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생애에는 매우 드라마틱한 부분이 여러 번 있다. 탄생부터 출가, 수행, 교화, 입멸까지 곳곳마다 매우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마도 치열하고 진실한 삶의 아름다운 여운일 것이라 생각된다.고타마는 출가 후 직접적으로 지도해줄 스승을 찾아 학습했다. 하지만 출가 때 품은 ‘인생의 궁극적인 답’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홀로 수행하기로 하고 정진에 들어갔다. 홀로 시작한 정진은 곧 고행으로 이어졌다. 지금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아프카니스탄에 있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고행상이 그것을 잘 대변하고 있다.조각으로 조성한
오늘 법회에 오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30년 전 부산 국제시장에 갔을 때 콩나물 파는 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30년 후에도 그분은 그 자리에 똑같이 앉아서 콩나물을 팔고 계셨습니다. 30년 동안 그분이 들고 다녔던 그 콩나물 바구니 안에는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이 담겨 있을까. 저기에는 아들을 낳고 며느리를 보고 손주를 키웠던 그분의 말할 수 없는 행복과 애환이 모두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저 자신을 돌아볼 때, 나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으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회향일인 11월13일은 개인적으로 울산 해남사 무료급식소 봉사일이었다. 아침 시간에 일찍 법당을 참배하고 ‘금강경’을 7독 했다. 이후 법당을 나와서 무료급식소에서 1시간30분 동안 봉사했다. 다시 법회 시간에 맞춰 법당에 올라가 ‘금강경’을 독송하고 오후 일정까지 빠듯하게 독송하면서 회향일 저녁까지 21독을 원만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날마다 21독을 하는 체크리스트도 들고 다녔다. 회향한 뒤 두 아이에게도 편지를 써서 보냈다. 기도의 감동을 가족들과 나누며 회향할 수 있어서 기쁘다. 법회를 마치고 얘기를 나눠보니 불자님
단풍이 예쁘게 물들어가는 지난 10월24일부터 시작된 울산 해남사의 ‘금강경’ 21일 21독 독송 대법회와 인연을 맺으면서 경험한 수행담을 짧은 글로 풀어내고자 한다. 올해 봄학기에는 해남사에서 ‘금강경’ 수업을 받았다. 그 수업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예전 통도사 서운암에서 철야정진을 하며 ‘금강경’ 독송을 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내용도 모르고 뜻도 새길 겨를 없이 독송에 매진한 시절이었지만 당시 느낀 환희심은 상당했다. 그때 ‘금강경’ 기도를 하던 시기는 아버지께서 병원에 계시는 3년 동안이었다. 이 기도 기간 중 아이가 어렵게
자장은 선덕여왕대(632~647) 당(唐)에 유학하고 중국의 선진문화 수입에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대국통(大國統)에 취임하여 계율을 정리하고 교단을 정비하여 다음 ‘중대’기 불교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또한 왕실불교・국가불교의 상징물로서 황룡사 9층탑을 건립케 하고 신라의 불국토설(佛國土說)과 진종설(眞宗說)로 ‘중고왕실’을 신성화하는 정치이념을 수립케 하였다. 그러나 고승으로서는 비교적 단명이라고 할 수 있는 50대 전후에 지방에 쫓겨나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불운을 맞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보다 한 세대 앞을 살
어제는 평소 우리 복지관에 관심을 갖고 아껴주시는 후원자 및 봉사자님을 모시고 ‘좋은 인연’이라는 행사를 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해주신 봉사활동에 대한 고마움, 또 어르신의 이상(理想)이 일상이 될 수 있게 해주신 후원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자리였습니다. 올 한 해도 이런 멋진 분들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이 자리에서 열린 강연이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 들기 전에 감사 일기를 써보라고, 하루에 다섯 가지만 감사한 일을 적어보라고, 상대를 이해하면 용서 못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가 가
사찰에서 접하게 되는 불상과 건축물, 그리고 다양한 불화와 조형물들을 보면서 그 속에 담긴 불교의 가르침과 의미를 잘 몰라 궁금해 하는 분들을 자주 만나곤 합니다. 대웅전, 무량수전, 극락전 등등, 각기 다른 사찰 전각 이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지,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은 어떻게 다른 부처님들이고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 질문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 다양한 조형물, 불화들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왜 저런 형태를 보이는지 도 궁금하죠. 오늘 강의에서는 사찰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사찰에서 만나는 다
뭍에서 일었던 조선의 억불 소용돌이는 섬까지 몰아쳤다. 특히 곽홀 목사(牧使)부터 이형상 목사가 있던 시기(1567∼1702)에 종교편향적 훼불사태가 급속하게 확산됐다. 고려의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던 조선의 허응보우(虛應普雨) 스님이 제주도로 유배됐다 변협 목사에게 장살(杖殺)당한 때도 이 시기다. 이후 200년 동안 제주의 법등은 점차 그 빛을 잃어갔는데 그 시기를 ‘무불시대(無佛時代)’라 이르기도 한다.1909년 제주 출신의 비구니 봉려관(蓬廬觀) 해월(海月) 스님이 관음사를 창건했다. 한 사찰의 개산(開山)을 넘어선 근대 제주불
지난 여름 미국 실리콘밸리에 다녀왔습니다. 2주간의 여행이었는데요. 처음이어서 그런지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습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집중하는 첨단기술의 도시가 어떤지 궁금했습니다. 살만한 동네인지, 잠시 여행하기 좋은 곳인지 살펴보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특히, ‘여기에 명상센터를 세우면 어떨까?’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잠시 머물면서 느꼈던 점들을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숙박과 교통수단이 인상 깊었어요. 우버(Uber)와 에어비앤비(Airbnb)라는 앱의 혜택을 참 많이 받았는데요
이번 집중수행 동안 어떻게 닙바나(Nibbana, 열반)를 증득할 수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십빠라미(pāramī, 바라밀, 완성)를 완성하게 되면 마침내 빠라미가 무르익고 닙바나를 실현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닙바나를 실현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아리야(Ariya), 성인이라고 합니다. 성인들이 누구입니까? 예류자(預流者), 일래자(一來者), 불환자(不還者) 그리고 아라한(阿羅漢)입니다. 그분들은 사성제를 통찰했기 때문에 닙바나를 성취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수능 100일 기도를 함께 올렸던 수능 학부모님들도 이 ‘금강경’ 독송 정진법회에 동참하고 계셨다. 덕분에 나는 저녁기도에 동참하자마자 저녁예불을 올리고 ‘금강경’ 독송에 동참했다. 이전에 몇 차례 읽어본 적은 있지만 따라 읽기란 쉽지 않았다. 조금만 딴 생각을 하면 흐름을 놓치는 상황이 반복됐다. 정신 차리고 독송을 따라 가느라 처음 저녁기도에 동참한 날은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른 채 ‘금강경’을 반복적으로 독송했다. 시계를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이렇게 저녁기도에만 동참해도 ‘금강경’을 6회 내지 7회 정도
지금까지 13회에 걸쳐 27대 진평왕대(579~632)부터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까지 83년 동안 용수(龍樹)‧춘추(春秋) 부자의 정치적 성장과 즉위과정을 중심으로 하여 왕권강화와 지배체제의 정비과정을 추적하여 보았다. 신라의 ‘중고’기에서 ‘중대’로 전환되는 시기의 고대국가의 발전과정 문제를, 용수‧춘추 부자의 정치적 성장과정을 중심으로 하여 이해를 추구한 것은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동륜태자‧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계통을 성골(聖骨), 진지왕(사륜)‧용수‧춘추(태종무열왕) 계통을 진골(眞骨)로 신분을 구분하고, 이
네 아이를 둔 엄마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절에 기도하러 가는 것은 항상 마음만 앞서는, 내게는 참으로 먼 현실이었다. 통도사 울산포교당 해남사를 재적사찰로 삼고 한 달에 한 번 내지 두 번은 법회에 동참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천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에 가는 날을 차일피일 미루며 하루하루 바쁜 일상만 반복하기를 꽤 오랜 기간 보내야 했다. 5년 전 즈음일까, 나와 주변의 일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상황을 마주했다. 지푸라기라도 붙들어야 되겠다는 심정일 때 주변에 계신 분들이 100일 기도를
저의 일상은 죽음과 매우 친근합니다. 신도나 가족, 이웃 등 인연들은 그물망처럼 이어져, 그들의 병고(病苦)와 죽음을 함께 합니다. 병문안을 시작으로 장례식장, 입관 등 항상 기도를 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이 보기에, 죽음은 항상 제 옆에 붙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의 고통이 저를 아프게 합니다. 제 기도가 모자란 듯해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때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 듣고 싶어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죽음'이란 그림자가 짓눌러 숨을 쉬기 힘들면, 새벽빛이
간다라 초타 라호르(Chota Lahore. 파키스탄 북서지역)의 ‘길리 마을’ 바라문 집안에 성스러운 아들이 태어났다. 거듭된 유산에도 스님을 간호한 공덕으로 낳은 마라난타(摩羅難陀) 스님이다. ‘분드 마을’의 절에서 수행하던 스님은 368년 고향을 떠나 대장정에 올랐다. 간다라에서 시작된 발길은 스왓트(Swat), 길기트(Gilgit)를 지나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넘어 쿠처(Kucha, 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돈황(敦煌), 동진(東晋)을 거쳐 16년 만인 384년 호남의 한 항구에 닿았다. 백제 땅에 처음으로 법음이 전
매일 아침 일어나 천수경과 함께 신묘장구대다라니 7독 기도를 시작할 즈음, 남편과 아이들은 절이 아닌 집에서 아내의 그리고 엄마의 기도 소리를 듣고는 오히려 무척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훗날 웃으며 듣게 된 바로는, 나에 대한 염려 이전에 ‘과연 저 기도가 며칠이나 이어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는 얘기였다. 돌이켜보면 가족들은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점검하며 한편으로는 응원해 주었던 셈이다.그러한 가족의 무관심한 듯한 관심이 나에게는 수행의 큰 자극이 됐다. 초반에는 어떻게 해서든 매일 아침 기도를 이어가고자
어릴 때는 언제나 계절이 우리들의 감성보다 더디게 흘렀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봄은 쉬이 오지 않았고, 여름, 가을 또한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유독 봄을 많이 기다렸던 것 같다. 3학년 때 국어 교과서에 나온 시를 외우고 또 외우며 봄을 기다렸던 생각이 새록새록 하다. 입김으로 호호/ 유리창을 흐려 놓고/ 썼다가는 지우고/ 또 써 보는 글/ 봄 꽃 나비/봄 꽃 나비/ 봄아 봄아 오너라 어서 오너라/ 봄이 되면 나는 나는 새로 사학년 (‘봄 꽃 나비’)교실청소로 유리창을 닦으며 이 글들을 써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글을 쓴
28대 진덕여왕은 즉위 8년(654) 3월에 사망하고, 김춘추가 뒤를 이어 29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되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대 국내정치와 대당외교의 실권을 장악했던 최고의 실력자였으나, 왕위계승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김춘추에게는 강력한 경쟁자로서 알천(閼川)이 있었는데,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上大等)의 직위에 있었다. ‘삼국유사’ 권2 진덕왕조에 의하면, 진덕여왕 때에 귀족세력을 대표하던 알천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무림공(武林公)・염장공
부처님오신날마다 친정어머니 손을 잡고 절에 다녔고, 친정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봉사활동을 보며 자랐다. 하지만 막상 스스로 기도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나는 둘째아이의 동자승 출가를 계기로 부산 홍법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지금 고3인 둘째가 6살 되던 해였다. 다른 때와 같이 부처님오신날 친정어머니와 홍법사를 방문했다. “동자승 한번 해보면 좋겠다”라는 주지스님 말씀과 친정어머니 권유로 7살에 동자승 3기에 참여했고, 그 인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3년째 홍법사와 함께 하고 있다.‘정말, 해도 될까…?’ 막상 동자승을 신청했
얼마 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자리 포럼을 비롯해서 저희 기관을 후원해주는 봉사그룹 KLC 회원들의 모임, 미술관 신인작가전 ‘이날생전’, 사회복지행정학회 등을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책상을 벗어나서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하는 일들이 참 좋았습니다. 특히 강릉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온 것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학회를 다니면서 사회복지 환경의 변화를 알아보고, 배운 것을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들이 우리가 만나는 클라이언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면서 각자의 분상에서 열심히들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