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불교를 잘 알진 못했지만 절에 열심히 다니셨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항상 호감을 갖고 살아왔다. 그러다 입대 후 우연히 부대의 불교 군종병에 선발되면서 매주 3번씩 절에 다니게 됐다. 원해서 된 것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제대하기 전에 ‘반야심경’ ‘천수경’ 등 기본적인 경전을 외울 수 있었다.제대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원래는 자동차 정비를 전공했는데, 일본에서 갑자기 외국어에 흥미를 느꼈고 불경을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중국문학을 공부했다. 한국인이 일본에서 중국어를 전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힘든 생활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매자작시의 이하령중생 득입무상혜 속성취불신(每自作是意 以何令衆生 得入無上慧 速成就佛身)’이라, 부처님께서 하시는 불사는 오직 어떻게 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지혜에 들게 해 부처님 몸을 빨리 이룰 수 있게 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이며, ‘소작불사 미증잠폐(所作佛事 未曾暫廢)’라, 부처님께서는 속성취불신(速成就佛身)의 불사를 잠시도 그만 둔 적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이하령중생 득입무상혜 속성취불신’의 ‘매자작시의’ 이외에 일체의 모든 생각은 본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니, 참으로 본래 있는 법을 그대
방편업은 민법·형법 등 세속의 법전을 읽으며 살아가는 변호사이지만, 본업은 부처님의 일대사인연이 온전히 담긴 진실법인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를 생각 생각마다 놓지 않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고 있는 염불불자다. 초등학생시절 내가 왜 이 지구라는 별에 왔는지, 기껏해야 100년도 못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은 성장할수록 깊어졌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능공부에 매진하다가 갑자기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싶어 무작정 휴학하겠다고 부모님께 통보한 적이 있다. 당연
단순히 한국을 멀리 떠나 인도까지 갔기 때문에 행복했던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괴롭히던 각종 잡념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수행에 매진했기에 행복했던 것이다. 모든 괴로움은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생각에 따라 변화함을 알자는 마음으로 수행했다. 매순간 들었던 부정적인 생각이 내 원래 모습이라는 착각으로 괴로움과 우울에 파묻혀 살아온 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처음에는 선은 어렵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라 생각해 지레 겁먹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정 반대였다. 가야산선원장 효담 스님은 법문마다 “선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우울이 늘 내 마음을 휘저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이겨내고 싶어서 이런 저런 수행을 시도했지만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마음을 괴롭혔다.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고, 삶의 끈을 놓고 싶었다. 살고 싶은 마음에 인도로 떠났다. 여러 차례 인도에 방문했는데, 신기하게도 갈 때마다 숨을 쉴 수 있었다. 매일같이 먹고 자고 수행했다. 귀국해서는 여러 책과 유튜브에서 수행법문을 들으며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마음속 우울과 약에 의존하는 삶이 쉽게 변하지 않았지만,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벗어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합니다. 남편과 결혼한 뒤 시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기 전까진 불교를 잘 알지 못했다. 당시엔 공양올리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다 ‘오로지선원 유튜브 천일정진’과 인연이 닿아 동참하며 ‘금강경’을 접하게 됐다. 적은 나이가 아니기에, 이번 생의 마지막 천일정진이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금강경’을 수차례 독송하고 있다.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평일에는 동해, 주말에는 원주를 오가며 과연 내가 제대로 회향할 수 있을지 걱정도 들지만 부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라는 마음으로 여법하게 회향할 수
마음관리 기술이 하나는 있어야 100세 시대를 살아갈 것이다.아이는 나의 빛나는 왕관이었다. 신생아 때는 순해서 울지도 않았고 낮과 밤이 바뀌는 것도 없었다. 잘 먹고 잘 자서 언니는 신이 준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자라서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이었다. 9살 땐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며 캐리어에 앉아 학습지를 풀었고, 반장을 도맡으며 중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 고등학교도 수석 입학했다. 전교부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런데 당연하게 여겨졌던 상황이 한순간 변해버렸다. 아이는 중간고사 수학에서 2문제를 틀렸는데, 나는 그럴 수 있다며
불교를 제대로 알기 전에, 나는 불교는 허무주의 종교, 염세주의자들이 찾는 종교라며 오해하고 있었다. ‘금강경’ 사구게의 첫 번째 가르침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모든 형상 있는 것은 허망하니 모든 형상이 본래 형상이 아닌 것을 알면 곧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된다)’라는 경구만 보더라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런 오해가 더욱 들기 마련이다. 지금은 그런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불교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닌 그 어떤 종교보다도 현재를 강조하는 종교다. 부처
더없이 깊고 미묘한 법은 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렵도다. 나 이제 보고 듣고 수지할 수 있으니, 원컨대 여래의 진실한 뜻을 알고자 하나이다.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금강경 개경게’개경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송이다. 매일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제일 먼저 보는 이 게송은 나 자신을 다독이고 정진하게 하는 살아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불교 공부를 시작한지 15년째가 되었다. 30대 초반부터 관음선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매일 ‘금강
경전에서 갈애와 사견에 끌려다니는 것을 ‘정복당한다’고 했다. 정복당하지 않고 자기 생각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해를 통해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본다는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나아가야 한다.각산 스님과의 개인 인터뷰 시간에 출가를 권유받은 적이 있다. ‘나에게 출가의 용기가 있는가?’ 선무도를 배우기 위해 골굴사에 갔을 때 적운 스님은 옆에 있던 스님에게 “데리고 내려가서 삭발시키고 행자복 입혀라” 말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머리 깎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오로지 선무도만 하고 싶었다. “스님! 저는 종갓집
문경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란 나는 상여 나가는 모습을 유독 많이 보았다. 그때마다 툇마루에 앉아 울곤 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죽음이라는 것이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 영원히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성인이 되어 불교를 공부하고 인간에게는 8가지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생노병사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미운 사람과 만나야 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려고 하나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이 온갖 탐착을 일으키는 오음성고(五陰盛苦)다. 고통이 있으면
복무 기간이 반년 남짓 남았을 무렵, 나태와 무기력에 빠져 몸무게가 12kg이나 늘었다. 하고 싶은 일은 너무나 많았지만 군대에선 할 수 없었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이를 극복하고자 하남에 계시는 스님께 ‘108대참회문 3-5-7기도’를 받았다. 3-5-7 기도는 매일 새벽 5시30분에 3일기도 일곱 번, 5일기도 다섯 번, 7일기도 세 번을 순서대로 마쳐야 회향하는 기도이다. 대학에 다닐 때 여러 기도를 몇 번이고 도전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회향하지 못했기에, 군대의 규칙적인 환경은 정진에 도움될 것처럼 보였다.
서울 서초동 반지하에 음악을 좋아하는 고등학생이 살고 있었다. 쌀을 살 돈이 없어 옆집 사는 친구에게 빌리러 다녔던 2015년 겨울, 온갖 괴로움이 나를 스멀스멀 감쌀 때 처음으로 절에 찾아갔다.힘든 집안 사정에 엄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에 다니던 보살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의 목적은 ‘살려주세요’였다. 보살님의 소개로 엄마를 따라 하남 검단산 중턱에 올라 주지스님을 만나 뵙게 되었는데, 피골이 상접한 나를 보시곤 “지리산에 잠시 다녀 오거라” 하셨다.질풍노도의 시기, 힙합·랩 음악에 빠져있던 나는 불교에 전혀 관심이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참나를 탐구하며 심리상담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너는 이미 ‘그것’이야”라며 “네 본성은 이미 네 안에 있어. 네가 그것을 인정하고 참나로 살면 돼”라고 말했다. 그동안 내면 밖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과 사람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해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살았다. 하지만 모든 원인은 내 마음가짐에 있었다. 친구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보듬어주자 햇살에 서리가 녹듯 내 마음속에 꽁꽁 얼어있던 감정들이 녹
진짜 나로 살게 된 이야기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불자인지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절에 가서도 불상 앞에서 삼배를 올리기보다 사찰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 산책을 즐긴다. 사찰보다 산과 들의 자연에 더 경외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자 했지만 아직 어렵게만 느껴진다. 청소를 하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처님의 제자처럼 나도 쓸고 닦으며 수행하는 편이 더 낫겠다 싶다. 스님들을 만나면 존경심은 들지만, 어린아이나 욕심 없이 웃는 노인을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니 내가 불자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 같아서
대학교 4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학생회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자치회의 성격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에 학생회장에 도전하는 해였다.학교에서 미얀마 수행 프로그램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또 냉큼 지원했다. 쉐우민센터에서의 수행 프로그램은 마치 대학교 같았다. 한국 고엔까 프로그램은 체계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다함께 모여 수행했지만 쉐우민센터 프로그램은 기본 정보만 제공해주고 알아서 수행하라고 했다. 굉장한 자유에 놀라 처음엔 주춤했지만 주변 어른들의 모습을 따라하며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쉐우민센터 주지 우 떼자니야
살면서 종교를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어난 환경도 영향을 미치지만 삶의 고난과 역경이 닥쳐올 때 단순히 의지하고 싶다거나 삶에 대한 의미, 목적을 발견하고자 종교를 찾게 되는 것 같다. 청소년기에 일타 큰스님의 일대기를 읽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근이 송연해지는 경험을 한 후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나는 '한 번 사는 인생, 제대로 살아보자'며 스님이 될 결심을 했다. 부지런히 새벽예불을 올리던 어머니를 삼남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다닌 경험과 불교에 대한 탐구열로 가득했던 아버지 아래서 자라서인지 깨달음을 얻고 나면
지금의 나는 10년 전과 많이 다르다. 짜증이나 화가 나면 꾹 참고 혼자 삼켜버렸기에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앓이 할 때가 많았다. 혼자 울거나 기도하며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이전에는 상대방의 화가 내 가슴 깊이 들어왔지만, 꾸준히 마음을 다스리며 참선 수행한 결과 그 화들이 내 마음과 거리두기를 한다. 참선을 통해 찾아온 마음의 고요함이 화를 막는 방패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참불선원에서 동안거 100일 수행을 회향하며 누군가 내게 쏜 화살이 내 앞에서 멈추고 떨어지게 할 수 있게 됐다. 이 염력은 바로 자비심이다. 누군가 내게
외국에서 가톨릭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탓에 절에 다닐 기회가 없었다. 가끔 새벽에 ‘천수경’을 독송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유일한 불교 기억이다. 부처님을 처음 마주한 건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다. 집에 있던 어느 책 속에서 발견한 석굴암 본존 석가여래 엽서. 온화하고도 평온한 미소를 짓고 계신 부처님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당시엔 불심이 생기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 가끔 부처님 엽서가 떠오를 뿐이었다.대학 진학을 위해 한국에 돌아와서야 불교에 관심이 생겼다. 집안과 연이 있던 한 암자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절에 다
평소 사찰을 좋아해 가끔 절에 놀러 가곤 했다. 그러다 친구의 권유로 불교에 입문하고 도심포교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새벽기도, 사시기도 등에 꾸준히 참석하며 경전 읽는 법을 배웠다. 시간만 나면 도반들과 이절 저절 기도하러 다니며 기도하는 법도 배웠다. 혼자서도 매일 날이 새기도 전에 절 앞에 가서 기다리다 기도하고 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반들과 순천 금전산 금강암에 방문했다. 꼭두새벽부터 출발해 산을 타기 시작했다. 금강암까지 가는 길은 가파르고 험해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쑤셨지만 부처님을 보러 간다는 기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