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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남방의 법등에 첫 발을 디디며

기자명 법보신문

“법이 그대의 스승되리라”던 붓다의 약속이 살아있는 땅

<사진설명>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는 스리랑카의 성도 캔디. 불치사에서 내려다 본 캔디는 도시 전체를 휘감은듯한 오색의 불교기와 사원으로 향하는 이들의 눈부시도록 흰 옷, 그리고 푸른 캔디호가 조화를 이루며 낯선 순례자를 푸근히 맞아 주었다.

2550년 전 인도의 작은 마을 쿠시나가라의 사라수 아래, 열반에 임박한 붓다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제자들이여, 내가 가고 나면 그대들은 ‘스승의 가르침이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는 스승이 없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고 나면 내가 가르친 법, 진리와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되리라. 부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은 더 없이 고요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니르바나의 세계에 들었다. 쿠시나가라까지 붓다의 뒤를 따랐던 많은 제자들은 눈물 뒤덮인 오열로 위대한 스승의 빛이 사라짐을 슬퍼했으며 천신들조차 이 슬픔을 이기지 못해 천지를 진동시키며 애통해했다.

‘눈물’로 소개되는 작은 섬

그리고 2550년이 흘러 ‘내가 가르친 법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되리라’던 붓다의 마지막 한 마디, 이제는 경전 속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그 오래 전의 약속이 불연 다시 떠오른 것은 인도양이 품고 있는 작은 섬 스리랑카에서였다.

스리랑카로 가는 길은 지구의 자전축을 거슬러 날아가야 했다. 덕분에 운해를 붉게 물들이는 해질녘의 노을을 무려 2시간이나 감상할 수 있는 낭만적인 여정의 시작이었다. ‘의자를 조금씩 앞으로 당기기만 하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노을을 볼 수 있었다’던 어린왕자라도 된 양 애써 구름 뒤로 도망치는 해를 설레임 가득한 시선으로 좇으며 스리랑카에 대해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었다. 넋을 놓고 상념에 젖어있는 틈을 이용해 태양은 한달음에 도망치듯 인도양 너머로 몸을 숨기고 비행기는 풋내기 순례자를 어둠 내린 콜롬보의 국제공항에 떨어뜨렸다. 남방불교계의 부처님오신날인 웨삭포야(부처님오신날)를 이틀 앞둔 5월 10일, 가장 먼저 일행을 맞이한 것은 공항을 가득 매운 연등이었다. 그 화려한 펄럭임을 바라보는 순간 짧은 탄성이 튀어나왔지만 그것은 감동이기에 앞서 낯선 세상으로의 첫발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자기만의 ‘파이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콜롬보 공항의 유리문을 나서는 순간 살갗을 뚫고 허파 속으로 밀려오는 듯 후끈한 열기와 어둠 속에서 더욱 검게 보이는 피부의 사람들, 그리고 혼란스러운 거리의 풍경이 순식간에 주위를 에워쌌다. 지금까지의 ‘낭만적인 상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엔 두려움어린 호기심에 잔뜩 주눅 든 이방인이 서 있을 뿐이었다.

인도가 ‘붓다의 땅’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으로 불리고 있을 때 스리랑카, 이 작은 섬의 이름은 언제나 ‘눈물’이라는 단어로 시작되었다. 어떤 이는 스리랑카를 가리켜 ‘인도가 흘린 눈물 한 방울’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슬픔의 진액이 뭉쳐 떨군 눈물’이라고도 했다. 지도 위에 그려지는 스리랑카의 모양새가 떨어지는 물방울과 닮았다고는 하지만 굳이 눈물에 비유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근거리 역사 속의 스리랑카가 늘 대륙 열강의 식민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500여년 식민 지배의 역사

<사진설명>공양을 올리기 위해 스님을 초대하는 경우 스리랑카 불자들은 스님의 맨발을 정성스럽게 닦아 준다. 스리랑카 불자들에게 이러한 행동은 지극한 신심의 표현이며 더 없는 영광이다.

스리랑카 식민 역사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인 15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리상의 발견의 시대’로 불리는 15~16세기,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통해 동양을 유럽에 소개한 이후 그들의 관심은 온통 동쪽으로 쏠려있었다. 이 가운데 인도로 향하는 해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은 동방 무역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인도를 거쳐 스리랑카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505년 스리랑카 해안에 포르투갈의 선박이 처음 등장한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을 거쳐 1948년까지 스리랑카는 유럽 열강들의 식민 지배를 받아야 했다. 500여년 가까이 이어져온 기독교계 국가들의 침입 속에서 불교는 탄압과 박해의 수준을 넘어 절멸의 위기를 수없이 겪어야만 했다. 사원은 파괴되고 숱한 스님들이 학살됐으며 개종을 거부한 국민들은 처참한 고문으로 내몰렸다. 이런 법난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오늘날 저처럼 건재하고 있는 스리랑카 불교의 모습에 오히려 경외감이 느껴질 지경이다.

이러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즈음 스리랑카 역사서의 한 페이지에 뚜렷이 이름을 남기고 있는 작은 해안가 마을 파아나두라로 시선이 모아졌다.

1862년 불교 포교 협회와 출판사 등을 설립하며 스리랑카 불교 부흥을 위해 활동하던 모호티왓테 구나난다(1823~1890) 스님은 1873년 8월 26일과 28일 기독교인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와 시리만나 전도사를 상대로 불교의 명운을 건 한판 ‘진검승부’를 펼쳤다. 영혼, 신, 구원 및 불교를 비하하는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그들 교리의 허점과 허구성을 조목조목 지적한 구나난다 스님의 대논쟁은 스리랑카 불교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여기서 잠깐 그날의 논쟁을 들여다보자.

“만약 누군가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항상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눈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지옥과 같은 괴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독교 교리의 모순을 지적하는 구나난다 스님의 논리에 기독교 대론자들은 “이미 죽은 붓다에게 귀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애써 반박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그들의 짧은 지식을 준엄히 지적하며 논리적인 대론을 이어나갔다.

“구약성서에는 ‘땅 위에 사람들 만드셨음을 한탄하시어 마음에 근심을 하시고’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는 여호와에게 걱정거리가 생기게 된 것은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장래의 걱정거리를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행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소행인 것입니다.”

이날의 기록들은 스님의 대론을 마지막으로 대논쟁이 끝났을 때 “1만여 명의 불교, 기독교 신자들이 일제히 사두, 사두(상대의 말에 감동과 찬의를 나타내는 용어)라고 소리 높여 제창했으며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행동에 불쾌감을 금치 못했다”고 전했다. 또 당시 이 논쟁을 주선하고 끝까지 지켜보았던 서양의 한 인사조차 “논쟁이 불교 측 승리로 돌아간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현대에 이르러 이 사건에 대한 조명은 더욱 활발해져 일본의 세계적인 불교학자 나까무라 하지메(中村 元) 박사는 “동양과 서양의 종교 문명에 반성의 기회를 주었으며, 모든 종교의 협력 또는 세계 평화에의 길을 열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불교 위상 드높인 파아나두라

파아나두라에서의 대논쟁은 이 날의 대론이 불교 측의 승리로 끝났다는 표면적 결과보다 더욱 큰 의미로 평가 받기에 충분하다. 이 대논쟁이 끝난 후 사원들은 축제를 벌이고 마을마다 구나난다 스님의 초상을 높이 들고 행렬하며 불교의 승리를 축하했다. 이는 오랜 열강의 지배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은 스리랑카 국민들의 자부심이었으며 이민족 종교의 집요한 박해와 탄압에도 결코 흠집나지 않은 진리, 불법에 대한 경외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스리랑카인들의 자부심과 굳은 신심은 500여 년의 식민역사를 거쳐 온 스리랑카가 여전히 찬란한 법등의 나라로 빛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지도 속의 스리랑카는 여전히 작은 나라다. 한반도 3분의 1에 해당하는 섬나라에 인구 1800만명,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880달러(2003)에 그치는 ‘가난한’ 나라이기도 하다. 아시아사에 관해 다루는 여러 종류의 책 속에서도 스리랑카의 역사와 위치는 생략되기 일쑤다.

굳은 신심으로 기억되는 나라

<사진설명>스리랑카 불자들의 가장 큰 공양물은 꽃과 등불이다. 불탑 앞에 소박하고 작은 토기의 기름등을 올리는 이 여인의 소원은 무엇일까.

하지만 스리랑카의 역사는 곧 불교의 남방 전래사이며 스리랑카 불교사의 흥망성쇄는 고스란히 스리랑카 역사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리만치 역사 속의 불교는 살아있는 주인공이다. 이러한 자부심은 스리랑카 불교가 2550년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부처님 재세시의 생생한 숨소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붓다가 남긴 법과 계율을 살아있는 붓다처럼 의지하며 수행하는 황색 카사야의 승단과 그 발아래 기꺼이 머리 조아리는 스리랑카 불자들의 모습은 열반의 날 붓다께서 남긴 당부가 변함없이 살아 숨 쉬는 땅임을 확인시켜주며 손끝까지 저려오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스리랑카는 여전히 불안하고 가난한 삶이 이어지는 땅이다. 하지만 순박한 미소로 이방인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눈물’에 비유되는 이 섬이 결코 ‘슬픔의 진액’이 아닌, 그 옛날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보물섬 ‘셀린디브’이며 마르코 폴로가 예찬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임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연꽃 한 송이를 불단에 올리는 그들의 신심은 이곳이야말로 붓다가 살았던 위대한 진리의 시대를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 보석 같은 불법의 땅임을 보여주었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지구 반대편으로의 여정은 그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을 꿰뚫고 있는 하나의 키워드, 바로 그들 마음속 깊은 신심으로의 여행이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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