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력을 내세우는 한국불교에서 정토는 하근기 수행법으로 치부되며 긴 세월 동안 홀대받아왔다. 민간에서 아미타불신앙의 정토불교가 이어져왔지만 출가자 중심의 한국불교 주류 흐름은 교종·선종 사상의 변화에 따라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불보살의 가피를 외면하는 풍토는 대중들이 깨달음을 어렵게 느끼는 요인으로 작용했고, 결국 현대에 이르러 불자 수가 감소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정토학회가 ‘불교교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정토 실현의 현실적 실천방도 모색’을 기치로 돛을 올렸던 것은 한국불교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
핑크붓다. 금빛 부처님이 아닌 분홍 부처님이다. 장엄한 금빛을 벗고 분홍빛을 입은 부처님은 어떤 모습일까? 8월31일,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전시를 앞두고 작품 설치를 막 마친 프로젝트 아티스트 그룹 핑크붓다를 만났다. 다양한 전공의 구성원 모여다채로운 작품 꾸준히 선보여기존 불교 예술에서 벗어나대중에 친숙하게 다가갈 것“부처님과 관계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핑크라는 대중적인 색으로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사람들의 부처님과 핑크를 연관짓지 못하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부처님은 핑크라는 대중적인 색까지도
‘무문관(無門關)’은 송나라 무문혜개 선사가 조사들의 어록에서 공안 48칙을 선별해 평창과 송을 덧붙인 공안집이다. 이 책은 ‘벽암록’ ‘종용록’과 더불어 오랜 세월 참선수행자들의 바랑 한 귀퉁이를 차지할 정도로 중시됐다. 48개 관문을 뚫으면 역대조사와 손을 잡고 그들과 동일하게 보고 들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많은 납자들이 문 없는 문을 통과하려 치열하게 정진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그러나 ‘무문관’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유독 한국에서 홀대받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천안 평심사 정원 스님이 ‘무문관’ 48칙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조계종 총무원을 예방해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전시회에서 발생한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 홀대’ 사건에 대한 해명과 함께 사과 의사를 전했다고 한다.한일 양국의 고대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반가사유상을 한 자리에서 마주하게 한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은 불교계는 물론 이웃종교와 일반인들의 관심도 쏠리게 할 만한 기획전이었다. 맑은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있는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만 하더라도 한국적 보살상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반가사유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지난 5월23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벌어진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한 헌다 금지 사태에 대해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조계종 총무원을 방문해 사과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비공식으로 사과의 수위에 대해 귀추가 주목된다.국립중앙박물관 측은 5월 25일 오후 조계종 총무원에 연락해 법보신문이 5월24일 게재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홀대 받은 국보 반가사유상’ 보도로 알려진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한 헌다 불허 조치에 대해 해명, 사과할 뜻을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영훈 관장은 5월26일 오전 10시30분 조계종총무
국립중앙박물관, 한일 국보 기획전서 일본 주구지 반가상엔 헌다·헌화 허용“국보78호는 국가소유문화재 이유 불가”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특별전에서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한 헌다의식이 주최 측의 불허로 무산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특히 함께 전시된 일본 국보 주구지(中宮寺) 목조반가사유상에 대한 일본 불교계의 헌다와 헌화 의식 등은 허용해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이 국내에서조차 홀대당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5월23일부터 6월12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
총선이 끝난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한갓져 보였다. 화사한 벚꽃이 지고 난 자리에는 부처님오신날을 찬탄하는 봉축탑이 국회를 장엄하고 있었다. 올해 봉축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된 이천 오층석탑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빼앗긴 소중한 문화재가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불자 국회의원과 직원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겼다.중학교 때 불교와 첫 인연새벽 4시면 예불에 꼭 참석고등학교 때 룸비니회 창립출가하려 사찰 찾아가기도대학 시절에는 대불련 활동참선하며 민중 위한 삶 서원일본 유학 후 교수로 재직제주4·3사건 규명에 앞장국회의원 되고 정각회
불교의 진리는 사성제(四聖諦)입니다. 고성제(苦聖諦)는 괴로운 현실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하고, 고집성제(苦集聖諦)는 괴로운 현실의 원인을 의미하며, 고멸성제(苦滅聖諦)는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하면 괴로움도 소멸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는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여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괴로움이 없는 곳에는 불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있는 곳에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불교입니다.반야바라밀은 ‘지혜 완성’보단‘통찰하는 지혜로 저 언덕 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옳아대승은
한국사회에 있어 근·현대는 격변의 시대이듯 불교계 역시 조선조 배불에 이어 일제의 통제라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삶이 퍽퍽한 시대였지만 그런 가운데 발원을 하고 실천한 불자들이 있다. 특히 다음의 세 분은 남다른 발원과 함께 신앙적 결과를 이루어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 복을 비는 신앙이 만연한 요즘 그들의 발원과 실천을 살펴보는 것은 현대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불교 대중화 구현 장경호 거사‘한국불교 발전’ 원력 세워불서보급·교육불사에 매진전 재산 보시해 진흥원 건립방송 등 대중화 불사는
해인사 차기주지 두고 내홍향적 스님 추천 소문 돌자여연·원학 스님 강하게 반발여연 스님 방장실에 내용증명“철회 안하면 고발할 것”협박“세속보다 더 추한 꼴” 비판해인총림 해인사가 차기 주지 선출을 앞두고 깊은 수렁에 빠지고 있다. 특히 차기 주지에 대한 집착으로 도를 넘은 일부 스님이 방장 스님에게 협박성 글까지 전달하는 등 승가의 위계질서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원각 스님의 방장 추대로 안정 국면을 되찾던 해인사가 또 다시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당초 해인사 안팎
"성철에게는 머물 절도, 따르는 신도도 없었다. 또 시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도우는 향을 사르고 불당을 청소해서 얻은 돈 10원을 스승께 보낸 것이다. 당시 쌀 한 말에 3, 4원이었으니 쌀 서너 말 값이었다. 이렇듯 선승들은 굶주리며 정진했다." 성철은 청담을 상주포교당에 남겨두고 다시 선방을 찾아 나섰다. 물이 되어 또 구름이 되어 깃드는 곳이 곧 수행처였다. 청담도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쇠약해진 몸은 걷기에도 힘이 들었다. 성철은 도우와 더불어 문경 사불산 대승사를 찾아갔다. 그곳 쌍련선원에서 겨울
무량사 삼전패 보물지정 예고직지사 대웅전 수미단도 포함불교 목공예로는 이례적 사건홀대 받던 목공예에 새 전기사찰일제조사로 연구성과 축적문화재 위원들도 새롭게 인식목어, 경장 등도 보존 시급면밀한 조사·전문가 양성 절실장식 기능과 공예성을 고루 갖췄음에도 줄곧 등한시됐던 불교 목공예가 국가지정 문화재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문화재청이 1월5일 논산 쌍계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등 불교문화재 16건을 한꺼번에 보물로 지정예고 했다. 이 가운데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과 부여 무량사 삼전패(三殿牌)는 불교 목공예 분야로서 지금까지 보물
“대덕화상이시여, 멀리 거센 바다를 건너 이 나라에 오셔서 참으로 저의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깨우침 없이 짐이 이 도다이지(東大寺)를 세운지 어언 10여년이 지나 이제 계단(戒壇)을 세우고 계율을 받아 지니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제부터 계를 받고 율을 전하는 모든 일을 화상께 맡기겠습니다.” 일본 45대 천황 쇼무(聖武, 701~756)는 종종 사는 게 버거웠다. 모든 사람들이 떠받드는 절대 권력의 자리도 때때로 부질없어 보였다. 아버지 몬무천황(文武天皇)은 그가 7살 때 세상을 떠났다. 마음의 병이 깊었던 어머니 미야코도
“지난해 사신이 돌아와 정법장(正法藏)께서 입적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승의 입적 소식에 제 마음이 쪼개지는 것을 억누르려 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 배는 고해(苦海)에 침몰했고, 천신과 사람들 모두 눈을 잃은 듯합니다. 어찌 이리도 통한의 슬픔이 빨리 왔단 말입니까.”653년 여름, 장안 자은사(慈恩寺)에 머물던 현장(玄奘, 602~664)은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낮이면 여러 유능한 역경승들과 불경을 번역했고, 저녁이면 매일 2시간씩 학승들에게 경론을 강의했다. 자신을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은 탓에
“불교문화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기반을 둔 전통문화재입니다. 그럼에도 일부에선 종교문화재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아 불교문화재가 우리 조상들의 삶을 바탕으로 형성된 전통문화라는 인식을 갖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지난 2월21일 전북도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된데 이어 3월14일 첫 회의에 참가한 참좋은우리절 주지 회일 스님이 불교문화재를 종교문화재로 인식하는 일반의 잘못된 의식을 바꾸는데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스님으로는 처음으로 전북도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된 회일 스님은 건조물, 기념물, 전통가옥을 다루
불교 전통의식인 천도재를 극화한 뮤지컬 천도재 ‘니르바나’가 3월22일 오후7시 서울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살아있는 이의 현생정토와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천도재를 뮤지컬로 재구성한 니르바나는 불교음악과 전통국악, 그리고 현대 예술 장르가 결합된 새로운 뮤지컬이다. 영종불교회관 주지 자명 스님이 기획·제작을 맡았다. 자명 스님은 지난해부터 인천지역에서 매월 한 차례씩 ‘땡큐붓다코서트’를 진행, 불교문화로 세상에 이익을 전하겠다는 서원을 실천하고 있다.뮤지컬 ‘니르바나’는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위해 천도재
“불교문화재는 대부분 우리 민족의 역사에 기반을 둔 전통문화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종교문화재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아 불교문화재가 우리 조상들의 삶을 바탕으로 형성된 전통문화라는 인식을 갖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지난 2월21일 전북도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된데 이어 3월14일 첫 회의에 참가한 참좋은우리절 주지 회일 스님이 불교문화재를 종교문화재로 인식하는 일반의 잘못된 의식을 바꾸는데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스님으로는 처음으로 전북도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된 회일 스님은 건조물,
불효자 게송으로 고발해 패륜 막으려 한 부처님 노인은 미래 내 모습과 같아착한 마음으로 효 실천하면내 자식 또한 효로 보답할 것 ▲청화 스님 우리는 부모로부터 막중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도리를 다해 부모를 모시는 것이 마땅함에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효 사상을 외면할 뿐 아니라 효 사상이 땅에 떨어진 그런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보며 당연한 것인 냥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억울하고 비참한 심정을 느낀 부모들이 아들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스스로의 발등을 살펴보아
출판진흥원 잘못 인정 않고궁색한 자기 합리화에 급급불교학자 심사참여는 관례위촉 불가능하다는 건 억지 불교출판문화협회가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을 주관한 한국출판문화사업진흥원의 공정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가운데 한국출판문화진흥원이 심사과정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을 최근 밝혔다. 그러나 불출협을 비롯한 교계 관계자들 대부분 출판진흥원의 해명을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불출협이 문제를 제기했던 부분은 70명의 우수학술도서 심사자 중 신학 전공자가 있음에도 불교학 전공자가 전혀 없을뿐더러 종교분야 선정에 있어 불교학술서를 심사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공정하고 객관적인 선정이 이뤄질 수 있냐는 지적이었다. 이에 대해 출판진흥원은 종교분야에 접
동국대 불교학술원 편찬‘무경집’ 등 3권 교감․해제 임제선 전통 잇는 선승불학과 외전·시에 정통유생들에도 의연함 견지 법거량․깨달음 경지 서술조선선종사 귀중한 자료 ▲ 동국대 불교학술원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교감․해제한 ‘무경집’ ‘무경실중어록’ ‘불조진심선격초’.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은 현재의 관점에서 읽히고 재해석된다. 이런 이유로 광해군이나 조조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이뤄지는가 하면 신라 혜초 스님처럼 문헌 발견과 더불어 그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는 경우도 있다. 조선 중기 무경 자수(無竟子秀, 1664~1737) 스님도 조선불교사에 대한 홀대와 더불어 오랫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