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신생국가로서 그리고 곧 공산세력의 침략으로 나라가 미증유의 경제적 파탄과 심신의 생활고를 극도로 맛본 희유의 나라다. 이런 나라가 지금 세계 10대 무역국의 반열에 올랐고,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서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바깥 외국인들의 눈으로서 실로 경이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세계인이 깜짝 놀란다. 그러나 정작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룬 업적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거의 없다. 사람들의 눈은 박력 있고 몸동작은 활발하나 희망의 생기가 없고 눈매가 거칠며, 소리가 시끄러우나 내용이 부실하고 영양가 없는 농담조의 헛소리가 판친다. 왜 그럴까. 역대 정권들이 우리 현대사를 지나치게 매도해서 자기 나라에 대한 긍지를 잃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
옛 중국 대선사 대부분 교학의 대가학문 무시 풍토서 선종 열매 못맺어 가끔 학문을 알음알이로 평가절하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어떤 스님들의 법문을 듣게 된다. 중국 선종의 영향으로 학문을 통하지 않고 참선으로 인심(人心)에 직입하여 문득 견성하려는 마음가짐이 이론적 학문을 알음알이로서 밀어내는 것 같다. 달마대사가 같은 인구어(印歐語)권인 서양으로 가지 않고, 전혀 언어가 다른 중국으로 온 까닭은 부처님의 심법을 한자문화권에 씨뿌리기 위해서겠다. 아마도 그는 한문의 직관적이면서 간명하고 포괄적인 사유가 분석적이고 분절적인 인구어보다 더 불심의 본질을 전파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더구나 중국에는 이미 노장사상이 불심을 토착하는데 비옥한 토양을 가꾸고 있었기에, 대번역가인 서역인 구마라습 스님의
한풀이의 원한 심리는 삼독중에 치심자기자신 긍정하는 수행의 힘이 필요 숭례문이 전소되었다. 어떤 늙은 영감이 한풀이로 홧김에 불을 질렀다. 아! 중생의 어리석음이여! 나는 예전의 칼럼을 통하여 한국인의 한(恨)의식이 역사의 업보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우리 역사의 공업(共業)을 인식하여 그 업을 맑게 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좋은 미래를 기약한다는 것은 무의식의 힘을 도외시하고 그냥 의식적인 덕담으로 우리의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고 무책임하게 뇌까리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인은 뿌리깊게 저 한의 감정에 끄달리고 있다. 한의 정서가 심해지면, 그것이 한풀이가 되고 원한의식으로 발전한다. 숭례문의 방화사건도 그런 한풀이 심리가 지닌 원한의식의 발로다. 저 원한심
미련은 소유로 표현…몸이 소유 출발점색즉시공은 空을 추구하는 해탈의 길불교 수행법에 사념처관(四念處觀)이 있다. 이는 몸(身)과 몸의 감각(受)과 마음(心)과 세상의 모든 법(法)을 관하는 방법을 말한다. 몸은 더럽고 부정하고, 몸의 감각작용이 고통의 진원지이고, 마음도 무상하여 변덕스럽고, 일체 법이 자기 동일성이 없다는 것을 관하는 것이 사념처관이다. 이 수행법은 세상의 것에 대한 짙은 애착을 끊게 하여 해탈의 길을 가는 색시공(色是空)의 도(道)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세상의 것에 대한 미련은 모두 소유욕을 통하여 표현된다. 내 몸은 모든 소유의 출발점이다. 나는 내 몸을 단지 객관적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관적 생각을 낳는 출발점으로 생각한다. 자아라는 생각도 내 몸의 감각작용을 통해
불교가 소유적 자유·평등 바꿀 사상 보고 21세기는 인간 조건보다 본성 사유 시기 드골 프랑스 대통령시절 문화부장관인 작가 앙드레 말로가 쓴 ‘인간조건’이란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친사회주의적 소설이다. 말로는 초기에 이처럼 좌파적 혁명에 동조하다가 후기에 우파로 전향하여 드골 장군의 자유 프랑스 국가부흥에 참여한 문인이다.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말로의 사상이 아니라, 그가 쓴 ‘인간조건’이란 소설제목이다. 말로는 서양 모더니즘의 참여적 지성인이다. 모더니즘은 철두철미 현실 참여적 행동을 지고의 가치로 여겼다. 우파적 자유주의나 좌파적 사회주의나 다 행동적 앙가쥬망(engagement=현실참여)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는 사회나, 사회적 평등이 실현되지 않는 사회나, 다 각각 인간
광기-외곬 타파해야 선진문화국 가능 空 사상은 감정주의 깨치는 최고 방편 나는 불교가 한국정신문화를 건강하게 키우는 국민교육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다. 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우리의 소원’을 말하면서,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복스러운 문화국가이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미래의 한국이 선진문화국가가 되어 불국토의 어떤 모범을 세상에 보여주기를 갈망한다. 나는 불국토의 전형이 어떤 이상주의적 꿈으로 끝나는 낭만적 감정에 그치는 것을 싫어한다. 한국인의 낭만적 이상주의를 나는 줄곧 비판해 왔었다. 낭만적 이상주의가 대개 단세포적 감정주의의 명분으로서만 장식되는 것을 나는 역사적으로 많이 보아 왔다. 선진문화국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우리 속에 널리 퍼져 있는 단세포적 감
안전 불감증은 주관적 낭만주의서 비롯 낭만적 감정서 벗어나 유비무환 새겨야 서해 태안반도 앞에서 대형 유조선 원유 유출사고가 발생했다. 몇 년 전 여수 앞 바다의 원유 유출사고를 당하고도 예방시스템이 제대로 작동 안된 것은 거듭된 안전불감증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는 소 잃고 외양간도 못 고치는 업장을 짊어지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언론에서 수시로 안전불감증이라고 지적하지만, 실제로 그 숙업이 고쳐지려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 서해안의 대형사고도 일상적으로 우리가 소소하게 겪는 안전불감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시속 120킬로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차를 겨우 2~3미터의 차간거리만을 두고서 바짝 뒤에 붙어 따르는 다른 많은 차량행렬들의 작태가 저 사고의 원인과 다를까? 가득
독 제거하면 약도 없어지는 게 이치 선악 초탈한 마음의 도리가 큰 관건 신문을 보면 악이 우리시대를 휩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악이 발호해서 인간의 지선한 도덕적 삶이 가능한 것인가 하고 회의를 느끼게 한다. 선과 정의의 승리를 주야간 생각하는 이들은 이런 악의 발호를 참을 수 없는 부조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악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현실이 그런 구조로 엮어져 있음에 어이하랴! 20세기 프랑스의 실존철학자인 메를로-뽕띠는 이 세상에 100%의 의미도, 100%의 무의미도 찾을 수 없는 부분적 의미밖에 없다는 것을 실토한 바가 있다. 이 말은 세상의 부분적 의미가 세상의 부분적 무의미와 서로 상통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겠다. 우리 시대의 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가장 간단한
불교는 수행의 종교다. 이것은 기독교가 단순한 신앙의 종교라는 것과 대조된다. 신앙은 열광의 강도를 늘 최고로 여기나, 수행은 자기를 변혁시키는 마음의 다스림을 본질로 삼는다. 수행은 두 단계로서 설명된다. 첫째로 그것은 사회적 자아를 자연적 무아로 전이시키는 것이고, 둘째로 그것은 또 자연적 무아를 사회적 무심으로 옮겨놓는 일을 가리킨다. 자아는 사회생활의 반영이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떠나게 되면, 그의 자의식은 점차로 희미해진다. 자의식은 남들과 함께 사회생활을 하면서 갖게되는 복잡한 콤프렉스의 소산이다. 사회생활은 언제나 인간관계에서 먹고 먹히는 소유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유식학은 사식론(四食論)이라 부른다. 우선 음식을 요리해서 남들을 의식하면서 잘먹는 단식(段食)이 있고, 그
목적세계 실현 위해서는 늘 도구 필요불교에서 주인-노예 없고 역할 차이뿐 중생으로서의 인간세계는 이용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목적의 세계다. 이용가능성은 손에 잡히는 소유가 충족될 때에 생긴다. 자연을 도구로서 이용하고, 인간사회도 나의 목적실현을 위한 도구로서 생각한다. 이용가능성의 추구와 소유욕과 목적의식과 도구화는 다 그 의미에서 같이 간다. 이용하는 자는 승자로서의 주인이 되고, 이용당하는 자는 도구가 된다. 이것이 그 동안 인류의 에누리없는 역사고, 사회생활의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인간은 사회생활에서 승자의 입장에서 도구를 부리기 위하여 노력했다. 승자가 늘 자연을 도구로서 지배 이용했고, 타자의 사회를 도구화했다. 독일의 현대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이용가능성의 본질을 ‘위하여’(um-zu)로서 집약
성불만 고집해선 대중과 멀어질 뿐부처를 닮아 가는 것이 대승의 자세 나는 이 컬럼을 통하여 가끔 추상의 정신으로 변한 불교의 공허함을 지적한 바 있었다. 오늘도 이와 유사한 바를 강조하련다. 추상의 정신은 원리 면에서 옳으나, 구체적 생활의 작은 의미가 증발되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유자들이 일반적으로 요순병(堯舜病)에 걸려 임금이나 각자가 요순이 되는 것만을 강조하다가, 실생활에서 실천가능한 작은 내용들을 간과한 우활(迂闊)한 유학이 되고만 어리석음을 범했다. 나는 이런 유교의 병이 불교에서도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늘 우려해 왔다. 불교가 수행의 종교인 것은 확실하나, 불교인이 너무 확철대오의 부처 경지에 이르는 것만을 능사로 삼다가, 결국 실생활에서 불자들이 작은 부처되기의 길을 무
불교, 해체시대에 걸맞는 구세적 신실학수부귀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혜 줘야 흔히 불교를 탈속적 종교로 여겨 현실적 국가중흥의 사상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둔세적 허학(遁世的 虛學)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착각을 시급히 불식해야한다. 불교는 해체시대에 걸맞는 구세적 신실학(救世的 新實學)이다. 지금 나라 안에 온통 떠들썩한 가짜 학력문제와 크다란 부정부패에 불행히도 불교계 일각이 얽혀 있어 구세적 신실학으로서의 불교의 중흥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허탈감과 실망을 넘어 비분강개 마저 느끼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불교를 살리는 길은 청정한 무소유의 길이라고 반사적으로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종교가 한 나라를 일으키는 길은 대중을 감발시켜 변하게 하는데 있다 하겠다. 대중은 무소유와 같은 청정한 계율을 드높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