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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결사 인도순례 35일차] 민간에 처음 열린 네팔·인도 국경 넘어 카필라바스투 도착

3월15일, 네팔 룸비니서 인도 피프라흐와까지 26km 행선
회주 자승 스님 의지·한국정부 노력으로 걸어서 국경 통과
영일 스님 “인도순례로 전법·포교 자신감과 에너지로 충만”
법원 스님 “조계종, 전법의 종단 되도록 종회서 종법 숙의”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3월15일 탄성성지 룸비니의 감동을 뒤로 한 채 부처님이 출가 전 배우고 성장한 피프라흐와 카필라바스투에 도착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3월15일 탄성성지 룸비니의 감동을 뒤로 한 채 부처님이 출가 전 배우고 성장한 피프라흐와 카필라바스투에 도착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탄성성지 룸비니의 감동을 뒤로 한 채 부처님께서 45년 전법의 기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쉬라바스티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3월15일, 35일차 순례의 회향지는 부처님께서 출가 전 배우고 성장한 카필라바스투다.

새벽 3시 네팔 경찰의 엄중한 경호 속에 순례단은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있는 인도 피프라흐와로 방향을 잡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전날 네팔로 입국할 때 지나 온 소나울리를 통해 다시 인도 땅을 밟아야 하지만, 순례단은 곧장 국경을 넘어 피프라흐와에 들어섰다. 네팔 룸비니와 인도 피프라흐와는 이웃한 동네지만 일반인들이 넘나들 수 없는 엄연한 다른 국가다. 이를 외교부와 주인도·주네팔 한국대사관이 인도정부와 네팔정부의 허가를 받아 순례단에게 특별히 문을 열어 주었다. 회주 자승 스님의 강력한 의지와 이에 따른 한국 정부의 노력이 없었다면 족히 100km는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민간인에게 피프라흐와 국경을 개방한 첫 사례라는 역사적인 의미까지 담게 됐다.

순례단은 새벽 3시 네팔 경찰의 엄중한 경호 속에 순례단은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있는 인도 피프라흐와로 방향을 잡았다.
순례단은 새벽 3시 네팔 경찰의 엄중한 경호 속에 순례단은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있는 인도 피프라흐와로 방향을 잡았다.
순례단은 정성을 다해 배웅해 준 주네팔 한국대사관 관계자와 네팔 경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다시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행선을 이어갔다.
순례단은 정성을 다해 배웅해 준 주네팔 한국대사관 관계자와 네팔 경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다시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행선을 이어갔다.

순례단은 정성을 다해 배웅해 준 주네팔 한국대사관 관계자와 네팔 경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다시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행선을 이어갔다.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가는 길에는 인도 경찰이 순례단에게 경찰서를 휴식장소로 제공하며 차와 과자를 내놓았고, 이후에는 100여 명의 경찰이 순례단을 호위해 장관을 이뤘다.

싯다르타 태자가 자란 카필라국은 작은 나라였다. 당시 북인도에는 코살라국이나 마가다국, 밤사국, 밧지연합 등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국가들이 서로 힘을 겨루며 호시탐탐 세력 확장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자리한 농경국가 카필라국의 수도 카필라바스투에서 싯다르타는 성장했다. 스스로를 ‘태양의 종족’이라 자부했던 사캬족은 비록 작은 영토지만 비옥한 땅을 일구며 독립왕국 카필라의 자부심을 이어가고 있었다.

행선의 시간이 더해져 카필라바스투에 가까워질수록 지금껏 봐온 인도의 모습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제법 허리가 굵은 아름드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한적하고 넉넉해 보이는 호수가 길 양옆으로 펼쳐졌다. 호수 끝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된 그물 뒤로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너른 밀밭이 이어져 있었다. 숲과 호수에 둘러싸인 옥토를 일구고 사는 평화로운 카필라국의 풍경이 이와 다르지 않을 듯했다.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가는 길에는 인도 경찰이 순례단에게 경찰서를 휴식장소로 제공하며 차와 과자를 내놓았고, 이후에는 100여 명의 경찰이 순례단을 호위해 장관을 이뤘다.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가는 길에는 인도 경찰이 순례단에게 경찰서를 휴식장소로 제공하며 차와 과자를 내놓았고, 이후에는 100여 명의 경찰이 순례단을 호위해 장관을 이뤘다.
행선의 시간이 더해져 카필라바스투에 가까워질수록 지금껏 봐온 인도의 모습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행선의 시간이 더해져 카필라바스투에 가까워질수록 지금껏 봐온 인도의 모습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순례단의 행선 모습을 집에서 지켜보고 있는 인도 여성들.
순례단의 행선 모습을 집에서 지켜보고 있는 인도 여성들.

네팔 측이 주장하는 카필라바스투는 룸비니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티라우라코트라는 지역이다. 네팔은 중국 법현, 현장 스님의 기록을 근거로 티라우라코트를 카필라바스투라 주장하고 있다. 7세기 인도를 순례한 중국의 현장 스님은 룸비니에서 카필라바스투까지의 거리를 서쪽으로 약 80리, 그에 앞서 5세기 인도를 순례한 법현 스님 역시 룸비니에서 서쪽으로 약 50리 떨어진 곳에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룸비니 서쪽에 카필라바스투가 위치하고 있다는 점은 일치한다.

학자들은 이 기록을 근거로 카필라바스투의 위치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1895년 인도 고고국이 티라우라코트 동남쪽 3km 지점인 니갈리하와 마을 근방에서 아쇼카왕의 석주를 발견했다. 이를 근거로 근방에 대한 발굴 작업을 진행했지만, 건물유적 외에는 결정적인 근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제법 허리가 굵은 아름드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제법 허리가 굵은 아름드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러는 사이 카필라바스투라 추정할 만한 새로운 유적이 인도 피프라흐와에서 발견됐다. 피프라흐와는 룸비니에서 서남쪽으로 14.5km 지점, 인도와 네팔 국경에서 인도 쪽으로 불과 1km밖에는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98년이다. 당시 이 지역의 지주였던 영국인 윌리엄 펩페가 피프라흐와에 있는 스투파를 발굴하던 중 지하 5.5m 지점에서 돌로 만든 커다란 상자를 발견했다. 그 속에서는 높이 15cm, 직경 10cm 크기의 사리병 4개가 출토됐다. 사리병 가운데 한 개의 뚜껑에 브라흐만 문자로 ‘이것은 사캬족의 붓다인 석가모니의 사리병으로서 명예로운 형제, 자매, 처자들이 모신 것이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 글귀를 근거로 학자들은 이 스투파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사리를 얻어갔던 사캬족이 세운 것으로 추정했다. 그 후 1970년 이곳에 대한 발굴이 다시 이뤄졌는데 스투파 북쪽의 승원터에서 점토를 구워 만든 직경 3cm 크기의 도장과 항아리 등 4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그 가운데 하나에 ‘이 승원은 데바푸트라가 카필라바스투 비구 승가에게 기증한 것’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고, 함께 발견된 항아리 뒷면에서도 ‘카필라바스투’라는 명문이 확인됐다. 그후 1975년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km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성터로 추정되는 간와리야 유적이 발굴돼 이 일대가 카필라바스투 유적이라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게 됐다. 그러나 인도에서 주장하는 카필라바스투와 네팔의 카필라바스투는 불과 14km 거리에 불과해 나라가 나뉘지 않았다면 마치 독일의 베를린이 한때 동서독으로 나뉘었던 것처럼 모두 하나의 카필라바스투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적하고 넉넉해 보이는 호수가 길 양옆으로 펼쳐졌다.
한적하고 넉넉해 보이는 호수가 길 양옆으로 펼쳐졌다.

부처님이 유소년기를 보내고 청년이 될 때까지 머물렀던 카필라국은 이웃의 강대국이었던 코살라국의 비두다바왕에 의해 멸망했다. ‘태양의 종족’이라는 석가족의 자부심이 화근이었다. 카필라국과의 정략혼을 원했던 코살라국의 파세나티왕에게 사캬족은 ‘고귀한 혈통인 사캬족의 공주를 다른 계급에게 시집보낼 수 없다’며 하녀의 딸 바사바키티야를 공주라 속여 결혼시켰다.

바사비키티야의 아들로 태어난 비두다바왕은 어린 시절 외갓집 친척들로부터 ‘천한 여인의 소생’이라 업신여김을 받았고 왕좌에 오른 후 카필라국을 점령해 피의 복수로 모욕감을 씻었다. 비두다바의 외할아버지 마하나마는 종족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부탁하며 연못 속으로 들어가 풀뿌리에 머리카락을 동여매고 죽었지만 사캬족의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부처님 또한 ‘친족의 그늘은 시원한 법’이라며 비두다바왕의 정복 전쟁을 두 번이나 만류했지만 결국 ‘숙세의 죄업은 어쩔 수 없음’을 한탄하며 조국의 멸망을 지켜보셔야 했다.

호수 끝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된 그물 뒤로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너른 밀밭이 이어져 있었다.
호수 끝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된 그물 뒤로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너른 밀밭이 이어져 있었다.
숲과 호수에 둘러싸인 옥토를 일구고 사는 평화로운 카필라국의 풍경이 이와 다르지 않을 듯했다.
숲과 호수에 둘러싸인 옥토를 일구고 사는 평화로운 카필라국의 풍경이 이와 다르지 않을 듯했다.

순례단은 부처님의 사리가 발견된 스투파를 탑돌이 한 후 축원으로 인도순례 35일차를 회향했다. 카필라바스투에는 싯다르타가 붓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준 영광과 사캬족의 멸족을 불러온 참담한 비극이 나란히 있다. 영광과 비극의 역사가 공존하는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순례단은 쉬라바스티를 향해 내일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청소년 포교 최일선에서 정진 중인 정광고 교법사 영일 스님은 이번 순례를 위해 올해 휴가를 모두 사용했다. “짜여진 커리큘럼에 따라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 전달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졌고 전환의 계기를 만들고자 이번 순례에 동참했다. 보여지는 모습은 큰 변화가 없지만 마음속에는 전법·포교에 대한 자신감과 위의 그리고 에너지로 충만해졌다”며 “회주 자승 스님의 말씀처럼 전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포교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데 더욱 매진하겠다. 이곳에서 보고, 느끼고, 체험한 것들을 교육에 녹여 불제자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카필라바스투 마굿간 유적지를 지나는 순례단.
카필라바스투 마굿간 유적지를 지나는 순례단.
부처님의 사리가 발견된 스투파를 탑돌이 한 후 축원으로 인도순례 35일차를 회향했다. 카필라바스투에는 싯다르타가 붓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준 영광과 사캬족의 멸족을 불러온 참담한 비극이 나란히 있다.
부처님의 사리가 발견된 스투파를 탑돌이 한 후 축원으로 인도순례 35일차를 회향했다. 카필라바스투에는 싯다르타가 붓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준 영광과 사캬족의 멸족을 불러온 참담한 비극이 나란히 있다.
순례 35일차는 축원으로 회향했다.
순례 35일차는 축원으로 회향했다.

종회의원 법원 스님은 이번 인도순례를 통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걷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고, 볼 수 없었으며, 느낄 수 없었을 이 소중한 경험과 기억을 어떻게 전법으로 회향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며 “종회의원으로서 조계종이 전법의 종단이 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 개인적으로는 포교에 매진하는 승려가 되겠다고 다짐한다”고 말했다.

피프라흐와=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673호 / 2023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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