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매산은 경상남도 서북지역의 척추로서 해인사의 가야산과 화엄사의 지리산을 연결하고 있다. 원형으로 피어 난 산봉우리들의 모양새가 매화 꽃잎과 흡사해 황매산(黃梅山)이라 했다. 황(黃)은 부(富)를 뜻하고 매(梅)는 귀(貴)를 의미하니 ‘부귀의 산’ 즉 ‘풍요의 산’이기도 하다. 푸른 하늘 머금은 합천호에 하봉, 중봉, 상봉의 산 그림자가 들어앉으면 ‘세 송이 매화꽃이 물에 잠긴 듯하다’ 해서 수중매(水中梅)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황매산 정상(1108m) 아래 900m 지점에 수십 만 평의 평전이 펼쳐져 있는데 4월 철쭉과 10월
아도! 한국불교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삼국시대에 출현하는 아도는 ‘我道’, ‘阿道’, ‘阿度’ 등 동음 한자를 쓰는 3인이다. 세 명의 아도 전기 또한 유사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묵호자(墨胡子) 또한 아도의 설화 구조와 맥을 같이 하는데. 그는 곳곳에서 아도와 동일인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도, 묵호자 모두 실존했던 특정인물일 수도 있지만 신라에 법을 전하려 했던 전법승을 통칭한 이름일수도 있다.단언컨대 그 어떤 문헌이나 비석문을 취하든 신라불교 전래 최초인을 속 시원히 규명할 수는 없다. 한 쪽을 취하
한반도에서 최고봉(最高峰)을 ‘영봉(靈峰)’이란 칭한 산은 백두산과 월악산뿐이다. 백두영봉이 자아내는 신비로운 기운은 이미 정평 나 있지만 월악영봉 또한 웅혼함과 장대함을 간직하고 있어 ‘신령스런 봉우리’라는 이름에 걸 맞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영봉은 신륵사, 덕주사, 보덕암 세 절을 품고 있다. 어느 절에서 영봉을 오르느냐에 따라 마주하는 풍광 또한 다르다.신륵사 극락전 벽화서 마주한마명 법력·혜가 열정에 감탄신륵길, 깊은 산 맛의 ‘선정 길’ 보덕길, 험준·고준의 ‘두타 길’덕주길, 계곡·기암의 ‘자비 길’덕주 공주 마음 담은
설악산(雪嶽山) 천불동은 한라산 탐라계곡, 지리산 칠선계곡과 더불어 한국 대표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거암 덩어리 미륵봉이 품은 천봉만암·청수옥담 계곡에는삼세(三世)의 천불설법 가득23.1m² 작은 성지 금강굴 설악이 조성한 천혜 토굴공룡·화채능선 조망 ‘장관’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을 기준으로 동쪽을 외설악, 서쪽을 내설악이라 하는데 외설악은 백담사와 수렴동(水簾洞)을, 내설악은 신흥사와 천불동(千佛洞)을 품고 있다. 가을 단풍에 방점을 찍는다면 단연 수렴동을 추켜세워야겠지만 전경(全景)을 논한다면 비선대(飛仙臺)에서
영광(靈光) 법성포(法聖浦)! ‘성인이 법을 전한 항구’다. 성인은 마라난타(摩羅難陀)다.백제불교 최초전래지 법성포法은 불교·聖은 마라난타실크로드 걸어 백제 땅 밟은 고승은 여환삼매·신통력 소유여름꽃 상사화 ‘그리움’ 의미가을꽃 꽃무릇 ‘깨달음’ 상징산 스스로 피워낸 붉은 꽃연실봉 정상까지 군락 형성‘침류왕이 즉위한 해(384) 9월, 인도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晋. 동진, 317∼420)나라에서 들어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고 궁에 두며 예경했다. 불법은 이로부터 시작됐다.’ (‘삼국사기’)백제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수적천석(水滴穿石)’은 헛말이 아니다. 바위에 스민 물도 제 스스로 얼고 녹음을 반복하며 집채만 한 바위라도 끝내 쪼개지 않는가. 그렇게 부수어진 돌조각들이 산비탈을 따라 흘러내려 퇴적된 특정지역을 너덜지대라고 한다. ‘너덜’은 돌들이 깔려 있는 산비탈을 이르는 순 우리말 ‘너덜겅’을 줄인 말이다. ‘지대’라는 단어가 굳이 필요 없음에도 지질학 관점에서 확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된 듯하다.500년 배롱나무 꽃향기초가을 천년고찰에 가득벼랑 끝 문수전서 조망한백화산·석천계곡 풍광 ‘절경’성주산문 세
시인 정지용이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한 동양의 나폴리 통영은 한국 대표 예향(藝鄕)으로도 손꼽힌다. 용화세계 장엄한 미륵산천혜비경 통영바다 품고산사와 절 이은 산길엔고승대덕 선취 스며있어벽담 용화사·도솔 도솔암미래부처 강림염원 담긴 듯구산 창건 편백 숲 미래사‘효봉 문도’ 성지 자리매김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던 유치환,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에게로 가서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던 김춘수, 화단에서 ‘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연화도인·사명대사 입도전설 따라 ‘불연의 섬’깨달음 성지 소망 담겨사명토굴·보덕암서 본용머리 해안풍광 일품천혜비경 속 휴식 ‘딱’섬 하면 떠오르는 정현종의 ‘섬.’ ‘사람들 사이’가 주는 거리감에서 고독이 느껴진다. 통성명 한 번 없이 수년을 지내는 도시의 ‘이웃 사이’에서 직감되는 단절된 외로움이다. 그 사이에 자리한 섬 하나. 뭍과 격리된 땅이기에 고독감은 배가 될 법한데 아니다. ‘가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되레 섬은 내 아픔 다 씻겨 줄 치유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나그네에게
어느 날 문득, ‘변함없는 나의 삶이 지겹다고 느껴질 때, 자꾸 헛돌고만 있다고 느껴질 때, 지난 날 잡지 못했던 기회들이 나를 괴롭힐 때’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로 갈까? 아티스트 김창기씨는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사겠다고 한다. 조선 제일풍광 정평 강릉산 위 바닷길 ‘바우길’서녹색향연 속 절 만나 ‘쉼표’등명대서 마주한 바다 보며붉은 빛 부서지는 일출 상상탑 옆 풀꽃 ‘존재 이유’ 설법‘거리에서’를 만들고 노래했던 동물원의 김창기씨, 문화방송 대학가요제 대상 곡 ‘꿈의 대화’를 노래했던 이범용씨는 그룹 ‘창고’를 결성(1
뭍에서 추사를 만나기 위해 바닷길을 건너 제주에 온 초의가 6개월을 머물렀다는 산방산 중턱의 산방굴사. 추사가 이 토굴에서 ‘반야심경’을 사경했다고도 전해져 산방산 찾은 사람들의 발길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노란 유채꽃 만발할 때, 아니 푸른 청보리 익어갈 때, 짙은 녹음 우거질 때, 아니 붉은 동백 필 때, 그 어느 날엔가 산방산 올라 마주하고 있는 한반도 끝 섬 마라도를 바라본다면 산방굴사에 좌복 펴고 삼매에 들었던 고려의 혜일(慧日) 스님을 떠올려봄직하다. 이형기 제주 목사 재임 때1000개 불상 바다에 던져‘4·3 항쟁
제주시 삼양동에 서 있는 원당봉(170m)은 주봉인 원당악과 망오름, 도산오름, 동나부기, 서나부기, 앞오름, 펜안오름 등 7개의 봉우리와 3개의 능선이 이어져 있는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제주 명산이다. 이 오름 중턱에 중국 원(元)나라의 당(堂)인 원당(元堂)이 있었다고 하여 원당봉(元堂峯)이라 이름 했다고 한다. 원나라 공출돼 끌려간 여인재색·정치력 발휘해 황후로오빠 국정농단 연루 오점 남겨훼불사태 만연했던 조선중기 불교중흥 횃불 든 허응 보우제주목사 변협에 타살돼 순교저 원당은 이 땅에 원 나라의 힘이 막강하게 미칠 때 들어섰
한라산 불래오름의 존자암에서 남서쪽 70리 남짓의 서귀포 안덕면에 산방산이 있다. 주홍빛 귤 무성히 달린 길가의 귤나무 감상 하다가 엎어놓은 종(鐘) 모양의 우뚝 솟은 산(395m)을 서귀포 어딘가에서 보았다면 산방산과 마주한 것이다. 움푹 파인 한라산 정상을 본 제주도 사람들은 백록담에 저 산방산 얹으면 딱 맞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6개월 곁에 있던 초의‘반야심경’ 사경 권해분노·아만 녹인 추사 명작 ‘세한도’ 남겨옛날 한 사냥꾼이 사슴을 잡으려 한라산 정상에 올라섰는데 그만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엉
제주(濟州)의 옛 이름은 탐라(耽羅)! ‘탐’은 섬(島)이고, ‘라’는 나라(國)이니 탐라는 ‘섬나라’란 뜻이다. 발타리존자 연유한 존자암불래(佛來)오름에 존재해섬나라 최초 불교전래 전설 수직절벽·기암괴석에 새겨삼국시대 당시 북방의 고구려 영향권에서는 벗어나 있던 탐라였지만 중부지역서 활개 쳤던 백제에는 조공을 바쳐야 했을 만큼 국력은 미약했다. 백제와 달리 신라는 섬나라를 나름 경계했다. 신라 주변 9개국의 침입을 막고자 조성한 황룡사 9층 목탑. 그 목탑의 4층은 탐라를 상징한 것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탐라는 통일신라에
인도 남부 끝 22Km 바다 건너 자리한 작은 섬나라.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섬의 생김새가 눈물과 흡사해 누군가 ‘인도의 눈물!’이라 했다. 관광객 상대로 한 전문상점에서 아이 쇼핑을 즐기다 보면 스리랑카 지도 모양 소재의 상품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루비, 사파이어로 만든 목걸이부터 에소나이트, 투루말린, 가넷 등의 준보석들을 섞어 만든 액자까지 다양하다. ‘인도의 눈물’이라 쓰고 ’보석의 눈물‘이라 읽는다. 나라 잃고 피신했던 왕이국권회복 후 보시한 절흑갈색 거대 바위 속엔벽화·탑·불상 환상 조화교단 추구하는 목표에 따라 교학
‘성스런 치아사리 한 과는 도리천에 모셔지고/ 한 과는 용족(龍族)의 용왕이 모셨으며/ 한 과는 간다라에 모셔지고/ 한 과는 시할레(Seehale. 싱할라의 옛 이름)에 모셔졌네./ 네 과의 부처님 성치는/ 최고의 열반의 축복을 주시니/ 천신과 인간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신/ 성치에 제가 경배하나이다!’ (정기선 선생 역)포르투갈, 스리랑카 침입 후가톨릭 전파 위해 불교탄압법회집전 스님 사형에 처하고개종불복 재가자 강물에 던져치아사리 파괴 예견한 승단델가무 사원에 숨겨 위기 모면온 국민 페라해라 축제 때 불치와 하나 돼 평화 기원불치는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중에 수평선이 보이는 ‘호수’를 만났다면 플론나루와 땅에 서 있는 것이다. 실은 호수가 아닌 대형 저수지 ‘파라크라마 사무드라’다. 파라크라마(Parakrama)는 이 도시에 아름다운 사원과 거대한 저수지를 조성한 파라크라마 바후1세(1153~1186)의 이름을 딴 것이고, 사무드라(Samudra)는 싱할라어로 바다를 뜻한다. 바다를 품은 저수지다.탄핵·쿠테타 직면한 마하세나칼링가국에 불치이운 ‘급전’전쟁 속 사리 침탈·훼손 우려구하쎄바, 딸에게 이운 언명위자야바후, 촐라 족 격퇴 후수도 이전하며 사리이운 단행‘
머리에서 가장 먼 신체 부위를 감싸고 있던 신발을 벗고 캘러니야(Kelaniya) 사원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순간, 살갗에 닿은 모래 한 알, 흙 한 줌이 성스럽게 느껴진다. 부처님 스리랑카 세번째 방문캘러니야 도량엔 2500년 숨결맨발로 사원 들어선 순간성지가 품은 성스러움 느껴져그늘진 공간에 자리한 사람들세계 최초 경전 조성 나라답게독경 삼매에 들며 불심 다져 한국 산사를 순례하다 보면 일주문에서 ‘입차문래 막존지혜(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문구가 새겨진 주련을 볼 때가 있다. ‘이 문에 들어서는 사람은 알음알이를 내려 놓아라
부처님께서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 진신사리(眞身舍利)! 발징의 ‘만일염불’ 결성 후조선의 ‘아미타불’ 정진 주도임란 왜구 약탈 불치사리사명대사가 찾아 와 봉안금강저·십바라밀 석주절터와 어루러져 ‘오묘’열반과 해탈을 상징하기에 사리 자체가 부처님이고 법이다. 초기불교 당시에는 부처님 유시에 따라 불상을 조성하지 않았기에 부처님 체취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던 대상은 오로지 탑. 하여, 탑 속에 안치된 사리는 부처님을 향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했다. 사리 자체가 부처님이라 보면 쇄신((碎身)사리를 구분 하는 게 큰 의미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처음 일파만파로 퍼져 전국을 강타할 때, 그 강도만큼 국민들은 상실감에 젖어 넋을 놓았다. 자신이 선택한 대통령이 각종 비리 의혹에 휩싸여 있다는 실망감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 유수의 대기업의 등을 쳐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최순실 때문만도 또한 아니었다. 상식이 통하는 다수보다 권력과 재력을 가진 소수를 위하고, 만인의 평등보다 불평등의 프리즘으로 차이가 아닌 차별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그래서 정의와 인권, 복지, 나아가 서민들의 삶마저도 몇몇 위정자들의 간교함에 언제든 차디찬 바다 아래로 수장되는
굴속에 자리를 편 의상 스님은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 채 앉았다. 들려오는 건 바위덩어리를 때리는 바닷물 소리뿐이었다. 한 터럭의 번뇌조차도 허용치 않는 용심과 청심으로 7일을 보낸 후 새벽 바다 위에 앉았던 자리를 띄웠다.원효암서 1패 당한 의상 스님 의상대선 한 수 위 법력 보여의상 스님 ‘자리’ 띄운 그 파도붉은연꽃암자 아래서 ‘처얼썩’의상 스님이 해안절벽의 굴속에 좌복을 깔고 가부좌를 튼 연유가 있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관세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어느 굴 안에 상주한다는 전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서역(西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