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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왕조의 몰락과 영국의 식민지배

기자명 법보신문

나라는 빼앗겨도 ‘불교’만은 지켜지길

<사진설명>누와라엘리야의 산등성이를 휘감고 있는 차밭. 끝도 없이 펼쳐지는 차나무와 곳곳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어우러져 있다.

오래간만에 차창을 활짝 열어 젖혔다. 아마 스리랑카 성지 순례를 시작한 이후 차창을 열고 달리기는 이번이 처음인 듯 싶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서는 숨이 막힐 정도로 늘 더웠는데 이곳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의 공기는 해가 중천에 오른 한 낮인데도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기운이 감돌 정도다.

스리랑카의 중앙부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누와라엘리야는 최고봉의 높이가 해발 2518m에 이르는 스리랑카 최고의 고산지역이다. 열대지방인 스리랑카에서 긴소매 옷이 필요한 몇안되는 지역이며 덕분에 스리랑카 사람들이 첫 손에 꼽는 휴양지이기도 하다. ‘실론티’로 유명한 스리랑카 홍차에 사용되는 차나무도 대부분 이곳에서 재배된다. 지난 밤 늦은 시간 누와라엘리야에 도착한 탓에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산등성이의 차밭들이 구름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로 그림처럼 펼쳐진다. 습기를 듬뿍 머금은 서늘한 공기 속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초록 잎의 차나무들은 산허리를 휘감은 겹겹의 허리띠처럼 긴 줄무늬를 만들며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차밭의 풍경은 우리나라 보성 지역과도 흡사하지만 누와라엘리야에서는 능선을 넘어 수직으로 떨어지는 크고 작은 폭포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이방인들의 탄성이 끊이질 않는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지만 발밑의 사정은 그와는 정반대다. 강우량이 많은 탓에 포장도 되지 않은 도로 곳곳이 심하게 파헤쳐져 있거나 도로 절반 가량이 낙석에 묻혀있는 곳도 적지 않다. 산허리를 감으며 내려오는 도로 밖은 낭떠러지이지만 변변한 가드레일 하나 없으니 그저 숙달된 운전기사의 솜씨만 믿을 뿐이다. 그래도 풍경이 주는 환희와 오랜만에 마셔보는 시원한 자연 공기에 마음은 자꾸 느긋해 진다. 그런 편안함이 일순간에 깨어진 것은 일행의 다급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홍차 명산지 누와라엘리야

<사진설명>찻잎을 따는 누와엘리야의 인도 타밀족 노동자들.

“어머, 저 아이 지금 뭐하는 거예요? 저렇게 뛰어내려오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순간 차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차창 밖으로 쏠렸다. 창밖에서는 열 살 가량의 한 소년이 달음박질치며 우리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소년은 도로가 급커브를 이루는 지점에 이르자 다람쥐처럼 도로 밑 경사면을 가로질러 뛰어내려오는 방법으로 차를 앞지르더니 야생화 한 다발을 내민다. 아마도 꽃을 사달라는 뜻인 듯 싶다. 눈이 휘둥그레진 일행의 표정과는 달리 운전기사는 귀찮다는 듯 계속 차를 몬다. 하지만 다음 커브를 돌아서는 순간 아까의 그 소년이 또다시 그 곳에 서있었다. 아까보다 더 숨을 헐떡이며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이곳 타밀족 소년이에요. 늘 저런 식으로 꽃을 팔죠. 아까 저 산 정상에서부터 따라오고 있었어요.”

야생화 한 다발을 팔기위해 깎아지른 낭떠러지를 위험천만하게 뛰어내려오며 차를 따라잡는 소년의 모습에 차안의 일행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잠시 차안에서는 ‘계속 따라오면 위험하니까 어서 꽃을 사주어서 보내자’는 의견과 ‘꽃을 사주게 되면 다음에도 계속해서 저렇게 위험한 방법으로 꽃을 팔려 할 것이기 때문에 절대 사주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설왕설래한다. 답은 간단하게 나오지 않고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차가 능선을 다 내려올 때까지 소년의 위험한 질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저 소년의 질주만큼이나 이곳 타밀 인들의 삶은 고단하다. 싱할라족이 인구의 약 74%에 달하는 스리랑카에서 타밀족의 비율은 약 18% 가량이다. 이 가운데 12.5%는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갖고 때로는 싱할라 왕조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던 토착세력으로 이들은 스리랑카 타밀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곳 누와라엘리야에서 만날 수 있는 타밀인은 대부분 영국의 식민지 시절 커피와 차나무 재배를 위해 인도로부터 강제 이주당한 인도 타밀족 노동자들의 후손이다. 인구의 5.5%가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누와라엘리야의 차밭에서 찻잎을 따는 노동으로 생활하며 스리랑카의 최하층민을 형성하고 있다. 값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들은 사회적 차별과 열악한 교육 여건으로 인해 희망을 찾기 어려운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1815년 영국 식민지로 전락

<사진설명>누와라엘리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차 '실론치'의 생산지다.

스리랑카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배가 시작된 것은 1815년 캔디 협약이 체결되면서다. 영국과의 동맹으로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싱할라 왕조는 영국이 태도를 바꿔 해안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움켜쥐고 세력을 넓혀 나가자 영국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영국은 이를 기회로 1803년 싱할라 왕조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왕과 귀족들 간의 대립으로 허약해져 있던 틈을 이용, 1815년 2월 15일 싱할라 왕조의 수도 캔디를 점령해 싱할라의 왕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하(Sri Vikrama Rajasimha. 1798~1815)를 포로로 잡게 된다. 이어 3월 2일 왕은 왕조의 대표들과 스님들로 구성된 식민지 의회에서 나라의 통치권을 영국 왕실에게 넘긴다는 식민 조약, 일명 캔디 협약에 서명하고 폐위된다.

이로써 2300여 년간 이어져 온 싱할라 왕조는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영국은 스리랑카 역사상 최초로 랑카 섬 전체에 대한 식민 지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스리랑카는 310년간 계속된 서구 열강의 침략을 잘 견뎌냈지만 결국 이교도 국가인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잃더라도 법등만은 지키려 했던 싱할라 왕조의 노력은 캔디 협약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싱할라 왕조는 나라는 넘긴다는 캔디 협약의 제5조에 ‘불교는 범할 수없는 신성한 종교이므로 불교의 의식, 의식과 관련된 사람, 그리고 예배하는 장소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영국 정부의 의무다’라는 문항을 포함시켰다. 나라 전체를 영국에게 넘겨주며 왕조는 막을 내리지만 불교국가로서의 전통을 지키고 법등을 수호하려했던 싱할라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확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불교를 보호하고 유지한다’는 대목을 협약에 넣은 영국의 속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협약은 단지 스리랑카에 대한 완전한 식민 지배를 하루라도 빨리 이루기 위해 왕조를 종식시키려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식민 지배를 시작한 영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식민지배 초기 스리랑카에 파견된 영국의 총독은 치아사리 이운 축제와 불교의 최고 장로를 임명하는 왕실 행사에 참석하는 등 스리랑카의 불교 전통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곧바로 영국 본토의 기독교계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고 곧이어 이러한 의식들은 폐지됐다. 이는 왕실과 불교계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의식들이 중단됨으로써 불교가 점유하고 있던 국교로서의 지위가 사실상 상실됐음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영국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한편 이들을 통해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불교에 대한 비하와 비난을 쏟아 부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사찰이 담당하던 지역 교육시설로서의 기능을 박탈하며 모든 학교를 교회 내에 설치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싱할라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사찰을 분리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기독교인이 아니고서는 공무원이 될 수도 없고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면 출생신고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승가에 대한 스리랑카 사람들의 존경과 믿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여전히 승가를 가장 고귀한 존재이자 존경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자신들이 불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선교사 통해 불교 공개 박해

<사진설명>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왕이 었던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하의 왕관. 스리랑카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지배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다수민족이었던 싱할라 인을 지배하기 위해 영국은 소수민족이었던 스리랑카 타밀족을 중용하는 정책을 썼다. 또한 전통적인 소규모 농업을 강제로 통합해 집단 농장으로 만들어 커피, 고무, 차 나무 등을 대규모로 재배하며 남인도의 타밀족을 강제 이주시켜 노동자로 활용했다. 영국의 이 같은 민족 분리 정책은 스리랑카가 독립한 이후에도 민족 간의 갈등이 계속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간간히 외신을 장식하는 스리랑카 내전의 심각한 원인이 되고 있다. 야생화 한 다발을 들고 비탈길을 뛰어내리는 저 소년도 결국은 역사가 낳은 아픈 산물인 것이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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