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1세기 경, 파키스탄 스와트박물관 기원정사에 머물고 계시던 부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제자들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도리천에 환생한 어머니를 위해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설법하고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를 ‘도리천강하(利天降下)’라고 한다. 불교의 효(孝) 실천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소재이며, 부처님이 계시지 않자 부처님을 사모했던 우전왕이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했다는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초기 경전에서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도 스스로가 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리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도리천강하 이야기에는 어머니를 위한 설법과, 부처님
▲1세기 경, 산치 대탑 탑문 부처님의 전생담 가운데 한 때 부처님은 위대한 원숭이 왕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던져 동족들을 구한 것이 핵심인 이야기가 있다. 전생담에서는 보시를 행한 부처님이 곧 원숭이였지만, 부처님 일대기를 다룬 불전(佛傳) 경전에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보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두 이야기는 인도인들이 선호했던 것으로 미술로도 자주 표현되었다. 부처님 당시 인도인들이 통속적으로 믿고 있던 교설은 업보윤회설이었다. 부처님은 이러한 통속적 관념을 믿고 있는 당시의 대중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준수하며, 이러한 보시와 계율을 계속 실천하면 그 과보로서 하늘에 태어난다고 설했다. 이
▲기원전 1세기 경, Bharhut 출토, 인도박물관, 꼴까타 불교 최초의 절은 마가다국의 죽림정사와 꼬살라국의 기원정사이다. 사왓티(舍衛城)의 부자 상인 수닷따(Sudatta, 須達多)는 우기(雨期)에 3개월 내지 4개월 동안 한 곳에 머물러 수행하는 우안거(雨安居)에 부처님께서 머물 수 있도록 승원을 보시했다. 부처님은 30여 회의 우안거 중 기원정사에서 19회를 보냈다고 한다. 라자가하에서 부처님을 초대하고 식사 준비에 분주한 처남으로부터 부처님 이야기를 들은 수닷따는 다음 날 부처님을 뵙고 귀의했다. 사왓티로 돌아온 그는 부처님께서 머물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 드디어 찾아낸 곳이 꼬살라국의 태자인 제따(Je
▲ 2~3세기, 남인도 아마라바티 출토, 인도 첸나이주립박물관 소장 부처님의 일대기와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라자가하[王舍城]는 깊은 관련이 있다. 라자가하는 부처님의 교화 전법의 장소로서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술 취한 코끼리 날라기리(Nala-giri)를 항복시킨 사건의 발생지이다.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었던 데와닷따(Devadatta)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까삘라왓뚜를 방문했을 때, 출가했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부처님의 일대기에서 악인(惡人)의 대명사로 등장하는데, 그런 인연은 현생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이었다. 데와닷따는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의 아들인 아
▲1세기 경, 인도 산치 제1탑 탑문 우루웰라 깟사빠가 모시는 불을 숭배하는 사당 안에서 독룡을 조복시킨 후 부처님은, 그들과 떨어져 가까운 숲에 머무셨다. 마가다국과 앙가국 두 나라에서 많은 신자들이 찾아오는 큰 제삿날이 다가오자, 우루웰라 깟사빠는 부처님이 사람들 앞에서 신통력을 보이면 자신의 위신력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그가 나타나지 않기를 내심 원했다. 이를 눈치 챈 부처님은 제사가 있는 날 그곳으로 탁발을 오지 않고 다음 날에야 오셨다. 깟사빠는 어제는 공양물이 많았는데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부처님은 그대가 오는 것을 꺼려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 사건 이후 깟사빠와 그의 제자들은 부처님을 위대한 사문으로
▲ 1세기 경, 인도 산치 제2탑 탑문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한 후 부처님은 와라나시 부자의 아들인 야사(Yasa)와 그의 친구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 후 부처님은 이들에게 전법(傳法) 선언을 하셨다. “이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법을 전하러 가자. 다른 마을로 갈 때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이치에 맞게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을 전하라.”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전 고행하던 네란자라 강 근처에 있는 우루웰라의 세나니 마을로 홀로 전법의 길을 떠났다. 그곳에는 마가다국왕의 신임을 얻고 있던 우루웰라 깟사빠, 나디 깟
▲ 간다라, 2~3세기, 꼴까타 인도박물관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한 첫 설법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다섯 수행자 가운데 가장 먼저 깨달은 제자는 누구였을까? 꼰단냐, 왑빠, 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에게 부처님은 첫 설법을 시작하셨다. “쾌락에 빠지는 것과 스스로 지나친 고행을 하는 두 개의 극단을 가까이 하지 말고, 중도(中道)의 길을 가거라. 중도란 지혜롭고 성스러운 여덟가지의 올바른 길인 팔정도(八正道)이다. 또한 네 가지 성스러운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가 있으니 귀를 기울여라. 첫째는 현실적인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가르침인 고성제(苦聖諦)이고, 둘째는 그러한 현실의 고통이 생긴 이유에
▲간다라, 2~3세기,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 부처님은 범천으로부터 법을 설해 줄 것을 요청받은 후 누구에게 가장 먼저 법을 설했을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자로 출가 후 수행할 때 만났던 바라문 철학자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떠올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은 모두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다시 부처님은 한때 고행을 함께 했던 다섯 수행자를 생각해 내고는, 여전히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고행을 하고 있던 그들을 첫 설법 대상자로 삼았다. 다섯 수행자는 꼰단냐, 왑빠, 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 등이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부처님을 본 그들은 못 본체하고 침묵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다가오자
▲ 간다라, 1~2세기, 독일베를린인도미술관 범천권청(梵天勸請)은 깨달음을 얻은 범천이 부처님께 법을 설해 줄 것을 간청해 전법(轉法)이 이루어진 것으로,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신이 깨달은 바가 너무 심오해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해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을 염려해 설법을 주저했다. 처음에는 제석천이 법을 설해 줄 것을 청했지만 부처님은 거절했다. 다음으로 범천이 세 번에 걸쳐 간곡하게 설법해 줄 것을 청하자 부처님은 설법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범천권청에 관련된 에피소드이다. 부처님은 왜 제석천의 권청은 물리치고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였을까? 이에 대
▲ 간다라, 2~3세기,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사천왕이 부처님께 발우를 바친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성도 후 첫 설법을 하기 전에 일어난 에피소드로 사천왕봉발(四天王奉鉢)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라자야따나 나무 아래에서 성도 후 여섯 번째 칠일 동안 법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마침 그때 땁뿟사(Tappussa)와 발리까(Bhallika)라는 두 상인이 근처를 지나다가 부처님을 발견하고는 먹을 것을 보시했다. 부처님께서는 상인들의 음식을 받으면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 발우를 지니셨는데, 나는 이제 어떤 그릇으로 이 음식을 받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때 사천왕이 금발우(金鉢盂)를 부처님께 드리자 “출가의 법에는 금발우를 받는
▲ 나가르주나꼰다, 3~4세기, 남인도 나가르주나꼰다고고박물관 성도(成道)는 고따마 싯다르타가 고따마 붓다(Gotama Buddha)가 되었음을 뜻한다.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것은 어떤 선입견도 없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직관(直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네란자라 강가의 우루웰라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정각도량(正覺道場) 일곱 군데의 나무 아래에서 7일씩을 보냈다고 한다. 지난 1월에 방문한 보드가야 대탑 주변에는 이것을 기념하는 표지판이 실제로 설치되어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49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즐기면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의 내용을 다시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간 동
▲ 간다라 2~3세기,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 풀베는 청년 솟띠야로부터 길상초를 받아든 석가보살은 보리수 아래로 발길을 옮겼다. 보리수 아래에 석가보살이 앉자 마왕은 그가 곧 깨달음을 이룰 것이라는 걸 예감하고는 온갖 방해를 시작했다. 부처님께서 싯다르타 태자로 태어나 출가 수행자가 되어 오랜 수행을 통해 깨달아 중생 구제의 길로 들어선 것을 우리는 항마성도(降魔成道)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욕망 세계의 주인공을 마왕(魔王)으로 여겼고, 욕망이 다스려진 평화로운 내면을 깨달음인 부처님으로 대비시켰다. 마왕이 위력을 발휘하는 최대의 순간은 불교의 시작을 의미하는 항마성도 때이다.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다양한 욕망을 석가보살 앞에
▲ 간다라 2~3세기,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 6년간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혹독한 고행 을 했던 석가보살은 불현듯 농경제(農耕祭)에 참석했다가 무우수 아래에서 첫 선정에 들었을 때의 기쁨을 생각해 냈다. 고행이 성도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알고 과감하게 그간의 수행법인 고행을 포기하고 나란자라 강에 내려와 목욕을 했다. 마침 수자타가 올리는 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그간 함께 고행을 했던 5명의 수행자는 고행을 그만둔 석가보살을 배신자라 생각하고, 그의 곁을 떠나갔다. 기운을 차린 석가보살은 과거의 부처님들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에 이르렀을 때 어떤 자리에 앉았을까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풀로 된
▲ 간다라 2~3세기,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출가 수행자가 된 보살은 빔비사라 왕이 다스리는 라자가하 도시에 도착해 걸식하여 지냈다. 어느 날 걸식하는 보살을 본 빔비사라 왕은 그 수승한 용모에 반해 사람을 보내 보살을 살피게 했다. 보살이 수행할 당시 출가자는 나무뿌리를 거처로 삼고, 쓰레기더미에서 주은 누더기로 만든 옷을 의복으로 삼고, 탁발한 음식을 먹이로 삼고, 소의 썩은 오줌을 약으로 삼으며 생활했다. 보살 역시 이와 같은 길을 걸었다. 보살은 알라라까라마와 웃다까라마뿟다라는 스승을 만났으나, 결국 그들의 곁을 떠나 네란자라 강이 흐르고 있는 우루웰라 숲으로 향했다.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 보살은 “물에 빠졌던 나무라도
▲ 간다라 2~3세기,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출가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석가보살은 먼저 자신의 긴 머리칼을 자르고 머리에 썼던 보배로 장식된 관을 벗었다. 몸에 걸쳤던 여러 장신구 역시 이제 수행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되었다. 보관(寶冠)과 장신구를 벗어 마부 찬나에게 맡기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가지고 카필라성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아내 야소다라에게 전하거라. 바른 깨달음을 이루면 다시 돌아가 법으로써 서로 제도할 것이니, 마음을 고요하게 해 세상의 영화를 그리워하지 마소서”(‘보요경’ 고차익피마품)라고.석가보살의 출가 수행기에 일어난 사건 가운데 불전 미술의 소재로 채택된 사건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마부 찬나와
▲ 간다라 2~3세기, 캘커타 인도박물관. 싯다르타 태자는 어둠의 세계를 버리고 광명의 길로 나섰다. 태자로서의 신분을 버리고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출가라 하며, 부처님이 되기 위한 첫 걸음이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남인도 불전미술에서 부처님의 육신의 탄생보다 정신적 탄생을 의미하는 출가를 강조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보살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출가부터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룰 때까지의 수행자를 보살이라 부르겠다. 보살은 마부 찬나와 애마 깐따카를 데리고 성을 넘어 출가의 길을 나섰다. 이때 사천왕이 말 발굽을 받쳐 소리나지 않게 했고, 애
▲ 간다라 2~3세기,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 싯다르타 태자는 몇 살에 출가를 했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29살에 출가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왕위 계승자인 싯다르타 태자가 세속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수행자의 길로 나아가기로 한 출가 결심은, 불교사에서 중대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카필라성을 나오던 날 밤의 일은 많은 불전(佛傳) 경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보요경’에는 마부 찬나에게 애마 깐따카를 준비하도록 하는 품이 따로 있다. 출가 전날 밤 출가를 단행하려는 싯다르타 태자와 출가를 막아보려는 마부 찬나와의 대화가 펼쳐지고 있다. 싯다르타 태자는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살며시 일어
▲싯다르타 태자의 궁중생활 (2~3세기, 파키스탄 카라치박물관).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 전 궁중생활은 어떠했을까? ‘본생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아버지 정반왕은 아들을 위해 세 철에 알맞은 세 채의 궁전[三時殿]을 지었다. 하나는 9층이고 하나는 7층이며 또 하나는 5층이었다. 그리고 4만의 무희들이 보살을 모시고 있었다. 보살은 마치 천왕이 천녀들에게 둘러싸인 것처럼 아름답게 장식한 무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남자가 없는 여자들만이 연주하는 음악을 즐기며 철에 따라 거기에 맞는 궁전에 살고 있었다. 라후라의 어머니인 야소다라는 그 첫째 부인이었다.” 여러 불전에 의하면 싯다르타 태자는 사문유관 이후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불전문학에서는 싯닷타 태자가 동서남북 네 문을 통해 밖에서 경험한 일들을 사문유관(四門遊觀) 또는 사문출유(四門出遊)라고 한다. 왕궁의 호화로운 환경 속에서 인생의 부정적인 면을 경험하지 못한 싯닷타 태자는, 어느 날 나들이를 나갔다가 동쪽 성문에서 나이든 허리가 굽은 노인을 만났고 남쪽 성문 근처 길가에서 아픈 사람을 보았다. 서문을 나서다가 한 무리의 장례 행렬과 맞닥뜨렸고, 북문 근처에서 머리와 수염을 깎은 수행자를 만났다.싯닷타 태자는 노인과 아픈 사람 그리고 장례식을 보고는 인생의 고통과 허무를 깨달았고, 출가 사문을 보고
▲ 2~3세기, 간다라,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 싯다르타 태자는 누구와 언제 혼인했을까? 결혼한 나이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에 따라 16세·17세·19세 설 등으로 다양하고, 아내에 대해서도 여러 명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설은 라훌라를 낳은 야소다라가 태자의 부인이라는 것이다. 정반왕은 염부수 아래에서 첫 선정에 든 아들 싯다르타 태자를 본 이후 그를 빨리 결혼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석가족의 장로회의를 열어 싯다르타의 결혼 문제를 논의했다. 5백명의 대신들이 자기의 딸을 추천하자 정반왕은 그 결정권을 싯다르타 태자에게 맡겼다. 싯다르타 태자는 “젊고 건강하며 아름다우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삿된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