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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청정도론』 집필한 붓다고사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구법 원력으로 잉태한 남방수행의 등불

<사진설명>5세기 경 붓다고사 스님이 머물던 아누라다푸라에는 수 십 개의 사찰과 수 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 아누라다푸라에 남아 있는 유적 가운데에는 당시 스님들의 목욕탕이었던 쿳탐 포쿠나가 있다. 붓다고사 스님도 분명 이곳에서 목욕하며 구법 여정의 피로를 풀었을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님 두 분이 누구인지 아세요?”

느닷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알루위하라(Aluvihara) 이곳저곳을 소개해주던 스리랑카 스님의 돌발퀴즈에 얼른 정답이 떠오르질 않는다. 순간 짐작하기로는 불교를 전해준 마힌다 스님과 파아나두라 대논쟁으로 유명한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 아닐까. 스님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틀렸다는 뜻이다. 스리랑카에서는 긍정을 표시할 때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고 부정을 표시할 때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하고는 정 반대다.

“마힌다 스님은 맞는데, 다른 한 분이 틀렸어요. 구나난다 스님도 존경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는 붓다고사 스님을 능가할 분이 없죠. 바로 저 동상이 붓다고사 스님입니다.”
스님이 가리키는 쪽으로 황급히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 동상의 생김새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또렷한 이목구비며 번쩍이는 금도금, 며칠 전 미힌탈레에서 보았던 마힌다 스님과 쌍둥이처럼 흡사하다. 하지만 스님은 ‘눈매가 어떻고, 코는 어떻고, 키는 어떻고’하며 마힌다 스님 동상과의 차이를 설명해주느라 한참 동안 애를 쓴다. 그래도 별로 다른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이곳에 왜 붓다고사 스님의 동상이 서 있는지가 더 궁금한데 말이다.

팔리어로 패엽경 번역-주석

붓다고사(Buddhaghosa) 스님은 5세기 중엽 인도 출신의 스님이다.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하나마왕(Mahanama. 406∼428) 시대에 스리랑카로 건너와 싱할리어로 된 삼장, 즉 패엽경을 팔리(Pali)어로 번역하고 주석서를 집필했다. 특히 삼장에 대해 주석하고 상좌부 불교의 교리와 학설을 집대성한 붓다고사 스님의 저서『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은 오늘날까지도 남방 불교계의 가장 권위 있는 논서로 첫 손에 꼽히고 있다. 『청정도론』은 상좌부 불교 교리의 집대성인 동시에 완전한 청정, 즉 열반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조목조목 제시했다는 점에서 불교사의 커다란 획으로 평가된다. 개인의 수행을 중시하고 단계에 따른 체계적 수행을 실시하는 남방불교의 전통은 『청정도론』을 통해 완성되고 전승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불교 수행 세계화의 선두에 서있는 상좌부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은 이 『청정도론』에서부터 시작됐고 완성된 셈이다. 붓다고사 스님이 없었다면 오늘날 불교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상좌부 불교는 그 견고한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붓다고사 스님이 스리랑카에 머문 기간은 약 2~3년 정도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논서는 아누라다푸라의 마하위하라(Mahavihara)에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루위하라의 스님들은 붓다고사 스님이 『청정도론』 집필에 앞서 이곳에 7년간 머무르며 패엽경을 공부하고 일부 주석서들을 집필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청정도론』의 씨앗이 잉태된 곳은 알루위하라라는 것이 이곳 스님들이 강조하는 대목이다.

『청정도론』 위빠사나의 처음과 끝

이쯤 되면 붓다고사 스님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간혹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어느 것이 설화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아 곤혹스럽긴 하지만. 비교적 신뢰할 만한 기록은 스리랑카의 고대역사서인 『마하밤사(Mahavamsa)』에서 찾을 수 있다.

붓다고사 스님은 북인도 부다가야 인근에서 브라만 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베다」를 비롯해 다양한 철학과 지식들을 익혔다. 그러던 어느 날 레바타(Revata)라는 이름의 스님을 만났는데 그와의 논쟁에서 그만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베다」의 지식에 한계를 느끼고 불교에 귀의해 출가했다. 붓다고사 스님에게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전하는 각별한 능력이 있었던 듯하다. 그의 말은 마치 붓다의 말씀처럼 중후했으며 듣는 이들을 쉽게 이해시킨다고 해서 그 이름도 ‘붓다고사’ 즉 부처님의 소리(佛音)라는 뜻으로 불렸다. 붓다고사 스님의 이 같은 실력을 인정한 레바타 스님은 붓다고사 스님을 스리랑카로 파견했고, 마하위하라에 머물며 상가팔라(Sanghapala) 스님으로부터 싱할리어와 삼장을 공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청정도론』을 집필하게 됐다.

미얀마 등 남방에 불교 전해줘

<사진설명>알루위하라의 석굴 사원 앞에는 붓다고사 스님의 동상이 있다. 보호각까지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일설에 의하면 붓다고사 스님이 팔리어 주석서를 집필하기에 앞서 마하위하라 스님들이 그에게 시험문제를 냈다고 한다. 두 개의 게송을 주며 이에 대한 논평문을 작성하도록 했는데 붓다고사 스님이 순식간에 이 일을 마치자 신들이 나타나서는 그 원고를 숨겨버렸다. 붓다고사 스님은 곧바로 다시 논평문을 썼는데 이번에도 다 쓴 원고가 사라져 버렸다. 붓다고사 스님이 세 번째로 논평문을 써 스님들 앞에서 이것을 발표하자 그제서야 사라졌던 논평문들이 모두 나타나 부족한 내용을 보충하게 됐다고 한다. 시험을 통과한 붓다고사 스님은 무사히 『청정도론』을 집필할 수 있었으며 이후 미얀마 등 남방으로 불법을 전했다.

불교의 남방전래에 있어 붓다고사 스님의 영향력,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대목은 미얀마의 불교전래 설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얀마에는 불교전래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붓다고사 스님에 의한 전래설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붓다고사 스님이 미얀마 출신이라는 주장이다. 미얀마의 구전에 따르면 붓다고사 스님은 미얀마 남부의 해안가인 타통(Thaton) 출신으로 이곳에서 배를 타고 인도를 거쳐 스리랑카로 들어갔다. 붓다고사 스님은 3년간 스리랑카에 머물며 삼장을 번역한 후 스리랑카 사람들이 건넨 귀한 선물들과 함께 돌아왔다고 한다. 학술적으로 그리 인정받는 주장은 아니지만 붓다고사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지극하다보니 민중들이 마음속에서 그를 미얀마 사람으로 둔갑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1500년 이어진 남방수행 교과서

<사진설명>패엽경 조성의 역사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더없는 자랑거리다.

성지를 순례하고 역사의 흔적을 찾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여정을 감당할 만한 충분한 체력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한 상상력이다. 붓다고사 스님과 관련된 더 이상의 흔적을 이곳 알루위하라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7년을 머물렀다는 주장도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할 부분이다. 하지만 굳건해 보이는 얼굴의 저 동상 앞에서 잠깐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고서야 어찌 붓다고사 스님을 만났다 할 수 있을까. 인도의 북부 부다가야에서부터 남쪽 끝 인도양의 작은 섬 스리랑카까지 이어진 붓다고사 스님의 구법 길은 수천 킬로에 달하는, 온갖 교통수단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다. 그 먼 길의 여정이 얼마나 고단했으며 그 여정의 끝인 이곳에서 삼장을 접한 스님의 법열은 또한 얼마나 컸을까. 때론 목숨을 걸어야 했을지도 모를 그 구법의 길을 묵묵히 이겨내고 삼장을 접한 붓다고사 스님의 지극한 원력이 없었다면 그처럼 방대한 양의 주석서 집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법등을 전하기 위해 다시 배에 몸을 싣고 남방을 향해 기약 없는 여정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붓다고사 스님의 굳건한 신심과 법을 전하기 위한 열정, 그리고 중생을 향한 지극한 자비심이 없었다면 오늘날 불교의 모습은 또한 어떻게 변해 있을지. 살짝 미소를 머금은 듯 한 붓다고사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수록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하겠다. 머뭇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듯 해가 중천으로 달음질쳐 오른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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