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수행의 종교란 말이 어렵게 다가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행이란 말을 쉽게 표현하면 ‘실천’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즉 불교는 관념의 종교가 아닌 실천의 종교란 말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증득(證得)의 종교가 된다. 증득이란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 철저하게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닌, 나의 경험인 것이다. 말하자면 갈증이 날 때, 다른 사람이 물을 마시면서 ‘아, 시원하다.’라고 하는 것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물을 마셔서 그러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지와까란 의사가 있었다. 그는 부처님의 주치의이자, 북인도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로 명성이 자자했다. 당시 사람들은 지와까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출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경전은 전한다. 오늘날과 같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던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얼마나 의료 환경이 열악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음식 속 허물 유무사람의해 좌우 돼맛 탐착 않는 것이음식 즐기는 방법지와까는 부처님을 자주 뵙고 건강상태를 체크해 왔기에, 그만큼 부처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많았던 것 같다. 그
한 사람이 살아 온 삶의 자취를 기록한 것을 ‘전기(傳記)’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삶이 모여 하나의 사건으로 구성되게 되면, 그것을 우리는 ‘역사(歷史)’라고 한다. 역사에는 따라서 시대를 살아갔던 민초들의 삶이 배경으로 존재한다. 아주 소소한 작은 일상의 일들이 역사라는 커다란 배경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역사를 중시한다. 후대에 어떠한 이름을 남길 것인지, 어떻게 사람들에게 ‘내’가 기억될 것인지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금을 불문하는 인류의 공통적인
불교는 대표적인 무신론의 종교이다. 창조주라든가 하는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경전을 보면 무수한 신들이 또한 등장한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무신론이란 신적인 존재 자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로서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우주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인간계와 천계로 나누고 천계는 다시 욕계천(欲界天), 색계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으로 구분한다. 욕계천은 6개의 하늘나라가 있고, 색계천에는 18개의 하늘나라, 그리고 무색계천에는 4개의 하늘나라가 있다. 도합 28
악을 넘어 선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종교가 공통으로 갖는 요소일 것이다. 물론 종교마다 악이나 선을 규정하는 내용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보편적 선이라는 것을 역사의 흐름을 견디어 온 전통적인 종교들은 갖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자비, 어짊(仁), 사랑으로 표현한다. 악마는 내안 욕망에 있고내가 갈애·공포 일으켜만들고 없애는 자는 나요선택 역시 내게 달린 것 그런데 종교마다 악을 규정하는 내용은 다소 다르다. 말하자면 악을 실존하는 악마에게서 찾고, 그것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종교도 있다. 그리고 그 절대악의 대척점에는 절대선 즉
우리가 흔히 어떤 빠져 나오기 힘든 처지에 놓이거나, 아주 곤란한 상황을 ‘수렁에 빠졌다’라고 표현한다. 한 발 잘못 디디면 좀 체로 빠져나오기 힘든 늪과 같은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감각적 쾌락과 욕망은넘기 힘든 수렁과 같아욕망 긍정적 발현 되면삶이 윤택하게 발전 돼 삶을 길이라고 보면, 길 위에는 매우 다양한 상황들이 연출된다. 예쁜 꽃들이 만개한 곳도 있고,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도 있고, 물웅덩이가 있는 곳도 있다. 때로는 가시밭길도 있을 수 있고, 진흙창길을 가야할 경우도 있다. 이렇듯 여러 상황들을 마주하며 때로는
우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장님’이라고 표현한다.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고와 같은 어떤 후천적인 요인으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육신(肉身)의 눈이란 기관이 작동하지 않는 것일 뿐, 그 외의 어떤 다른 해석을 붙일 이유는 없다. 육신의 눈은 멀쩡하지만 마음의 눈이 닫힌 사람들이 있다. 사실 우리가 문제를 삼아야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이 닫힌’ 사람이다. 마음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교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생각을 알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살다 보면 어떠한 형태로든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라서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도 있고, 제법 큰 상처라 치료를 요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의 경우 상처가 나면 소독을 하고 상처에 약을 바르고, 그것이 덧나지 않도록 조심한다. 사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잘 관리하지 않으면 크게 고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의 판단 의심하며대상에게 현혹 말고욕망 자세히 살피면마음의 평온 얻게 돼상처가 나면 신경 쓰고, 관리하듯이 우리가 신경 써 관리할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감각기관이다. 부처님께
날씨가 습하고 기온이 높으면 모기떼가 기승을 부리고, 이런 저런 벌레와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해충이 번성한다. 모기와 벌레 등을 해충, 곧 해로운 곤충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인간들에게 다양한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충은 발생뒤에 방역을 하게 되면 그 효과가 크지 않다. 미리 미리 해충이 발생할 지역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해충지도를 작성하고, 이에 따라 알에서 깨어나기 전에 혹은 유충 단계에서 이들 해충을 박멸할 방법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효과적으로 해충을 방역하게 된다.해충
고양이가 호랑이가 되고, 당나귀가 소가 될 수 있을까. 고양이가 호랑이가 되는 생각을 한다고, 혹은 당나귀가 소가 되는 생각을 한다고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간혹 이러한 불가능한 일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선하고자 노력하지 않고,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그저 평범할 뿐인데, 마치 거부인 것처럼 생각하며 흥청망청 하는 사람. 생각은 미숙한데,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 자신에게 조그마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마치 세상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처럼
뿌리가 깊은 나무는 웬만한 바람에는 끄떡하지 않고, 백년, 천년의 세월을 견딘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그마한 폭풍에도 뿌리째 뽑혀 넘어지고 만다. 다른 한편 연약한 풀은 뿌리도 깊지 않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오히려 거센 바람에 뽑히지 않는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외부의 힘에 굴하지 않고 굳건하고 담담하게 마주하는 힘을, 반대로 연약한 풀은 굳건하게 맞서지는 못하지만 좋지 못한 상황에서도 상황에 맞게 처신할 수 있는 유연성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자신 폄하·자책 보단삶 속에 배우고 익혀나의 삶을 사는 것이기둥처
형체를 지닌 것은 언젠가는 깨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오래된 소중한 문화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문화재로 지정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금방이라도 깨어져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음 받아들일 때만온전한 슬픔 가능하고죽음 통해 삶의 의미새롭게 통찰 가능해 생명이 소중하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불노불사(不老不死), 즉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한다면, 생명의 가치가 소중한 줄 알지도 못할지도 모른다. 어느날 문득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에서 노인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