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한 기봉이 특징인 임제 선사의 활활발발한 종풍 속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여서인지 법상에서 큰소리로 포효하듯이 때로는 호령하듯이 거침없이 일갈하시는 큰스님의 모습이 오히려 익숙한 게 사실이다. 한 번씩은 법문을 듣다가 부처님도 저렇게 크게 소리치고 주장자를 내리치며 ‘방’과 ‘할’을 하면서 법문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모습일지라도 본래의 모습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달리 답을 찾을 수가 없어 한동안 마음속의 의문으로 남겨져 있었다. 경전에 비춰지는 부처님의 모습은 언제나 잔잔한 미소 속에 고요한 모습이시고 가르침 또한 조용한 어투로 찬찬히 설명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우리의 큰스님들은 그렇지 않았다. 큰소리는 법문 듣는 우리들에게 몰려드는 수마를 큰 소리
세상이 복잡해진 탓일까 사람들이 약속을 너무 쉽게 저버리는 것 같다. 이동통신의 발달로 약속에 대한 시간을 대부분 쉽게 하고 쉽게 변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간단한 만남을 위해 10번 이상 휴대통화를 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휴대전화는 물론이고 전화까지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만나고 살았는지 정말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스님은 단연 은사 스님이시다. 아무리 사사로운 약속이라도 먼저 정해지면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 한번은 전직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했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약천사를 방문하겠다며 회주 스님을 친견 할 수 있겠느냐고 통보해 왔는데 마침 스님께서는 선약이 있었다. 약속을 조정하고 맞이하는 것이 어떠냐고 건의 드렸지만 스님께서
관세음보살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자주 접하는 물음이다. 모습으로는 분명 여성이지만 양성적 존재라고 한다. 누군가 물어오면 늘 이렇게 습관적으로 말하지만 실은 내 머릿속에서도 여성적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옛 큰스님들은 복잡다단한 우리들 내면의 심리들을 경쾌하게 분석하고 정리하여 특징적인 심리적 성향을 각각 의인화하여 불보살로 이름 지은 것 같다. 누구나 갈망하는 지혜로움의 극치를 문수보살로, 한번쯤은 생각해보게 되는 실천적 삶의 의지를 집결한 보현보살, 무엇보다 우리 내면의 측은지심과 한없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존경의 심리를 담은 관세음보살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에서 우리에게 큰 의지처가 되어 준다. 우리들의 의지처가 되어주는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다보면 늘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가
우리는 흔히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한다. 물론 이렇게 말할 때는 감정에 따스한 의미를 부여하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때로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절제되지 못한 마음의 현상을 표현할 때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오랜 세월 우리들은 감정을 버리고 이성적인 사고로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배워왔다. 하지만 때로는 이성적인 판단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될 때가 많다. 젊은 한 시절 이성에 대한 지독한 회의를 느끼고 감성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살았던 적이 있다. 이성의 차가움을 배척하다보니 스스로 낭만주의 성향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정확한 정의도 내리지 못하면서 낭만주의자라고 폼을 잡고 다닌 적도 있었다. 아직도 차가운 이성보다 무절제한 감성을 아름답게 보는 것이 사실이지만 장적
집단의 부조리와 모순 불교의 지혜로 해결 불교적 가치관-사상 오롯이 따르는 수행자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뭔가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집단을 향해서는 비난을 퍼붓기 십상이다. 무의식에 가깝게 우리는 우리들이 몸답고 살아가는 사회를 향해 끊임없는 냉소를 보내고 수많은 모순을 찾아서 비난을 입방아 찍기를 좋아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신랄하게 비평하는 그 집단에 대부분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이 도가 넘으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세상의 모든 맹수를 제압하는 사자는 외부의 적에 의해 최후를 맞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속에 기생하는 수많은 충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듯이 불교도 내부로부터 자라는 해충에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신 말씀이 되새겨지곤 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부
출가한 스님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가식적인 모습일 것이다. 계를 받는 순간부터 모든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진실을 지향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의 가식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이사회에 비쳐지고 많은 이들의 실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 일반인들도 가식적인 모습을 싫어하기는 마찬가진가 보다. 기억에 남는 스님들은 대부분 내게 진솔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 스님들이었던 것 같다. 출가하고 얼마 안 되어 참으로 재미난 스님을 만났다. 지금은 큰 선원이 되어 많은 스님들이 안거하고 또 무문관까지 갖추어 스님들의 수행을 돕고 있지만 초창기 남국선원은 말이 선원이지 조그만 토굴에 불과 했다. 그것도 공동묘지를 한참 지난 한라산 중턱에 자리한 선원이라 올라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라는 게송의 마지막 구절 같이 언제나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주시는 스님이 계신다. 활달한 말씀과 날렵하신 외모로 보면 쉽게 세상사에 견해를 피력하며 날카로운 비평이라도 거침없이 쏟아 내실 것만도 같은데 오랜 세월 인사 나누며 살아가지만 단 한 번도 세상사의 일에 대해 시시비비를 얘기하시지 않으시는 스님이시다. 그러고 보니 적조 스님은 일타 큰스님의 상좌이시니 제게는 사숙 뻘이 된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조카 상좌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식을 가지고 대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고 항상 탈속한 모습으로 잘 정제된 말씀을 하신다. 무엇보다도 스님께서 우려주시는 차는 적적한 남도의 삶에 늘 그리움이 느껴지게 한다. 스님께서 머무시는 남국사에는 법당보다 다실이 더 멋지다. 법당 뒤 대숲
영가 천도문제로 번뇌하는 스님이 있었다. 출가사문이 되어서도 속가 가족의 천도를 성실히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 스님께서는 천도의식이 있을 때마다 항상 동참하고 자신의 출가 전 조상들을 천도시키기 위해 특별히 기도를 하기도 했다. 한번은 차담을 나누다가 출가자가 조상들에 대한 천도와 세속의 일가친지 부모형제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 올바른 모습인가 아닌가를 두고 설왕설래하게 되었다. 솔직히 모든 중생을 위한 기도와 축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일가친척들의 축원에 열을 올리는 스님에 대한 의아한 생각을 떨칠 수없는 터였다. 그때 마치 나의 견해를 대변이라도 하듯이 분명하게 말하신 스님이 계셨다. 출가 후 오랜 시간을 참선 정진하셨는데 조용히 듣고 있더니 출가를 했다면 출가 전의 가족으로부터
분명한 삶의 자세를 가진사숙 스님의 모습을 보며 개인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올바른 문중 개념 되새겨 출가이후 문중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을 때 몹시 당황스러웠다. 정말이지 중국영화에서나 보듯 도력 깊은 스님을 만나 합장하고 ‘사부’라고 부르면 스승이 되는 줄 알고 출가했으니 문중이란 개념 앞에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만큼 나는 은사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특히 일타 큰스님은 많은 상좌를 두셨기에 속가로 말하면 삼촌뻘인 사숙 스님들이 너무 많아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늦게 출가한 사숙이 문도모임에서 윗자리에 앉을 때면 한국 승단만의 독특한 문중 개념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했다. 부처님 당시에는 출가 전 세속의 나이와 직위는 완전히 잊고 오직 출가 순으로 좌차가 결정되었다. 출가 전 우바
긴 수염이 매력적이던 오래전 내 기억 속 스님 포교 위해 오지로 떠난 스님 모습 너무 그리워 처음 불교를 접하고 사찰예절을 배웠는데 스님을 만나면 3배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스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뵙기가 쉽지 않았다. 청년회에서 철야정진으로 1000배를 한다고 사당동 원각사로 갔다. 지금이야 철야정진하면 당연히 3000배를 하겠지만 당시 우리들에게는 천배도 무척 힘든 수행이었다. 하지만 이날 이후 매달 철야정진이라는 이름으로 셋째 주 토요일은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절을 했는데 그때가 내 일생에서 가장 신심이 충만했던 시기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천배 정진을 할 때 처음으로 스님께 절을 했는데 복이 많아서인지 동봉 스님께 절을 하였다. 당시 스님께서는 사명당처럼 길게 수염을
처음 만났는데도 자연스레 친해진 스님 밝고 재밌는 모습에 주변 사람들도 행복해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누구든 어색한 분위기가 있기 마련이다. 약간의 서먹서먹한 시간이 제법 길게 유지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오랜 친구같이 거리감을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나뿐만 아니라 현진 스님을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오래 만남을 지속한 듯한 느낌을 받는 것 같다. 직위가 높거나 낮거나 조금의 차별도 없고, 승이나 속이나 그 어떤 차별도 두지 않는 스님의 인품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친근감을 가지는 것 같다. 불자들이 제주에 와서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의 좋은 절을 소개시켜달라고 할 때가 많다. 외형적 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친근히 맞아주고, 상담이라도 할 만한 스님
언제나 환한 미소 짓던 글 솜씨 좋은 스님 보면 문수보살 게송 의미 자연스레 깨닫게 돼 언제나 웃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어떤 사람은 그저 따라 웃기도 하겠고 어떤 사람들은 뭔가 오해하고 자기를 비웃기라도 한다고 생각하며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또 우리는 어떤 사람의 웃음은 매우 유쾌하게 받아들이면서 또 어떤 사람들의 웃음은 괜스레 뭔가 자신을 우롱한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일 때가 있다. 웃음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결론도 낼 수 없다. 누구의 미소인가를 두고 그 추미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웃는 스님이 계신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웃지 않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지 않는 스님의 이미지를 상상 할 수 없는 것은 그런 모습을 정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언제 보아도 기분 좋
폐병 걸린 노 비구니 병수발 자처했던 스님 늘 자비로운 그 마음이 수행의 결과임을 깨달아 강원 다닐 때였다.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큰스님들 앞에서면 늘 긴장하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그 당시는 구도의 열정이라는 어설픈 마음 하나 챙겨들고 많은 스님들을 찾아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만 할 수 있는 추억일 뿐이다. 사찰에 소임을 맡고 있으면서 가까운 곳에 큰스님 법문이 있다고 가서 자리하고 앉아 단지 법문을 듣기가 쉽지 않다. 의례적인 인사를 위해 참가해주어야 하는 각종 행사는 늘 돌아서는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흔히 큰스님이라고 하지만 큰스님의 경계는 정말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높고 깊은 수행력은 우리들이 알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들이 큰 감동을 받는 곳은 수행의 심오한 교리나 치열
가까이 하고 싶었던 스님 소식 전해 들으며귀한 인연 이어가지 못하는 내 모습 참회 절에 살다보니 기억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도들과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게 된다. 언젠가 명함을 정리하다가 만남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만난 당시 마치 수많은 생을 서로 그리워하다가 만난 듯 의기투합되어 영원히 함께 할 것같이 차를 마시고, 같은 취미를 이야기했던 사람들의 명함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치 망각의 술이라도 마신듯 완전히 잊혀진 듯 살아가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화를 해봤다. 그 사람도 어제 일같이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현실적인 삶은 아름다운 인연의 끈을 마치 가녀린 연뿌리가 끊기고서야 이어지는 가는 연실처럼 만들어 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타 스님이 후배지만 존경한다는 비구니 老스님출가 선후-비구·비구니 떠난 승가 화합 아름다움 느껴 통칭 북전으로 통하는 북방으로 전례 된 율장에는 비구계목이 250개인데 비해 비구니 계목은 348개이다. 이렇게 계의 항목이 많다는 것만으로 단순 비교하여 불교는 여성을 차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일으키고는 자꾸 따져 묻던 여자신도분이 있었다.스님들이 지켜야하는 구족계는 실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만 제정하였지 미리 대비하여 정하지 않았다. 결국 부처님 당시 여성 출가자들이 보다 많은 지적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세세한 내용들을 보면 당시 사회의 관습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인 조건으로 인해 보다 많은 계목이 생겨나게 되었을 뿐 결코 차별적 견해에서 제정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세
오랜 묵언 수행으로 말하는 법 잊었던 스님티 없이 맑은 마음 간직한 모습 부러워 가을이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더없이 하늘이 높아져 더없이 넓어진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에 이 가을 무엇으로 채워나갈까? 삶속에서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단어는 언제나 행복이다. 부처님에 관해 말 할 때도 가장 자유로웠고 행복했던 분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부처님을 믿고 의지해 따르는 사람들은 높아진 가을 하늘 가득 부처님처럼 행복으로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 단순함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껴지게 하곤 한다. 일상도 마찬가지로 의식의 단순함을 지닌 사람들을 가까이 하다보면 티 없는 가을 하늘같이 청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처음 지엄 스님을 만났을 때 느낌이 그랬다.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말
지난 28일 범불교도 대회가 우리나라의 심장부 서울 한복판에서 열렸다. 한사람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수많은 대중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해야 했다. 종파를 초월한 모든 스님들과 불자들이 다 함께 모였으니 그야 말로 범(凡)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조금도 주저 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불자들이 모여 국가의 앞날을 염려하고 편협하고 잘못된 의식이 나을 엄청난 재앙을 미리 막고자 했던 것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렇게 먼 길을 올라와 함께 외치는 소리를 듣는 위정자들이 측은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언제나 불교계의 크고 작은 모든 행사에 꼭 참가하는 실천하는 불제자가 계신다. 신계사 낙성법회으로 금강산에 갔었을 때의 일이다. 꿈에서도 그리던 금강산 비룡폭포를 오르면서 일행 중에 참으로 기이한 스님,
여름 장맛비가 한참을 퍼붓고 지나간 자리에서도 그 자태를 잃지 않고 고고한 모습을 간직하는 연꽃은 언제 바라보아도 그 단아함에 흐트러지고 산란했던 마음을 챙기고 옷매무새를 여미게 만든다. 요즘 집권자들은 한창 종교편향 정책으로 물의를 빚고 있다. 현 정부의 왜곡되고 편향된 의식을 접하다 보면 종교가 사회를 지배해 ‘암흑의 시대’로 불렸던 중세 서구사회가 문득 생각나서 섬뜩함이 느껴진다. 김영삼 정부 때 경복궁의 수련을 뽑아버렸다는 소식을 접한 일이 있었다. 종교적 편향성에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성마저 왜곡되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어쩌면 연잎과 연꽃들은 이 무더위에 수면을 박차고 올라와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제발 혼탁한 세상에 물
스승과 제자 사이인데도 한번도 권위 내세우지 않아늘 격의 없는 모습에서 수행자 위의 마음으로 체득 여름의 무더위는 승속을 막론하고 견디기가 어렵다. 가야산 600고지에 자리한 해인사도 여름의 더위는 견디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강원에서 공부할 때는 그 무더운 삼복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축구를 한다면 바로 운동장에 나가 뛰어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토록 더운데도 뛰어 다녔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며칠 전 더위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사중 스님들의 복장이 너무 심했다. 아예 상의는 벗어버리고 하얀 블라우스 같은 개량 승복을 입고 공양하려 나타났다. 조용히 지적한 이후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정말 스님들도 여름 하복을 특별히 제작하는 것이 좋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여름복장이 따로 없고
넘치는 끼로 주변에 즐거움 전하는 스님 올 가을 음악회에서 신나는 춤사위 기대 정말 무덥다. 때로는 수식어가 그 의미를 더 강하게 해주지만 극단의 상황에서는 아무런 수식어가 없는 것이 더 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같다. 찜통더위니 불볕더위니 하는 말도 너무 더워 숨이 턱 막힐 듯한 지금의 순간에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느낌으로 들린다. 제주는 전국 최고 온도에는 못 미치지만 습도가 더 문제다. 평균 70%이상의 습도는 정말이지 뜨거운 증기로 삶는 듯하다. 더위에 지쳐 있다가 이 더위에 법고를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갓 계를 받은 스님이 열심히 법고를 연습하고 있었다. 법고소리를 듣다보니 하유 스님이 생각난다. 법고를 잘 치기로는 하유 스님을 따를 스님이 없을 것이다. 너무 기교적으로 친다고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