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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불교의 첫 보금자리 아누라다푸라

기자명 법보신문

전법의 환희 생생한 랑카 最古의 신성도시

<사진설명>아누라다푸라를 대표하는 루완웰리세야 다고바. 높이만도 55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다고바는 2300여 년을 변함없이 이어온 스리랑카 사람들의 견고한 신심을 상징한다.

스리랑카의 불교 도래지 미힌탈레에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이 거대한 신성도시까지 들어가는 데는 20여 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시원하게 냉방 장치를 켜 놓고 일행을 기다리던 차에 뛰어들 듯 올라타서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는 오렌지색 킹코코넛의 과즙을 홀짝홀짝 들이키며 미힌탈레에서 흘린 땀을 식혔다. 멀리 수풀 너머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아누라다푸라의 대탑을 향해 마음은 이미 달음질치고 있다. 문득 차창 밖으로 배낭을 둘러매고 아누라다푸라를 향해 열심히 자전거 패달을 밟고 있는 금발의 젊은 이방인 3~4명이 보였다. 자전거를 이용해 배낭여행 중인 청년들이다. 이들도 아침 일찍 미힌탈레를 둘러보고 아누라다푸라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전거 여행객들을 피하기 위해 차가 속도를 줄이자 그들의 얼굴이 창밖으로 또렷이 보였다. 며칠째 저렇게 패달을 밟으며 여행 중인가 보다. 햇빛에 그을려 이미 구릿빛으로 변해있는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흐르고 있다. 냉방이 잘 되는 차안에 앉아서도 좀처럼 흐르는 땀이 멈추질 않는데, 저들은 지금 아누라다푸라의 대지 곳곳을 건강한 땀으로 적시며 도시 전체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문득 저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저 냉방이 잘되는 차에 몸을 싣고는 오래되고 유명하다는 유적지를 한 바퀴 획 둘러 본 후 호들갑스럽게 땀을 닦으며 호텔로 돌아가는 그저 그런 동양의 여행객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힌탈레를 통해 스리랑카에 전해진 불교가 둥지를 튼 첫 보금자리, 동시에 화려한 꽃을 피운 장엄한 역사의 현장으로 가는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본다.

성도 보리수의 가지가 자라는 도시

<사진설명>불교에 귀의한 데바남피야 티샤 왕이 세웠다는 이수루무니아 정사에는 지금도 스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누라다푸라는 기원전 380년 싱할라 왕조의 도읍이 되었다. 특히 기원전 236년 데바남피야 티샤(Devanampiya Tissa. B.C.E 250~210) 왕이 불교에 귀의한 이후로는 스리랑카 정치-경제의 중심인 동시에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인도의 엘로라, 혹은 우리나라의 경주가 그러하듯이 아누라다푸라도 도시 전체가 그대로 거대한 유적이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면 이 유구한 역사의 도시를 거론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누라다푸라 유적 순례는 이 도시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성스러운 보리수 스리마하보디(SriMahaBodhi)로부터 시작했다. 이 보리수는 부처님이 성도한 인도 부다가야 보리수의 가지를 마힌다 스님의 동생, 즉 아쇼카 왕의 딸인 비구니 상가미타 스님이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보리수에 대한 스리랑카 사람들의 경배는 각별하다. 아누라다푸라는 바로 이 보리수로 인해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령이 2000여 년이나 되었다는 보리수는 가지를 넉넉하게 늘어뜨린 채 푸르고 무성한 잎을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무 주변으로는 축대가 둘러쳐져 있어 더 이상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 축대는 19세기경에 야생코끼리와 동물들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는데, 덕분에 이 신성한 보리수의 잎사귀 하나 조차 만져 보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이 사원을 순례하는 스리랑카 사람들은 사원의 입구에서부터 꽃바구니를 머리위로 높이 들고 들어와서는 축대 아래에 정성스럽게 꽃을 올리며 끝도 없는 기도를 이어간다.

스리마하보디와 함께 아누라다푸라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유적은 루완웰리세야 대탑(RuwanweliSeya Dagoba)이다. 미힌탈레 언덕 위에서도 뚜렷이 보였던 이 거대한 탑은 도시의 상징으로 높이만도 55미터에 달한다. 동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이 평원의 도시에서 대탑은 마치 하나의 산처럼 우뚝 솟아 눈부시게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귀의하지 않은 자 사람이 아니다”

탑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탑을 조성한 둣타가마니(Dutthagamani. B.C.E 161~137) 왕은 아누라다푸라를 침략해 온 엘랄라(Elara)왕과 타밀군을 무찌른 싱할라 왕조의 영웅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왕조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겠다”며 부처님의 사리를 자신의 창끝에 넣고 전쟁에 임했다. 불교를 수호하겠다는 둣타가마니 왕의 선언은 싱할라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했으며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싱할라 민족주의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둣타가마니 왕이 불교 수호를 전쟁의 목표로 내세웠을 정도로 당시 싱할라인들의 신심은 견고했다. 심지어 그들은 불교도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라고 여길 정도였다. 이러한 신념에 힘입어 둣타가마니 왕은 타밀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수 천 명의 적군을 죽인 왕은 매우 괴로워했다. 이때 여덟 명의 승려들이 나서서 왕을 위로했다.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해야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며 “적군(타밀군)은 동물과 다름없으며 따라서 왕은 이 전쟁에서 사람은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왕은 이 말에 크게 위안을 받고 불교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당시 불교계의 이러한 논리는 이후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불교는 왕조의 보호아래 더욱 융성해질 수 있었다. 아누라다푸라를 지킨 둣타가마니 왕은 말년에 엄청난 크기의 탑, 루완웰리세야를 짓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이 탑의 높이가 110미터였다고 하니 그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다.

창끝에 불사리 넣은 채 전쟁

하지만 왕은 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 공사를 지휘하던 왕자 사다팃사는 아버지의 죽음이 임박하자 대나무와 흰 천을 이용해 하룻밤 사이에 탑의 모양을 만들었다. 왕자는 임종을 앞둔 왕에게 “탑이 완성됐다”며 창문을 열어 루완웰리세야를 보여주었다. 기운이 쇠해 시력마저 흐릿해진 둣타가마니는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거대한 흰 탑을 보고는 탑이 완성되었다고 믿으며 편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탑 입구에는 단정히 합장하고 서 있는 둣타가마니 왕의 동상이 있다. 비록 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창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수 천 명의 적군을 죽여야 했던 그의 괴로움이 이처럼 아름다운 탑을 낳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란 바로 이런 것이다. 둣타가마니 왕의 눈길은 이 아름다운 대탑을 향해 고정돼 있었다. 자신의 죄업을 조금이라도 닦아내기 위해 이렇게 큰 탑을 만든 왕의 참회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듯 보였다.

아누라다푸라에서는 사방 어느 곳으로 발길을 옮기든 역사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유적들과 마주치게 된다. 데바남피야 티샤 왕이 마힌다 스님을 위해 지었다는 이수루무니아 정사(Isurumunia Vihara), 스리랑카에 한때 융성했던 대승불교의 상징 아브하야기리 다고바(Abhayagiri Dagoba), 특히 스님들의 목욕탕이었다는 쿳탐 포쿠나(Kuttam Pokuna)는 지금 당장이라도 물을 채워 수영장으로 쓰기에 손색이 없을 만치 견고한 모습이다. 이러한 유적들은 이 도시가 과거에 얼마나 화려한 영화를 누렸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련된 도로와 지하 2층에 2, 3층의 규모를 자랑했던 가옥들, 그리고 보석으로 장식한 방이 1000개나 있었다는 궁전과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탑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었다는 안내자의 설명이 마치 어제의 일을 이야기하는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 듯

<사진설명>부처님이 성도한 인도 부다가야 보리수의 가지를 옮겨 심었다는 스리마하보디에 꽃을 공양하기 위해 정성스럽게 꽃바구니를 만들고 있는 스리랑카 여인.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온다. 이 도시를 감싸고 있는 공기 속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이 뒤섞여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1700여 년 전에 만들었다는 농업용 저수지와 수로를 여전히 일상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민들 옆으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흔적만 남아버린 수백 년 전의 유적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흩어져 있는 도시. 금방 보수를 끝낸 말쑥한 다고바들과 무성히 자란 잡초에 묻혀있는 또 다른 다고바들이 나란히 서 있는 곳. 과거의 것을 보호하기 위해 난간을 두르고 ‘촬영금지’라는 팻말을 붙이는 것으로도 부족해 아예 박물관 깊숙이 보관하는 일에 익숙한 순례객에게 이 도시의 독특한 풍경은 참으로 당혹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이방인의 불평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아누라다푸라는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원엔 여전히 많은 스님들이 살고 있고 불자들은 수 백, 수 천 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과 보리수, 불상 앞에 오늘도 변함없이 등불과 꽃을 공양하고 있다. 문득 “아누라다푸라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스리랑카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던 스리랑카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마도 2300여 년 전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처음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 받았을 때 스리랑카 사람들이 느꼈을 기쁨과 환희가 이 도시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날의 환희가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이 도시에서 ‘낭만적인 과거의 전설’을 찾으려했던 순례객의 욕심이 더없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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