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16년(676) 의상이 화엄종을 창립한 후 100여 년 지난 8세기 중엽 그의 법손들이 불교계의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고, 중심인물이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불려진 신림이었다. 그런데 신림이 북악인 태백산 부석사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었을 때 남악인 지리산 화엄사에서는 연기가 ‘화엄경’을 사경하는 등의 활약을 전개하였다. 이즈음 화엄사에서는 ‘화엄경’ 석경판을 조성했는데, 오늘날까지 잔편이 전래되고 있다. 연기는 왕경의 황룡사 승적을 가졌다는 사실이 주목되는데, 황룡사에는 연기 이외에도 다수의 화엄학승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이
신라 불교사의 전성기인 중대(654~780)에는 다양한 불교학파들이 발전하는 가운데 새로운 불교인 화엄종의 학승들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후반기인 750년을 전후하여 황룡사의 승적을 가졌거나, 황룡사를 무대로 활동하던 화엄학승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음을 앞에서 지적하였다. 이러한 학승들 가운데 특히 부석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의상 계통의 법손들과 별개로, 화엄사를 중심으로 호남에서 화엄종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학승으로 연기(緣起)가 있었다. 종래 화엄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이 있었고, 화엄사의 창건주로
신라의 역사에서 ‘중대(中代, 654∼780)’ 126년간은 전성기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문화의 황금기였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풍요로운 생활을 구가하였고, 종교·학술·예술 등 문화의 각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성취한 시기였다. 3국 가운데 가장 약소했던 신라가 통일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됨으로써 한반도 주민들의 에너지가 일시에 응축하여 폭발한 결과였다. 이 시기 중국 대륙에서도 이른바 성당(盛唐)의 문화를 구가하던 때로 신라는 동아시아에서 당에 버금하는 문화국가로서의 위상을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고대문화 건설
앞에서 의상(625~702)의 10대 제자와 화엄 10찰의 문제를 중심으로 의상 법손들이 번성하였고, 화엄종이 신라 불교계의 주류로 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당시 불교계에서 화엄학을 연구하고 대승보살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의상의 법손들 이외에도 상당수 발견된다. 이른바 ‘비의상계’ 인물들은 의상계 법손들과 달리 종파를 형성하고 조직적인 교단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화엄학 연구가 후계자들에게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의상계 화엄종에 흡수되면서 점차 잊혀 갔다. 그런데 ‘비의상계’라는 표현은 의상계를 주류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한 이후 효소왕 원년(702)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제자 양성과 교단 조직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의상의 화엄교학은 10대 제자를 비롯해 많은 제자들과 법손들에게 면면히 계승되어 9세기 이후에는 주류 종파로 대두하게 되었다. 의상의 문도가 번성하고 화엄종이 융성했음을 나타내는 것이 ‘십대제자(十大弟子)’와 함께 거론되는 화엄대학의 ‘10산(十山)’, 또는 화엄종의 ‘10찰(十刹)’이라는 표현이다. 화엄의 ‘10산’, 또는 ‘10찰’에 대해 언급한 자료로는 다음 두 기록을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한 이후 효소왕 원년(702)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제자 양성과 교단 조직에 전념하였다. 귀국 초기에는 출가본사인 왕경의 황복사(皇福寺)에서 소수 제자들을 대상으로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화엄교학을 강의했다. ‘일승법계도’에 대한 의상 법손들의 주석을 집성한 ‘법계도총수록’(권상1)에 의하면, 문무왕 14년(674) 표훈과 진정 등 10여 인에게 ‘일승법계도’를 강의했다는 기록에서 제자 양성에 대한 열의와 사제 사이의 진지한 면학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한 이후 효소왕 원년(702)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제자 양성과 화엄종 교단의 조직에 전념하였다. 의상의 교화 활동은 근엄 성실한 출가 수행자로 일관하면서 저술이나 개인적 수행에 머물지 않고 제자 양성을 통한 교단 조직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교화 활동은 평생 도반이었던 원효(617~686)와 비교할 때 특히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원효는 환속한 거사의 신분으로서 저술과 개인적 교화 활동에 전념하고 제자의 양성이나 교단의 조직적 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하였는데, 마침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이 전면적인 전쟁으로 폭발하는 위기 상황이 발생, 당군의 해상 침공 계획을 본국에 전해주기 위하여 급히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당군 침입의 대처 방안을 강구하는 가운데 불교적인 면에서는 밀교계통인 신인종 승려인 명랑의 문두루법(文豆婁法)으로 당군의 격퇴를 기원하였고, 다음 해에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기원하였다. 처음 당군의 침공 사실을 전해왔던 의상은 그 기원 법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상에게 당의 침공 계획 정보
의상(625~702)은 668년 7월15일 화엄교학의 요체를 담은 ‘일승법계도’를 찬술, 스승 지엄에게 인가를 받고, 마침내 당 유학의 소기 목적을 달성하였다. 661년 당으로 출발하여 다음 해부터 7년 동안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한 결과였다. 그동안 지엄은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서 장안의 운화사(雲華寺)와 청정사(淸淨寺)로 옮겨 머물기도 하였는데, 의상도 충실한 제자로서 그를 따라 옮기면서 수학하였다. 의상이 ‘일승법계도’를 지어 스승의 인가를 받은 지 약3개월 뒤인 10월29일 지엄은 67세를 일기로 하여 청정사의 반야원에서
5회에 걸쳐 의상(625~702)이 15세 즈음 출가해 22년 동안 지론종·섭론종·삼계교·계율종 등 신라에 전해진 여러 학파의 불교를 두루 섭렵했으며, 그러한 수학경험이 남북조 이래의 구역불교를 섭렵하고 종합하면서, ‘화엄경’을 소의로 하는 화엄종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던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602~668)을 찾게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지엄의 문하에서 수업하는 7년 동안 화엄종뿐만 아니라 지론종·계율종·삼계교 등 수·당대 여러 학파나 종파의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임도 유추하였다. 그러나 의상이 스승으로
지금까지 의상이 당에 유학하여 종남산 지상사에 머무는 10여년 동안 화엄종 뿐만 아니라 지론종·계율종·삼계교 등 수·당대 여러 종파의 승려들과도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았음을 추정하여 보았다. 본고에서 이러한 사실들에 지나치리만큼 많은 분량의 지면을 할애한 것은 그 동안 화엄종 지엄의 영향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불교사학계에서의 편협한 이해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였다. 그런데 불교사학계 일각에서는 의상이 지론종·계율종·삼계교 등의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당에 유학하기 이전에 이미 국내에서 수업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기
최근까지 의상이 당에 유학하여 지엄 문하에서 화엄학만을 수학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 의상에 관한 중요 사료인 ‘삼국유사’ 의상전교조나 ‘송고승전’ 의상전 등에서 한결같이 지엄으로부터 화엄교학을 전수한 사실만을 전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의상의 불교는 화엄학 외에 지론종과 계율종, 삼계교나 정토교 등의 영향도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 유학 이전에 신라에서 이러한 불교들을 섭렵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으나. 나로서는 역시 당 유학 중인 661년부터 670년까지 10년 동안에 의상은 지엄 이외에 다른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