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스님들의 행렬. 겉모습으로 보아 비구니 스님이 비구와 다른 점은 긴 팔의 윗옷을 입고 있다는 점 뿐이다. 아직은 열악한 여건이지만 수행에 대한 이들의 열정만은 비구에 뒤지지 않는다. ‘여행자에게는 눈썹도 짐이 된다’는 말이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았던 물건이라도 막상 집을 나서고 나면 짐이 될 뿐이니 보따리를 최소한 가볍게 하라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가방의 무게를 줄이라는 것이 아니라 여행에 앞서 갖게 되는 조급한 마음과 많은 것을 보고 얻겠다는 욕심을 줄이라는 속뜻을 것이다. 콜롬보 공항에 첫 발을 디딜 때 순례객의 가방 속에는 온갖 욕심들이 가득 차 있었다. 부처님의 생생한 가르침을 만나고 랑카 섬에 남아 있는 찬란
승가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은 큰 공덕을 짓는 길이다. 의자에 흰 천을 깔아 스님들을 모시고 공양을 올린 후 기원하는 불자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깊은 신심이 엿보인다. 아침부터 스님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스리랑카 승가의 일상을 살펴보고자 이른 시간 사원을 찾았는데 어째 날을 잘못 잡은 듯 한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스리랑카 최대 종파인 씨암파의 중심 사원 캔디의 아스리기사와 인근에 위치한 스님 마을까지도 살짝 술렁이는 분위기다. “오늘 구족계 수계식이 있어요. 구족계 받을 스님들이 오전에 시험을 보는데 합격하면 오후에 바로 수계식이 열려요. 그래서 종정 스님부터 원로 스님들이 모두 모이셨어요.” 이리저리 오가며 종종 걸음을 치던 이곳 아스리기사의 스님 한 분이
캔디의 아스기리사 아래에 형성돼 있는 스님 마을. 아스기리사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랫 마을에는 씨암파에 속하는 스님들이 거주하는 작은 사원들이 밀집해있다. 1753년 스리랑카에는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네덜란드 상선을 이용해 씨암(지금의 태국)으로부터 스리랑카로 건너온 우팔리(Upali) 스님 등 25명의 전법단이었다. 이들은 단절된 스리랑카의 구족계단을 복원하기 위해 스리랑카 국왕의 요청을 받고 도착한 국빈들이었다. 네덜란드에 앞서 스리랑카를 지배했던 포르투갈의 점령 시기에 자행된 전대미문의 불교 박해로 인해 절멸의 위기에 처했던 승가를 간신히 복원하고 단절됐던 구족계단을 재건하기 위해 스리랑카는 씨암으로부터 구족계 전수를 요청했던 것이다. 씨암의 불교는 13세기
이른 아침 탁발을 나서는 스리랑카 스님들. 스님들의 탁발은 지계의 상징인 동시에 승가에 대한 공경을 표시하고 공덕을 쌓는 기회이다. 아침 6시. 오늘 아침도 변함없이 쾌청하다. 벌써 고개를 쑥 내밀고 올라온 아침 해 곁으로 구름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기는 하지만 해를 가릴 정도는 아니고 비를 품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스리랑카 사람들 정말 부지런하다. 자전거 패달을 열심히 밟으며 출근하는 사람, 차를 기다리는지 삼삼오오 길거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 간단한 먹거리를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노점상. 이른 아침이지만 거리는 벌써 꽤 많은 사람들로 술렁인다. 탁발은 스님의 위상 가늠하는 기준 이렇게 일찍 거리에 나온 것은 인근 사원의 스님들이 오전 7시 즈음 거리
누와라엘리야의 산등성이를 휘감고 있는 차밭. 끝도 없이 펼쳐지는 차나무와 곳곳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어우러져 있다. 오래간만에 차창을 활짝 열어 젖혔다. 아마 스리랑카 성지 순례를 시작한 이후 차창을 열고 달리기는 이번이 처음인 듯 싶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서는 숨이 막힐 정도로 늘 더웠는데 이곳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의 공기는 해가 중천에 오른 한 낮인데도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기운이 감돌 정도다. 스리랑카의 중앙부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누와라엘리야는 최고봉의 높이가 해발 2518m에 이르는 스리랑카 최고의 고산지역이다. 열대지방인 스리랑카에서 긴소매 옷이 필요한 몇안되는 지역이며 덕분에 스리랑카 사람들이 첫 손에 꼽는 휴양지이기
네덜란드는 스리랑카에서 포르투갈의 세력을 몰아낸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지금도 네곰보 등 해안가 도시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세운 요새와 교회 등이 즐비하다. “스리랑카에 가게 되면 가면과 바틱을 꼭 보세요. 스리랑카하면 흔히들 홍차를 떠올리지만 스리랑카의 전통과 문화가 담겨는 문화상품은 바틱하고 가면이에요.” 성지 순례 이력이 꽤나 화려한 한 지인이 서울에서 당부한 충고가 생각났다. 스리랑카에 도착한지 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거리 구경을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거니와 스리랑카의 바틱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바틱 상점을 찾아갔다. 사실 스리랑카의 바틱은 그리 유명한 편이 아니다. 바틱은 채색이 아닌 염색을 통해 문양이나
페라헤라에서는 횃불 춤, 채찍 다루는 기술 등 다양한 볼거리가 등장한다. 특히 횃불 춤은 한밤의 축제 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군다. “…복을 심고자 하는 자는 각각 도로를 평탄하게 하고 거리를 아름답게 꾸미며 여러 가지 꽃과 향, 공양 기구를 마련할지이다” 푸른 호수를 품고 있는 캔디의 아침은 맑고 청량한 기운이 가득하다. 스리랑카의 어느 도시보다도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모여 있는 곳 답게 아침부터 캔디 호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하거나 잔디밭에 벌렁 누워 맑은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는 것으로 느긋하게 하루의 시작을 즐기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도시 전체가 축제 열기 속에 일 년하고도 열두 달, 매일 이렇게 느긋하고 청량한 아
캔디를 살아 숨쉬는 붓다의 성지로 만드는 것은 오직 불치사가 있기 때문이다. 치아사리를 친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님에도 스리랑카 불자들의 발걸음은 끊이질 않는다. ‘옷은 단정한가. 조금 더 제대로 갖춰 입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정말 친견할 수 있을까. 설마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일정이 취소되는 일은 없겠지.’ 손바닥만한 거울을 통해 아무리 살펴봐도 오늘 차림새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뭐 꼭 정장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옷매무새에 자꾸 신경이 쓰이고 설렘으로 두근거리던 마음은 문득문득 불안한 생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불치사를 향해 가는 길은 기대와 설렘, 그리고 약간의 불안함으로 시작됐다. 캔디의 심장 불치사는 부처님의 치아 진신사
호수와 숲, 붉은 지붕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 스리랑카 제2 도시 캔디의 전경. 롬보와 폴론나루와의 중간, 랑카 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 캔디(Kandy)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정겨운 곳이다.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라는 캔디에 들어선다는 것만으로도 순례객의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스리랑카로 출발하기 전 서울에서 스리랑카에 대한 자료를 뒤적거리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름이 바로 캔디였다. 스리랑카의 수도는 콜롬보이지만 캔디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도시의 순위에서 콜롬보를 멀찍이 따돌리고 있다. 캔디는 2000여년 이상 이어져왔던 싱할라 왕조가 영국에 무릎을 꿇고 막을 내린 슬픈 역사의 도시이다. 동시에 마지막까지 제국의 침략에 대항하고 최후의 순간
붓다께서 재세시에 방문해 설법 하셨다는 켈라니야 라자 마하 위하라에는 밤늦은 시간까지 참배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어! 저거 교회 아니예요? 스리랑카에 저렇게 큰 교회가 있네요.”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이 고개를 푹 숙인 늦은 오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Colombo)에 들어섰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잘 정비된 도로와 10여 층 이상의 말끔한 현대식 건물들이 적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 소박한 시골길과 야트막한 농촌 가옥에 눈이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콜롬보의 현대적 이미지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다. 콜롬보는 현대식 건물들로 치장한 도시지만 곳곳에서 4~5층 높이의 유럽풍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개의 기둥과 건물 전면의 테라스, 혹은 아치형
갈 비하라에 조각된 붓다와 아난다. 태양을 상징하는 무늬가 조각된 둥근 베개 위로 붓다는 오른팔을 올려 머리를 받치고 오른쪽으로 누워 열반에 들었다.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애써 참으려는 듯 아난다는 두 팔을 끌어모아 어깨를 감싸 안고 있다. 붓다께서 쿠시나라의 사리쌍수 아래 누우셨다.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하고 오른쪽 발을 얹고 사자처럼 누워 바르게 생각하고 바른 마음을 가졌다. 그때 사리쌍수가 때에 맞지 않게 꽃을 피우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만개하여 꽃들이 붓다를 향해 휘날리듯 쏟아져 내렸다. 마치 열반을 앞둔 붓다께 최후의 공양을 올리려는 듯.아난다는 기둥에 기대어 소리 죽여 울먹이며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배워야 할 사람이고 아직
폴로나루와 불교유적의 중심지는 왕궁옆에 조성된 사원구역 쿼드랭글이다. 이곳엔 12개의 사원이 모여있다. 스리랑카 성지를 순례할 때는 반드시 지켜야할 몇 가지 예절이 있다. 우선 사원에 들어갈 때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나라의 사찰 예절과 별다를 바가 없다. 남녀를 불문하고 무릎 위로 올라가는 반바지나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웃옷 등이 경계 대상이다. 하지만 요즘은 스리랑카에도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늘어서인지 외국인들, 특히 서양인들의 옷차림은 이런 예절을 무색케 할 만큼 과감하기 그지없다. 낮 기온이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인 까닭에 외국인들 가운데는 아예 웃옷을 벗어버리고 다니는 남자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띤다. 하지만 스리랑카 사
시기리야 바위산 정상에 남아있는 카샤파 왕의 궁전. 스리랑카 관광청이 촬영한 항공사진이다. 스리랑카 불교의 첫 요람 아누라다푸라를 뒤로하고 여정을 남쪽으로 돌렸다. 불교가 도래해 뿌리내리고 꽃피우며 수많은 유적을 남긴 곳. 때론 이민족의 침략과 갈등으로 위기를 겪으면서도 굳건한 신심을 반석삼아 민족과 국가를 지켜낸 고대사의 영광이 남아있는 고도(古都)가 자꾸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은근하고 깊은 멋이 담겨있는 조선의 백자처럼 소박함 속에 유구한 역사를 그윽이 머금고 있는 아누라다푸라에 순식간에 정을 준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꾸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진짜 이유는 그 사이 진득이 쌓인 객지에서의 피로 때문이다. 물에 젖은 종이처럼 푹 늘어진 채 다음
대승불교를 수용하며 개방적인 자세로 교세를 넓혀나갔던 아브하야기리 위하라 승단의 중심지. 쇠락한 부파의 역사를 전하듯 아브하야기리 다고바도 세월의 무게 속에서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다. 『증일아함경』에는 출가자들의 시비를 경계하는 대목이 있다. 붓다께서 구심성(拘深城)에 계셨을 때 구심(拘深)이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항상 싸우기를 좋아하여 심지어는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하였다. 그의 악행으로 인해 승단이 소란스러워지자 어느 날 이른 아침 붓다께서 몸소 비구의 처소를 찾아가 말씀하기를 “너희 수행자들은 부디 싸우지 말고 서로 시비(是非)하지 말라. 너희들은 모두 한 스승을 섬기는 제자로서 마땅히 서로 화합하기를 물과 우유가 섞이듯 해야 한다.”며 구심 비
흑갈색의 바위를 깍아만든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 입구. 석굴사원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리랑카에는 고속도로가 없다. 일정 구간 사용 요금을 받고 주요 도시를 직통으로 연결해주는 차량 전용 도로가 없다는 말이다. 덕분에 모든 도로는 보행자들과 함께 사용해야 한다. 간혹 짐을 운반하는 코끼리들과 나란히 길을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도 낯선 풍경은 어디에서도 신호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보행자를 위한 횡단보도나 신호대기로 인한 정차 따위는 애초에 걱정할 바가 아니다. 운전자들은 우회전이든 좌회전이든 가릴 것 없이 앞, 뒤, 양 옆에서 오는 차들을 적당히 피해 요리조리 잘도 빠져 나가며 각자 제 갈 길을 간다. ‘안전 운행’을 위해 다른
5세기 경 붓다고사 스님이 머물던 아누라다푸라에는 수 십 개의 사찰과 수 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 아누라다푸라에 남아 있는 유적 가운데에는 당시 스님들의 목욕탕이었던 쿳탐 포쿠나가 있다. 붓다고사 스님도 분명 이곳에서 목욕하며 구법 여정의 피로를 풀었을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님 두 분이 누구인지 아세요?” 느닷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알루위하라(Aluvihara) 이곳저곳을 소개해주던 스리랑카 스님의 돌발퀴즈에 얼른 정답이 떠오르질 않는다. 순간 짐작하기로는 불교를 전해준 마힌다 스님과 파아나두라 대논쟁으로 유명한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 아닐까. 스님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틀렸다는 뜻이다. 스리랑카에서는 긍정을 표시할 때
불교사 최초의 경전인 패엽경이 조성된 알루위하라의 석굴 사원. 깎아지른 듯 한 바위 아래로 무려 14개의 석굴이 조성돼 있었다고 한다. 스리랑카 불교 최고의 성도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를 하루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하루 이틀 즈음 이 도시에 머물며 느긋하게 유적지 사이를 돌아보고 싶지만 빽빽한 일정이 그 정도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을 듯하다. 대신 부지런히 다리품을 파는 것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조급한 마음에 자꾸 빨라만 지던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흙빛 대탑 아브하야기리 다고바(Abhayagiri Dagoba) 앞에서다. 온통 순백으로 빛나는 스리랑카의 일반적인 탑과 달리 높이가 55미터에 달하는 이 웅장한 탑
아누라다푸라를 대표하는 루완웰리세야 다고바. 높이만도 55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다고바는 2300여 년을 변함없이 이어온 스리랑카 사람들의 견고한 신심을 상징한다. 스리랑카의 불교 도래지 미힌탈레에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이 거대한 신성도시까지 들어가는 데는 20여 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시원하게 냉방 장치를 켜 놓고 일행을 기다리던 차에 뛰어들 듯 올라타서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는 오렌지색 킹코코넛의 과즙을 홀짝홀짝 들이키며 미힌탈레에서 흘린 땀을 식혔다. 멀리 수풀 너머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아누라다푸라의 대탑을 향해 마음은 이미 달음질치고 있다. 문득 차창 밖으로 배낭을 둘러매고 아누라다푸라를 향해 열심히 자전거 패달을 밟
미힌탈레 지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산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마하세야 다고바다.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봉안돼 있다는 이 순백의 탑은 푸른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오늘 하루도 어지간히 덥겠다. 이제 겨우 오전 6시를 넘어섰는데, 차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제법 따갑다. 새벽 5시 전에 얼굴을 내미는 스리랑카의 태양은 이곳이 적도임을 각인시키려는 듯 7, 8시만 넘으면 벌써 위세가 등등해진다. 낮에는 30도를 훌쩍 넘어서는 기온에 내려 찌르는 듯한 햇빛은 이번 여정의 만만치 않은 복병이 될 듯하다. 새벽 일찍 길을 나선 것은 이런 열기를 좀 피해 비교적 선선한 아침 시간에 유적을 둘러보자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는 스리랑카의 성도 캔디. 불치사에서 내려다 본 캔디는 도시 전체를 휘감은듯한 오색의 불교기와 사원으로 향하는 이들의 눈부시도록 흰 옷, 그리고 푸른 캔디호가 조화를 이루며 낯선 순례자를 푸근히 맞아 주었다. 2550년 전 인도의 작은 마을 쿠시나가라의 사라수 아래, 열반에 임박한 붓다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제자들이여, 내가 가고 나면 그대들은 ‘스승의 가르침이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는 스승이 없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고 나면 내가 가르친 법, 진리와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되리라. 부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이 말을 마지막으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은 더 없이 고요하고 편안한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