다. 이상했다. 사실 공양주가 없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공양간에 공양주가 있었다. 아내 당부대로 “아는 떡집에 떡을 맞춰 달라”고 공양주에게 부탁드렸다. 공양주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틀은 걸린다. 내일은 안 될 텐데….” 그래도 일단 전화해보라 했다. 웬일인지 떡집에서는 바로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집중수행에 참여하면서 통증으로 도망(?)갔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다시 성륜사로 왔고, 5일째가 되던 날도 통증으로 탈출(?)을 감행했다가 아내의 경책을 듣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떡 공양을
오늘은 우리 절에 귀한 손님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전국에서 유일한 조계종립 서울 은석초등학교 학생들이 왔습니다. 합창부와 관현악단 학생들이 반야선원 불자들에게 음성공양을 하겠다고 합니다. 훌륭한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이 많이 오셨고 학부모님들도 함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귀한 인연을 맺게 돼 기쁩니다. 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 욕지래생사 금생작자시(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라는 말이 있습니다.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 내가 전생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여기에 왔는가를 알고자 하면 현재 본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
장마가 끝났나 싶더니 숨 막히게 더운 무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센터를 찾으시는 어르신들도 더위를 피해 오랫동안 머무르신다. 익숙한 것이 편안하기도 해서 그런지 긴 공사기간 동안 어디들 계셨는지 모르지만 문을 열고나니 익숙한 어르신들이 모두 다시 오시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신다. 익숙한 것, 편하고 좋은 것 같으나 정작 이것이 습관이 되고 업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잘살아야 할 것이다. 작은 것도 습관이 되면 무거운 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소소한 것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어제는 오전 내내 회의를 마치고 조금은 늦은 점심을 먹은
타는 목마름으로 온라인 카페들을 전전하며 이생을 마치기 전 최선을 다하여 수행을 하다가 가자는 마음으로 헤매고 있었다. 수행에서 발행한 분들을 찾아 수행이 무엇인가를 듣고자 했으나 지엽적 말씀만 하실 뿐 실익이 없었다.고인들께서 간곡하게 스승을 찾으라는 말씀 따라 돌아다녔지만 누가 스승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자주 방문하는 카페에 ‘샤나한’님께서 불칠(佛七, 염불)과 선칠(禪七, 좌선) 수행에 관한 안내문을 게시하셨다.처음엔 불칠·선칠 프로그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별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불칠·선칠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날짜가
템플스테이나 행사를 하면 마지막에 회향 설문지를 작성하도록 합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프로그램을 하는데도 좋고 나쁨은 모두 다 다릅니다. 각자의 생각이 전혀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요.처음으로 명상순례여행에 동참한 분이 사찰의 큰방에서 다 함께 잠자는 것이 힘들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보살님이 설악산 봉정암 가면 눕지도 못한다며, 이 정도면 호텔이라고 웃습니다. 항상 집에서 혼자 씻던 아이들은 동성(同性)이라도 여럿이서 함께 샤워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반대로 오랫동안 어린이법회를 다닌 아이들은 절
불교는 실천하는 종교다. 무엇보다 절은 수행을 실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종교를 싫어하는 것은 종교인들이 말만 거룩하게 하고 수행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기 때문이다.원불교에서는 불법을 믿음으로써 생활을 빛내고 생활 속에서 불법을 닦으라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 ‘원불교 정전’엔 교리도 신앙의 길과 수행의 길을 나눠 놓고 이를 병행할 것을 요구한다.이 ‘원불교 정전’에는 좌선법이란 장이 있다. 좌선의 요지와 좌선의 방법, 좌선의 공덕, 단전주의 필요를 개략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원불교 정전’의 이 좌선법은 통도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즉위 3년(634)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고, 분황사(芬皇寺)를 준공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영묘사(靈廟寺)를 준공함으로써 이른바 전불시대의 7가람터 가운데 2곳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돌이켜 보면 제24대 진흥왕 즉위 33년(572) 정월에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고, 2년 뒤인 즉위 35년(574) 3월에 황룡사의 장육존상을 조성하였다. 홍제라는 연호는 12년간 사용되다가 제26대 진평왕 즉위 6년(584) 2월에 건복(建福)으로 바꾸면서 장육존상을 봉안하는 금당(金堂)의 건물을 준공하였다.
얼마 전 영화 ‘나랏말싸미’가 개봉했습니다. 한글 창제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의 이야기인데요, 기다리던 영화라 개봉 첫날 가서 관람했습니다. 그전에 관람객들의 반응이 어떤지 검색해보니 평점 테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역사왜곡’이라는 댓글도 있고 ‘1점도 주기 아깝다’라는 의견까지 있었습니다. 물론 좋고 훈훈한 댓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영화 개봉과 동시에 호평과 혹평이 갈리는 영화가 드문 만큼 큰 이슈가 돼있었습니다.영화 자체는 정말 괜찮았습니다. 그들이 나누는 대사도 참 아름답고 통쾌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여러 언어에
“나모라다나 다라야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 알야바로기제 새바라 다바…(삼보님께 머리 숙여 절을 올립니다…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주시는 관자재보살님께 귀의하면 성스러운 관자재의 위신력이 나타납니다….)”한여름 오후, 천년고찰에 70여 대중이 지송하는 범어(梵語)가 흐르는 건 ‘천수대다라니 108독 성취기도’ 원력을 세운 대흥사 신임 주지 성해 법상(性海 法祥) 스님에서 비롯됐다. 교구본사 주지 당선 소감을 피력하는 자리에서는 사찰의 중장기 청사진을 내놓는 게 상례인데 ‘승가의 본질’을 자문했던
‘붓당 사라낭 가차미(부처님을 의지처로 살아가겠습니다.)’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불심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이다. 국어 교과서에 인류의 빛이란 단원이 있었다. 거기에 석가모니 부처님,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인들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한 글이었다. 이것이 불교에 대한 처음의 만남이라 할까. 그때부터 내 마음속엔 부처님을 모셨다. 고등학교 시절이다. 종립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불교성전 교과가 있었지만 불교적인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학생회 교화부장이었던 나는 불교에 심취했다. 도서
1895년 10월8일이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역사를 배우면서 참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이 가끔 있는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그중 하나였다.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 시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우리들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되었다고 배웠다. 그러니 더더욱 말이 되는가? 강제병합 15년 전에 일본 낭인들이 서울을 활보하고 궁궐에서 왕비를 죽이고 유유자적 나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하니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시간이 참 많이 빨리도 흘렀다. 100년하고도 25년이 더 흘렀다. 말 못하는 식물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