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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결사 인도순례 18일차] 목숨 걸었던 구법승들의 목적지 ‘날란다’에 들다

2월26일, 라즈기르 떠나 또 다른 성지 바이샬리 향해 나아가
날란다대학, 순례단에 공양…“일찍이 본적 없는 성스런 불사”

2월26일 새벽 라즈기르를 떠나 날란다를 향하는 순례단의 출발. 
2월26일 새벽 라즈기르를 떠나 날란다를 향하는 순례단의 출발.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2월26일 교단 성장의 든든한 터전이 되어준 라즈기르를 떠나 날란다로 향했다. 라즈기르가 ‘법화경’과 ‘염화미소’의 고향이자 최초의 도량 ‘죽림정사’와 1차결집의 장소 ‘칠엽굴’ 등이 남아있는 교단 성장의 현장이라면 날란다는 세계 최초·최대 불교대학이었던 날란다사원, 수 많은 구법승들이 목숨을 걸고 찾아나섰던 교학의 중심지였다.

날란다사원은 5세기 굽타왕조의 샤크라티디아왕이 창건했다. 이후 여러 왕들이 대를 이어 사원을 증축했다. 무려 6명의 왕들이 정성 들여 세운 날란다사원은 7세기 중국의 구법승 현장 스님이 방문할 당시 이미 인도를 넘어 세계 최대 규모이며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사원이자 대학이었다. ‘보대가 별처럼 줄지어 섰고 옥루가 산처럼 솟아 있었다’는 현장 스님의 기록이 말해 주듯 그곳에서는 매일 100여개의 강좌가 열렸고 1만여명의 스님들이 2000여명의 교수들로부터 불교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학문을 배웠다.

 1951년 인도 정부에서 세운 ‘나바(새) 날란다대학’이 순례단의 방문에 맞춰 아침공양을 보시했다.
1951년 인도 정부에서 세운 ‘나바(새) 날란다대학’이 순례단의 방문에 맞춰 아침공양을 보시했다.

전 세계의 불교학자와 스님들이 날란다사원에서 공부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중국 밀교의 개척자인 금강지와 선무외 스님이 모두 이곳에서 공부했고, 북송 초기 중국으로 건너가 많은 경전을 번역한 법현 스님도 이곳 날란다의 동문이었다. 신라 출신의 혜업, 아리야발마 스님은 이곳에서 공부하다 입적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스님 9명도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 세계의 뛰어난 인재들이 경쟁하듯 모여드니 입학 또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 스님도 이곳에서 공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야 할 정도였다.

순례단은 날란다사원을 방문하지는 못했다. 순례길 옆으로 보이는 담장 사이로 날란다사원의 유적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순례단은 날란다사원을 방문하지는 못했다. 순례길 옆으로 보이는 담장 사이로 날란다사원의 유적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세계 최고·최대의 대학이자 7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날란다사원은 12세기 말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철저히 파괴돼 유적만 남았다.
세계 최고·최대의 대학이자 7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날란다사원은 12세기 말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철저히 파괴돼 유적만 남았다.

그러나 ‘생겨난 모든 것은 변하고 무너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 앞에서 날란다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세계 최고·최대의 대학이자 7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날란다사원은 12세기 말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건물뿐 아니라 사원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보관돼 있던 장서들, 당대 인류 정신문명의 결정체들은 한 줌 재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불길이 밤낮으로 타올랐고 연기가 6개월 동안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인류가 쌓아 올린 가장 위대한 지혜의 보고가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옛 명성을 잇겠다며 설립된 ‘날란다대학’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새’ ‘국제’ ‘진’ 등의 접두어를 붙여 운영 중인 ‘날란다대학들’ 가운데 1951년 인도 정부에서 세운 ‘나바(새) 날란다대학’이 순례단의 방문에 맞춰 아침공양을 보시했다. 순례단을 맞이한 니하르 날란다대학 총장은 “스님과 재가자가 함께 성지를 걸어서 순례하는 이렇게 성스러운 모습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며 “소박한 공양이지만 순례를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인사했다. 회주 자승 스님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팔만대장경 ‘반야심경’ 동판을 선물했다.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의 고향 바이샬리를 향하는 길에서는 재가불자들이 부처님 이운을 맡았다.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의 고향 바이샬리를 향하는 길에서는 재가불자들이 부처님 이운을 맡았다.

그러나 순례단은 날란다사원을 방문하지는 못했다. 다만 순례길 옆으로 보이는 담장 사이로 날란다사원의 유적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인도의 유적지는 해가 떠오르면 문을 열어 해가 질 즈음 문을 닫는다. 그러나 유네스코가 관리하는 세계문화유산의 경우는 오전 9시부터 관람이 가능하다. 순례단은 오전 6시30분 날란다에 도착해 공양 시간을 포함, 1시간가량 머물렀다. 날란다사원 입장과 참배는 일정상 불가능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순례단은 다시 순례에 마음을 모았다. 18일차 회향지인 케워이로 향하는 길에는 우바이와 우바새가 부처님을 이운했다. 우바이 이태경, 성계순, 정유림 불자와 우바새 정충래, 주윤식, 이영규 불자가 부처님을 품에 모시고 총 10km를 순례했다. 이운에 동참한 불자들은 ‘감동’ ‘기쁨’ ‘행복’ ‘영광’이라는 말로 소감을 밝혔다.

정유림 불자는 “감기에 설사, 예전에 수술했던 다리의 통증 등으로 조금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부처님을 품에 모시는 순간 모든 고통이 싹 사라졌다”며 “환희심에 눈물이 날뻔했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부처님을 모시고 걷고 싶다”고 미소를 지었다.

정충래 불자도 “인도도 처음, 부처님을 가슴에 안은 것도 처음이다. 더구나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의 나라를 순례한 이가 몇이나 되겠냐”며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기쁘고 감격스러웠고, 온 신경을 발바닥에 집중해 정성을 다했다. 자연스레 마음 수행도 되는 것 같아 꼭 다시 경험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은 이날 케워이에서 하루를 묵은 후 ‘유마경’의 이야기 품은 성지 대림정사와 비구니 승가가 탄생한 도시 바이샬리를 향해 나아간다.

케워이=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671호 / 2023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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