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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최초의 경전 ‘패엽경’ 조성지 알루위하라

기자명 법보신문

“승가 절멸 후라도 법등이 전해지길”

<사진설명>불교사 최초의 경전인 패엽경이 조성된 알루위하라의 석굴 사원. 깎아지른 듯 한 바위 아래로 무려 14개의 석굴이 조성돼 있었다고 한다.

스리랑카 불교 최고의 성도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를 하루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하루 이틀 즈음 이 도시에 머물며 느긋하게 유적지 사이를 돌아보고 싶지만 빽빽한 일정이 그 정도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을 듯하다. 대신 부지런히 다리품을 파는 것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조급한 마음에 자꾸 빨라만 지던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흙빛 대탑 아브하야기리 다고바(Abhayagiri Dagoba) 앞에서다.

온통 순백으로 빛나는 스리랑카의 일반적인 탑과 달리 높이가 55미터에 달하는 이 웅장한 탑은 켜켜이 쌓아 올린 벽돌을 그대로 드러낸 채 정상부까지 무성히 자라난 이름 모를 잡초에 휩싸여 있다. 웅장하면서도 쓸쓸한 탑의 모습에서는 이 사원이 한때 위없는 영화를 누렸지만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일일뿐, 이미 역사의 무대에서 은퇴한 채 쓸쓸히 과거의 은막을 추억하는 노쇠한 주연배우임이 역력히 느껴졌다.

부파는 상좌부 결속 강화시켜

아브하야기리 다고바는 기원전 1세기에 탄생해 대승의 교리까지 두루 수용하며 번성했던 스리랑카 불교의 부파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무외산사파’로 지칭)의 중심지였다.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은 상좌부 전통의 고수를 주장했던 마하위하라 승단(‘대사파’로 지칭)과 약1200여 년간 대립과 경쟁 관계를 형성하며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공존했다. 하지만 12세기에 이르러 스리랑카는 결국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전래된 정통 상좌부로의 회귀를 택했고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은 소멸됐다. 하지만 부파의 발생과 오랜 갈등은 상좌부계를 더욱 단결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또한 부파의 발생과 대립 속에서 상좌부계는 인도로부터 전래된 상좌부의 정법이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암송에만 의존하던 불법의 전승을 문자로 남기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대립의 역사는 불교 최초의 경전 ‘패엽경’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낳은 것이다.

패엽경은 붓다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경전이다.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스리랑카에서도 불법은 구전으로 전승됐다. 스승이 설한 가르침을 제자는 한 마디도 틀리지 않게 외우고 다시 그의 제자에게 전승하는 방식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 200여년간 변함없이 계속됐다. 그렇기에 패엽경의 탄생은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에 맞서기 위한 경쟁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는 불법의 단절이 우려될 만큼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대기근으로 비구의 육신을 먹기도

<사진설명>알루위하라에는 패엽경 조성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 놓은 석굴이 있다.

싱할라 왕조가 세운 최초의 도읍 아누라다푸라는 남인도 타밀족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수난을 겪고 있었다. 기원전 103년 왕위에 오른 왓타가마니 아브하야(Vattagamani Abhaya) 왕은 타밀의 침략을 받아 아누라다푸라에서 쫓겨났다. 그는 와신상담 14년 만에 아누라다푸라를 되찾고 왕좌에 복귀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비참했다.

끊이지 않는 전쟁과 이민족의 지배, 여기에 엎친대 덮친 격으로 가뭄까지 들어 기근이 극에 달했고 나라 전체는 전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으로 황폐해졌다. 굶주린 백성들은 급기야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그토록 존경하던 비구의 육체를 먹는 일까지도 발생했다. 수천 명의 백성과 승려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갔고 사찰들은 버려졌다. 아누라다푸라를 빛나게 하던 순백의 대탑 루완웰리세야는 물론 불교의 중심사원이었던 마하위하라 조차 돌보는 이가 없어 잡초가 무성히 자라났다.

부파의 발생과 더불어 이같은 최악의 기근은 붓다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승가의 결단을 촉발시킨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결집의 장소로는 아누라다푸라에서 남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마탈레(Matale) 지역의 석굴사원 알루위하라(Aluvihara)가 선택됐다. 당시 알루위하라에는 500명의 스님들이 모였고 이들은 7년에 걸쳐 네 차례의 결집을 통해 경·율·론의 삼장(Tipitaka)을 완성했다. 그때까지 전승되던 모든 가르침을 총망라한 대경전이 탄생한 것이다. 알루위하라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두 곳만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다.

7년간 대결집으로 삼장 집대성

오늘날 알루위하라는 도서관과 학교 등을 갖춘 비교적 규모 있는 사찰이다. 사원 입구에서 잘 정비된 계단을 올라가면 마탈레 지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알루위하라의 도서관에 들어서면 패엽경의 재료들과 제작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전시실이라고 해서 번듯한 설비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넓은 공간을 할애해 패엽경의 제작 과정을 꼼꼼히 설명하고 있다. 불교 최초의 경전이 인도가 아닌 스리랑카에서 만들어졌다는 이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도서관 한 쪽에 놓여 있는 책장에는 패엽경이 가득 쌓여 있었다. 혹시 2000여 년 전에 제작된 그 경전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유리창 너머의 경전들을 살펴보았다. 한 스님이 눈치를 챘는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이 패엽경은 1981년부터 1991년까지 5명의 스님들이 제작한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제작된 최초의 패엽경과 5세기 이곳에 머물며 주석서를 집필한 붓다고사(Buddhagosa) 스님의 저술 등은 1848년 영국과의 전투 도중 영국군들이 절을 파괴하면서 소각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스리랑카의 보석과 홍차, 무역을 통한 막대한 이익에 눈이 먼 제국의 군인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이 기록된 인류 최초의 불전은 그저 오래된 나뭇잎사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패엽경을 탄생시켰던 역사도 그에 못지않게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었던가. 가슴 아픈 과거를 전해주는 스님의 얼굴에도 아쉬움이 스치지만 이내 스리랑카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간다.

1848년 영국군이 패엽경 불태워

<사진설명>석굴 사원 안에는 와불 등 여러 형태의 불상이 조성돼 있다. 화려한 벽화가 눈길을 끈다.

“패엽경이 있을 때에도 스리랑카 스님들은 2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스승이 전해주는 가르침을 그대로 암송해 전승했습니다. 경전 암송은 출가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수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전을 암송하지 못하면 출가하기도 어렵죠. 현재로서는 800여 년 전에 제작된 패엽경이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그건 전시하지 않고 있어서 보여드릴 수가 없네요.”
그 대신 알루위하라에는 패엽경을 제작할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 놓은 석굴이 있다. 10여 명이 들어갈 만한 석굴 안에 흙으로 빚은 인형을 이용해 2000여 년 전 패엽경을 만들던 모습을 연출해 놓았는데 제법 그럴듯하다. 또 다른 석굴엔 와불이 모셔져 있다. 석굴 내부는 화려한 색의 벽화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그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표현이 장엄함을 더하지만 고풍스런 맛은 덜하다.

석굴 앞이 소란스럽다. 알루위하라에서 일요일마다 열리는 일요학교의 학생들이 수업에 앞서 법당을 참배하러 온 것이라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사찰은 전통적인 초등교육 기관이었다. 지금은 국가에 의한 의무교육이 행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사찰은 시골학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비록 작은 규모라도 교실 한두 개쯤을 갖추어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기초적인 교육을 시키고 있다. 알루위하라의 일요학교에도 10세가량의 어린이들부터 17~18세의 청소년들이 모여 있는데 그 수가 족히 200여 명은 됨직하다.

여학생들은 교복으로 보이는 사리형태의 흰색 치마에 삼단같이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늘였고 남학생들은 흰색 셔츠에 사롱이라고 부르는 치마같이 둘러 입는 흰색 하의를 입고 있다. 학생들을 인솔하고 있는 선생님들도 모두 흰색 사리를 입고 있어 법당 앞은 갑자기 흰색 물결에 출렁이는 듯하다. 이들을 향해 두 손을 합장하며 “아유보완(안녕하세요)”하고 스리랑카식 인사를 건네니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 얼떨결에 합장하며 답례를 하는 아이, 부끄러운 듯 친구 등 뒤로 얼굴을 감추는 아이…. 수백 개의 눈동자를 한 몸에 받으며 쑥스러워진 건 오히려 이쪽인데 말이다. 돌아서는 등 뒤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청량한 예불 소리가 바위산을 타고 석굴 사원  깊이 스며들고 있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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