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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결사 인도순례' 여정서 드러난 자승 스님 진면목은

부처님 따라 43일간 1167km 전인미답의 인도순례 앞장 서서 걸으며 대중들 직접 인솔
무릎·어깨 등 극심한 통증 견디며 매일 108배…가장 먼저 일어나 천막 일일이 돌며 살펴
공양 적게 하는 이엔 "더 먹으라” 격려…회향 20일 앞두고 스스로는 오후불식 초심 지켜

자승 스님은 순례 기간 내내 “한국불교가 위기를 깨닫지 못하면 결국 인도불교처럼 법은 사라지고 유물로 전락한 불교가 될 것”이라며 한국불교계의 각성을 촉구했다.
자승 스님은 순례 기간 내내 “한국불교가 위기를 깨닫지 못하면 결국 인도불교처럼 법은 사라지고 유물로 전락한 불교가 될 것”이라며 한국불교계의 각성을 촉구했다.

“부처님께서는 정각을 이루시고 45년 동안 법(法)만 전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는 포교만 하신 것입니다. 열반 이후에도 제자에게 두 발을 보이시고, 다비를 통해 여덟 나라에 사리를 분배하면서 마지막까지 법을 전했습니다. 사부대중이 함께하지 않으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제 국민 속으로, 대중 속으로, 중생 속으로, 사부대중 속으로 떠나지 않으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없습니다. 사부대중이여, 떠나라.”

3월15일 상월결사 회주 자승 스님은 다시 마이크를 쥐었다. 룸비니 기도법회를 마치고 한국 사찰 대성석가사를 참배한 직후였다.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배어있었다. 뼈아픈 자책과 회한, 절체절명의 위기의식도 묻어났다. “우리 한국불교는 부처님 법을 전하기보다 불사하는 일에 집착했다”며 “여름에 모시옷 빳빳이 다려 입고, ‘폼생폼사’하는 이런 불교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스님은 인도순례 여정에서 여러 차례 포교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앞서 사르나트 녹야원에서의 21세기 전도선언에서는 “인도에 스님이 없고 신도가 부재해 결국 유적으로만 남게 됐고 1700년 역사의 현재 한국불교 또한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한국불교가 위기를 깨닫지 못하면 결국 인도불교처럼 법은 사라지고 유물로 전락한 불교가 될 것”이라며 한국불교계의 각성을 촉구했었다. 출가재일을 하루 앞둔 3월8일 나가르나우사에서도 “불교는 갈수록 어려워질 터인데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불교가 왜 필요하겠냐”며 “사회에 필요한 성직자도, 우리의 대를 이어갈 출가자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들의 안일함이 원인이다”라고 탄식했다.

부처님 전법의 길을 따라 43일간 1167km를 도보로 순례하는 상월결사 인도순례 ‘생명존중, 붓다의 길을 걷다’는 스님의 비장한 염원에서 비롯됐다. 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성찰과 참회, 포교와 원력의 결집이 없으면 한국불교 미래가 없다는 절박함에서였다. 2019년 한겨울 허허벌판에서 90여일 간 정진한 상월선원 천막결사를 시작으로 2020년 국난극복 자비순례, 2021년 삼보사찰 천리순례, 2022년 평화방생순례까지 멈춤 없이 이어온 순례의 발걸음과 맞닿아 있었다.

맨 앞에서 순례단을 이끌고 있다.
맨 앞에서 순례단을 이끌고 있다.

2월22일 마하보디사원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기원법회’에서 소회를 밝혔듯 스님은 한국불교가 나아갈 길에 대해 틈나는 대로 제시했다. 포교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질 때 가능함도 누누이 강조해왔다. 2003년 은사 정대 스님이 입적한 후 (재)은정불교문화진흥원 이사장에 취임한 스님이 학자, 불교단체, 청소년들의 안정적인 생활여건 조성을 위해 장학금과 생활격려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스님이 착안해 시작된 나란다축제는 전국의 청소년들이 흥미롭게 불교에 다가설 수 있는 불교계 대표 축제로 성장했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두 번의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는 동안이나 이후에도 포교의 중요성을 역설해왔다. 지난해 12월18일 상월결사를 사단법인으로 새롭게 출발할 때 스님은 설립 취지가 ‘포교’에 있으며 그것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할 것을 분명히 했다.

“어린이법회를 여는 사찰이 전국에 100여 곳이 되지 않고, 이마저도 어린이가 없어 형식에 불과한 곳이 대부분입니다. 청소년법회는 더 심각해 종립 중고등학교마저 입시가 우선되면서 법회가 뒷전으로 밀리는 등 교법사들이 할 일이 없습니다. 한국불교의 허리인 대학생법회도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대불련 캠프에 불과 300여명이 참석하는 등 과연 대학생 불자가 몇이나 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사단법인 상월결사는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많은 사업들 가운데 포교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할 것입니다.”

포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는 일이며,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일이며, 한국불교를 중흥하는 일이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는 옛 선사의 말마따나 그것은 부처님을 친견하는 일에서 시작돼야 했다.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대중들이 따라 걸으며 그 위대한 가르침을 360개 뼈마디와 팔만사천 털구멍 하나하나에 새겨 넣어야 했다. 눈물과 땀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의 참회가 있을 때 한국불교의 변화가 시작되리라 믿었다. 

아이들을 만나면 늘 환한 미소를 짓는다.
아이들을 만나면 늘 환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도보 인도순례는 전인미답의 험난한 길이었다. 코로나19의 여파가 채 가시지도 않은데다가 또 다른 전염병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술한 인도의 치안 상황, 갑작스런 사고, 위중한 환자 발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성사시켜야 했다. 운문문언 선사가 “한 가지 일을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고는 한 가지 지혜를 체득할 수 없다(不因一事 不長一智)”고 했듯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한국불교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었다. 

스님의 원력에 많은 대중들이 공감했고 어떻게든 성사시켜야겠다고 뜻을 모았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인도순례는 점점 구체화됐다. 순례대중도 마침내 확정됐다. 비구 52명, 비구니 11명, 우바새 6명, 우바이 6명으로 총 75명이었다. 기자단 16명과 운영지원단 12명도 동참했다. 부처님 탄생부터 열반에 이르는 7대 성지, 1167km를 하루 평균 25km를 걸으며 43일간 진행되는 대장정이었다. 상월선원 천막결사에서 그랬듯 청규는 서릿발 같았다. 스님들은 행선 시 승복과 대가사를 수하고, 재가자도 순례가사를 착용해야 했다. 행선 시 묵언은 필수이며, 염불, 화두, 진언 등 각자 선택한 수행법에 따라 정진하는 것으로 정했다. 매일 108배와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도 독송하기로 했다. 휴식시간에 낮은 소리로 대화하고 공양은 남기지 않기로 했다. 개인위생을 위해 마스크는 항상 착용하고 휴대전화는 숙영지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엄격한 청규가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일깨워주고, 대중들의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자승 스님을 비롯한 순례단은 2월9일 조계사에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만이 불제자의 사명임을 바로 알아 저희가 걷는 수행의 길을 중생의 고통을 덜고 행복의 문을 여는 진실한 구도와 실천의 길로 여기겠다”며 “절박한 심정으로 순례를 떠나는 저희들의 수행은 오직 당신의 가르침 위에 있는 것이니 비록 마음과 몸이 무너지는 경계에 처하더라도 결코 물러섬이 없이 정진 또 정진하겠다”고 발원하고는 인도로 향했다.

쿠시나가르 열반당 스님에게 ‘반야심경’ 경판을 전달했다.
쿠시나가르 열반당 스님에게 ‘반야심경’ 경판을 전달했다.

2월10일 순례단은 바라나시 사르나트에 도착했다. 입재식을 하루 앞두고 높이 34m의 다메크스투파가 서 있는 초전법륜지를 찾았을 때였다. 자승 스님은 대중들에게 간곡한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전에 자비순례, 삼보사찰순례, 평화방생순례 때에는 없었던 이례적인 일이었다.

“우리가 여기 오기 위해 3년을 부단히 노력했어요. 그러나 이 43일의 인도순례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기에 나만 생각해야 해요. 나만 생각한다는 것이 내 이기심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불편하면 내 옆의 도반도 불편하고, 내가 화가 나면 내 옆의 도반도 화가 납니다. 이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래야 이 43일을 원만히 회향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순례의 기본은 차별 없음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순례하면서 똑같이 걸었고, 똑같이 먹었고, 똑같이 공양 배분했습니다. 물론 이번 순례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2월11일 녹야원 입재식에서 자승 스님은 순례단을 대표해 전도선언을 읽어나갔다. 진리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바른길을 배워 실천하고, 항상 겸손하며, 세상의 번영과 행복을 향해 순례에 나서겠다는 결연한 다짐이었다. 이어 스님이 한국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부처님을 품에 모시고 인도순례의 첫발을 내디디면서 본격적인 순례의 막이 올랐다.

길은 대부분 순탄하지 않았다. 줄지어 늘어선 대형트럭들은 요란한 경적과 검은 매연을 내뿜었다. 차량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는 귀청을 찢듯이 노랫가락을 쏟아냈다. 도로 옆은 두툼한 흙먼지가 쌓여 차량이 지나가고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뿌연 먼지가 몸을 타고 하늘로 솟구쳤다. 도로 곳곳에는 움푹 파인 구덩이들이 부비트랩마냥 도사리고 있었다. 언제라도 대형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에 수시로 봉착했다. 밤낮 온도가 15도 이상 차이가 나면서 감기, 배탈 환자가 늘어갔다. 하루 6~7시간씩 진행되는 행선으로 인해 발가락 물집이 유행하더니 관절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나왔다. 자승 스님의 걱정도 깊어졌다. 스님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스님 자신도 감기로 인해 목이 잠기는 등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단 한 명의 중도 탈락자 없이 서로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도반이 서로 위로하고, 도와주며, 걱정해 주어야 합니다. 걸어서 못가면 휠체어를 타고, 이마저도 힘들면 앰뷸런스를 타더라도 모두 다 회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순례의 길 위에 있습니다. 아픔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받아들이고, 불편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이번 순례를 원만히 마칠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순례대중은 알았다. 지금 자승 스님의 몸 상태가 가장 좋지 않으며 정신력으로 고통을 견뎌내고 있음을. 스님은 양쪽 무릎 연골이 크게 손상돼 무릎을 구부리거나 펴는 게 쉽지 않았다. 평소에도 심한 통증이 뒤따랐다. 젊은 시절 산행에 능했던 스님은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관악산 연주암 주지를 맡아 수시로 산을 오르내렸다. 일반인 걸음으로 1시간30분~2시간 소요되는 거리를 40분이면 올랐고, 하산 시간은 20분이면 족했다. 산을 뛰다시피 오르내리면서 무릎에 큰 부담이 갔고, 심각한 연골 손상을 가져왔다. 

심한 무릎 통증에도 108배를 거르지 않는다.
심한 무릎 통증에도 108배를 거르지 않는다.

2019년 상월선원 천막결사 때 의자에 앉아서 정진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오랜 시간 의자에 앉는 일은 안정된 자세의 결가부좌보다 훨씬 고되고 체력소모가 컸다. 냉기도 좌복 위보다는 의자에 앉았을 때 훨씬 더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공간에서 매일 14시간 이상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정진했던 것은 보통 결연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애초 불가능했다.

인도순례 전부터 스님은 감기와 인후통을 심하게 앓았다. 그 증상들은 순례 기간에도 이어졌다. 좌골신경통에 디스크 협착, 병원에선 오른쪽 어깨 수술 시기가 지난겨울이 마지노선이라고 했지만 인도순례로 인해 미뤘다. 게다가 설사에 둘째 발가락은 이미 신경까지 마비됐지만 날마다 25km를 걷고 한 차례도 108배에 빠지지 않았다.

스님은 솔선수범하고 순례대중을 세심히 살폈다. 새벽 2시가 기상이지만 스님은 1시간 일찍 일어나 숙영지 텐트를 돌며 매일 기도를 이어갔다. 혹 앓는 소리가 나는 텐트가 있으면 기억했다가 조장회의 때 도와줄 것을 당부했다. 행선 중 휴식시간에도 “출발 5분 전”이라는 소리가 들려오면 슬그머니 일어나 대열의 맨 앞에 섰다. 대중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이었다. 새벽에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일어날 시간에 가사장삼 갖춰 입고 예불장소에 먼저 나오니 순례 내내 정시에 출발할 수 있었다. 또 대중들이 졸 것 같으면 걸음을 빨리하고 체력적으로 부담이 될 것 같다 싶으면 속도를 늦추는 것도 스님의 세심한 배려였다.

“차별 없는 순례”를 강조하듯 순례 선두도 조별로 돌아간다. 공양도 그 순서대로 이뤄진다. 공양 때면 전체 대중들을 살펴 적게 먹는 이가 있으면 더 먹고 힘내라고 다독인다. 회향 20여일을 앞두고 정작 스님 자신은 오후불식을 지키고 있다. 그런 스님 앞에서 누가 힘들다고 하겠으며, 순례의 초심을 잃을 수 있을까. 스님에 대한 찬탄이 이어지는 이유도 안목과 결단력, 인내력과 자상함에서 비롯된다.

부처님이 마지막 목욕한 카쿠타강에 손을 담그고 있다.
부처님이 마지막 목욕한 카쿠타강에 손을 담그고 있다.

“시대정신을 읽는 안목이 탁월하다. 순례를 통해 부처님의 평화와 생명존중 사상, 시대정신을 대중들에게 일깨우고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붓다팔라 스님) “대중을 먼저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말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실천한다. 행동을 통해 감동을 주고, 감동을 통해 불심을 높인다.”(호산 스님). “스님께선 어깨, 허리, 무릎 등이 성치 않아 우리 의료팀 입장에선 출발 때부터 가장 주의 깊게 봤다. 그러나 어떤 힘든 상황에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분명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도 묵묵히 대중을 이끄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김명숙) “공교롭게도 내 텐트 위치가 회주스님 앞이다. 순례가 끝나면 통증에 앓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대중 앞에서는 항상 웃으시고, 찡그리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심우 스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탁월하다. 인도순례를 통해 보여주기가 아닌 진심으로 불교를 사랑하고 한국불교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묘수 스님) “솔선수범으로 다른 이들을 일깨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도 한국불교를 중흥시키는데 일조해야겠다는 다짐이 더 확고해졌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 특별함이 있다.”(범해 스님) “이 척박한 곳에서 계획하고 말씀했던 내용들을 빈틈없이 이뤄내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이다.”(이태경) “천막결사 때부터 일관되게 한국불교의 위기를 전하고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스스로 펼쳐내 보이고 있다. 현실과 함께하는 현장, 현장과 함께하는 삶, 삶과 함께하는 불교의 모습으로 전환하기 위한 걸음이었다.”(정충래)

자승 스님은 바람직한 미래불교의 모습으로 ‘수행이 중심이 된 불교’ ‘세상과 함께하는 불교’ ‘사부대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불교’라고 밝힌 적이 있다. 수행 없이는 나와 남을 변화시킬 수 없고, 세상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불교가 설 자리가 없으며, 사부대중이 함께 하지 않으면 주인의식 없는 불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배탈과 감기 등으로 일시 중단했던 순례단의 108배가 재개되면서 스님의 제안으로 완성된 ‘108원력문’에도 이 같은 상월결사의 정신이 담겼다. 전무후무한 인도순례를 이끈 스님은 이제 다시 사부대중 속으로 대장정을 떠날 것이다. 그 장대한 원력의 길에 한국불교 중흥도 성큼성큼 다가오리라.

인도=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673호 / 2023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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