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대규모의 군대와 전쟁무기를 일방적으로 우크라이나에 투입하여 한 국가를 초토화하고 있다. 현재 수천 명의 양쪽 군인들이 전투에서 죽어가고 있으며, 이웃 국가를 향한 피난민 숫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2000년대에도 여전히 양육강식의 대규모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일손이 잡히지 않는 나날 속에서 인터넷에 떠오른 전황을 살펴보며, 이 악의 상황이 하루 빨리 끝나기를 기도할 뿐이다.참담한 전쟁으로 크게 희생당하는 것은 평범한 시민들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총탄에 죽었다. 우크
이제는 역사 기록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먼 옛날 일처럼 느끼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고 하는 악명 높은 ‘흑백차별제도’ 때문에 백인만 ‘국민’으로 대접받으며 권리를 행사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넬슨 만델라를 비롯하여 오랜 세월 흑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애써온 이들이 있었지만, 걸핏하면 지도자들을 투옥해 운동의 맥을 끊어놓음으로써 1960년대 말에는 흑인 인권 운동의 구심점이던 아프리카민족회의마저 무너져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그러나 이 절
불교가 불교다운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 바로 행복을 찾아 나가는 그 현실성에 있다.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라는 걸출한 명상의 스승을 떠나 고타마 싯타르타가 추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명상 속에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삶 속에서 행복한 길이었다고 생각해도 크게 틀린 것이 아니리라. 그렇기에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불교의, 불교다운 명상이 있다. 서로서로 보완되어 비슷해져 가는 측면이 있겠지만, 인도 전통적인 요가의 명상은 모든 감관을 차단하고 오롯하게 나의 의식만이 독존하게 하여, 거기서 나와 브라
입춘이 지난 2월은 꽃 없는 봄이다. 사람들이 겨울은 갔고 봄이 곧 올 것임을 예감해버린 탓이다. 그렇다고 봄을 애타게 혹은 유별나게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다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켜볼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봄은 슬그머니 우리의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때 ‘봄’은 아마도 ‘꽃’일 터이다. 마음은 벌써 그 꽃밭에 가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막상 그를 만났을 때보다 더 가슴 설렜던 경험은 일찌감치 우리의 추억이 되었음을 안다.추위가 안부를 물으러 온 입춘에게 완전히 뒷덜미를 잡혀버린 모양새다. 한강까지 얼어붙
아마 20년도 넘은 경험이다. 인도 성지순례 중에 타지마할을 방문했을 때이다. 우리 생각에는 신발을 신고 다녀도 무방해 보이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신발을 벗어 넣은 신발주머니를 들고 유적을 관람했다. 일행 가운데는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요구에 당황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지 못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입장료는 지금 생각해도 비쌌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인도 화폐로 1000루피 정도였으니까,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만7000원 정도였던 것 같다. 우리가 자주 가는 캄보디아 앙코르왓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20달
1월22일, 틱낫한 스님이 향년 95세로 열반에 들었다. 생불이자 활불로 널리 알려진 스님의 육신이 허공으로 환원되는 무여열반의 길로 들어가셨다. 한국에도 다녀가셨으며 많은 저술들이 출판되었다. 무엇 때문에 이 분을 우리가 그토록 존경할까. 세계의 변방이자 화약고였던 베트남 출신인 스님이 아노미 상태의 지구인들 마음속에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무엇보다도 불교를 친근하게 대중화한 것이 가장 큰 공덕이다. 여러 책을 접하면서 스님은 문명의 한계에 처한 인간 사회의 모순과 갈등, 고통의 핵심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뉴질랜드 동쪽으로 6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채텀(Chatham)섬에는 수렵‧채집 생활로 살아가는 모리오리(Moriori)족 수천명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1835년 11월19일과 12월5일에 마오리족이 두 차례 쳐들어와서 “이제 너희들은 우리 노예이다”라고 선언하며 무차별 공격을 펼쳐, 깊은 산 속으로 숨어 살아남은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민을 몰살시켰다. 당시 침입자인 마오리족보다 모리오리족이 최소한 두세 배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왜 이렇게 쉽게 패했을까?’ 모리오리족이 바깥세상에 대해
정권의 ‘종교편향, 불교왜곡’에 대한 규탄이 신년 초의 조계종단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종정과 총무원장이 잘못된 정부의 행태를 바로잡기 위한 움직임에 앞장서고, 불교계의 의지를 뚜렷하게 밝히는 승려대회가 봉행된다. 조계종이 이렇게 종단의 힘을 모아 종교편향을 바로잡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암암리에 증폭되어온 잘못된 흐름을 바로잡기 위한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기에, 반드시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 내어야 할 것이다. 주로 개신교의 공격적 포교로 말미암아 벌어졌던 종교편향이 문재인
어머니는 ‘호랑이’라는 단어를 모르셨는지 ‘범’ 이야기만 해주셨다. 1910년대 생이니까, 어머니가 호랑이를 봤다는 말이나 전해준 에피소드들은 조금도 지어낸 말일 수 없다. 기록상으로도 경주지역에서 호랑이가 자취를 감춘 것이 그 후 수십 년이 더 지난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목격담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했다. 동네 언니들과 봄에 나물 캐러 산에 올랐다가 바위 굴 앞에서 장난치고 놀던 황색 고양이 새끼 두 마리를 봤다고 했다. 너무 귀여워 무심코 다가서려던 순간 묵직한 기운을 느끼고 뒤돌아봤더니 암컷 호랑이가 앞발로 땅을 긁으
‘해가 처음 돋아오를 때는산꼭대기 위에 있게 되나니당신의 슬기로운 광명이야말로일체 중생을 비추시리다싯다르타 태자가 세간을 떠나 출세간에 나아가면서 명예와 권력과 부의 상징인 왕자 옷을 벗고 출가자의 의복, 즉 진인(眞人)의 옷이요, 세상을 건지는 자비의 옷, 소망이 이루어지는 법의 옷으로 갈아입고 산에 들어가자 온 산은 서광이 가득하였다.’(수행본기경)이는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를 찬탄한 글이다.집도 절도 없다는 말처럼 나는 요즘같이 자유로울 때가 없다. 이른 아침이면 자욱한 안개 속을 지나 근처 외국인스님들이 공부하는 무상사에 기도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의 일이다. 유학할 때 함께 공부했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유럽에서 은행장도 했던 일본인이다. 말년에 불법이 좋아서 공부하다가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대학원에 등록했다고 한다. 백발의 머릿결에 말쑥한 신사 차림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분이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 것은 천도재가 끝날 무렵이었다. 일본에서는 가족 일원의 죽음을 주위에 늦게 알리는 일이 있다. 열반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사후에 자신의 ‘뒤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하나의 전통으로 삼는 풍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임종
얼마 전부터 모임을 만들어 함께 영어 ‘기독경’(기독교 성서)을 읽는다. 대학생 시절부터 우리말로 된 ‘기독경’을 읽어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가 멈춘 적이 있었는데, 아마 요즈음에는 쓰이지 않는 옛날 말투가 어색하여 읽는 데에 불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 관련 서적이나 서양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신‧구약의 구절들을 만나게 되어 내게도 익숙하다. 기독교 입장에서 쓴 글에서는 ‘선한 하느님과 그 제자’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는 구절들을 인용하지만, 반대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작가의 글에서는 ‘복수’를
종전을 반대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종전이 되면 손해를 보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그렇게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정확하게 우리나라와 주변국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대의명분을 따져야 한다. 본디 국제 사회는 정의가 지배하기보다는 국가 간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가 분단국이 된 것도 미국과 소련, 영국 등의 열강들이 자기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멀쩡한 땅에 금을 그어서 그리된 일이다. 그런 열강들의 횡포에 대하여 정의를 내세워 저항하는 일 자체가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그렇다고 해도 명분이라는 것 또한 하나
모임이 끝나갈 무렵에는 으레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다음에는 제가 사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더러 ‘언제’ 대신 ‘조만간’이라고 시점을 못 박는 사람도 있다. 셀 수 없이 했고,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찜 맛없는 인사말이 되고 말았다. 그때뿐이지 대부분 공허한 헛말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와 정감도 날이 갈수록 퇴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약속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불자들이 사소한 말이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말은 상응하는 행동이 수반될
위드코로나란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실시해 온 사회적 거리두기를 단계적으로 완화하여 일상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정책을 말한다. 2년 넘게 사회적거리두기가 시행됨에 따라 개인과 사회공동체는 자타에 의해 서로서로가 격리됐다. 생활에 밀접한 자영업자들의 아우성과 나를 포함한 이웃들 그리고 취약계층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을 정도의 여러 부작용이 발생했다. 수많은 사회과학자들의 코로나19 발생에 대한 원인과 미래에 대한 진단은 불안감을 더 증폭시켰다. 따라서 이러한 불안한 미래보다 지금 당장 위드코로나 이후 나와 주변이 어떻게 기지개를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나라는 고작 14년밖에 가지 못했다. 단명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통치 방식일 것이다. 잘 알고 있듯이 핵심세력은 법가였다. 법은 이전 주(周)나라의 통치철학인 예와 악에 부수적인 것이었다.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가 되자 강대국에 병합되지 않기 위해 군주들은 부국강병을 추진하며, 법으로 그들의 권한을 강화했다. 결국 법은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 백성을 도구로 쓰기 위한 전략이었다. 오늘날 법이 약자를 보살피지 못하고 가진 자의 편에 서 있는 관습은 그때 형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공맹이나 묵자가 설했던 인과 의가
대학원 시절부터 이제까지 수십 년 동안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 중국 고전을 읽을 적에 늘 옆에 두고 참고로 하는 책이 있다.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가 이미 백 수십 년 전에 자세한 주석을 달아 내놓은 ‘4서 3경’의 완벽한 영어 번역인데, 2천 수백 년 전에 세상에 나온 중국 고전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서 편하다.제임스 레게는 1839년 선교사로 현재의 말레이시아 말라카(Malacca)에 갔다가 홍콩(香港)을 거쳐 상하이
가톨릭의 천진암(天眞庵) 성지화 추진 등이 지닌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법보신문 이병두 ‘가톨릭의 원죄’, 진원 스님 ‘무례한 가톨릭’, 수경 스님 ‘역사를 지운 현장, 천진암을 다녀오다’ 참조) 한 종교가 자신의 종교 역사에 중요한 현장을 성지로 선포하는 것이야 밖에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다른 종교에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고 그 성지화라는 것의 배경에는 정말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거의 모든 가톨릭 성지라는 곳은 조선왕조의 가톨릭 박해로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벌써 겨울인 듯 기온이 뚝 떨어졌다. 거의 영하권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더 아픈 것처럼 추위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서둘러 외투를 꺼내 입고 내친김에 목도리까지 걸치고 집을 나선다. 10월에 굳이 추울 것까지 뭐 있느냐고 투덜대면서 출근길을 재촉했다. 때마침 어느 스님이 ‘가을 그냥 가을’이라는 카톡 문자를 보내왔다. 가을은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라도 짧은 편지를 쓰고 싶은 계절인가 보다.일주일에 두세 번 광화문 사거리에서 남산 한옥마을까지 자자와 포살의 길을 걷는다. 가능하면 서두르지
몇 년 전 성당 앞을 지나다 우연히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해미성지순례 관련 안내 문구가 써져 있었다. 당시 별스럽지 않게 ‘가톨릭에서도 성지순례로 신자들을 결집하고 전도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찾는구나’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했었다.이 같은 생각이 바뀐 것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천진암에 대한 가톨릭계의 태도를 보면서부터다. 천진암은 오랜 세월 스님들이 머물렀던 수행 공간이다. 그런데 가톨릭에서 자기들 성지라고 주장하며 안하무인으로 깃대를 꼽고 성역화 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불교를 비롯해 종교 역사에서 초전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